국어대사전 290 바늘 - 1
최길하
1.
2026년 1월 1일이다.
정의공주 묘소에 다녀왔다. 차로15분 거리다.
정의공주(?-1477)는 세종대왕의 딸이시다.
언니가 13살에 일찍 죽었다. 실질적으로 세종대왕의 유일한 딸이다.
역산(천문과 수학)에 밝았고,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우신 분이다.
(역산에 밝았다는 것은 아마 세종대왕이 '율려신서'를 가르쳤기 때문일 것이다)
훈민정음의 하드적인 주체 자음과 모음은 만들고,
사용설명서인 소프트적인 규칙 메뉴얼을 만들어 나가던 중
<변음과 토착어(變音과 吐着어)>를 어떻게 할 것인지
합리적인 음운학이 풀리지 않았다.
쉽게 풀이를 하자면
‘몸’이라는 단어에서 초성 ‘ㅁ’과 종성 ‘ㅁ’의 발음이 다른데
이것을 같은 자음으로 해야 할지 더 붙이거나 다른 자음을 써야할지
또 ‘몸’에 조사 ‘이’가 붙으면 <모미>로 발음되는데,
끝소리가 다시 첫소리로 오는 현상을 반영하는 이치적 문제였다.
그냥 편리한대로 정하면 될 거 아니냐?
"법(法)"이란 자연의 "율(律)"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음운학 질서에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학과 과학과 음악이 서로 수치로 어긋남이 없이 맞물려 변화되듯이.
이 복잡한 것을 정의공주가 해결한 것이다.
그러니까 컴퓨터 하드웨어는 세종대왕이 만들었는데
소프트웨어의 난제를 정의공주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변음과 토착어(變音과 吐着어)> 에 관하여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시원한 정의 개념이 없어 이렇게 풀고 정의공주를 2026년 1월 1일 찾아간 것이다.
2.
차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룡(龍)을 타고 오기로 했다.
산능선을 풍수지리에서는 룡(龍)이라 한다. 산능선 산책로가 룡이 아닌가?
"行禪"이 뭐 별거인가?
생각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나와의 대화를 하는 시간이 산책이다.
내가 제천에서 어찌어찌 서울로 와서, 어찌어찌 제천에서 서울로 오신 두 분의 거장과 만났다.
내 안에 들어있는 그 두 분과 대화를 나눈다.
계산(桂山) 정원택 선생과 노촌(老村) 이구영 선생이다.
인사동 옆에 "익선동"이 있다.
계산(桂山)과 노촌(老村) 두 분은 "익선동"에서 한문교수들의 교수를 했다.
"이문학회(以文學會)"이다.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오마래(오래된 마을 그리고 미래)"다.
계산(桂山)과 노촌(老村) 두 분은 다 "제천의병"의 자손이다.
계산(桂山) 선생은 "월림"에서 태어나고 "계림 중학교(현 대제중학교) 설립자이시고
노촌(老村) 선생은 한수면 동창리 분이다. 아버지 형제분이 제천의병에 합류 모든 재산을
의병자금으로 받친다.
노촌 선생은 북에 부인과 자식이 있고 남한에도 부인과 자식이 있다.
분단에 아품이다. 이런 얼키고설킨 샤연으로 간첩 협의로 감옥에서 1980년 까지 장기수로 복역한다.
노촌 선생은 침술이 뛰어나 감옥에서 사회 저명 인사들이 침을 맞는다. 그리고 그 침은 바로 수거해
가는데 노촌 선생이 몰래 수감자들의 침을 놔주기 위해 침바늘 하나를 숨긴다.
그 숨긴 곳이 <국어대사전 290페지>다. 꼭 끼워놓으면 찾을수가 없다.
왜 290페지지 290=이구영 선생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국어대사전(일편단심과 삶) = 290 = 이구영 = 숨긴 바늘(치료)
곧 선생의 삶을 한 바늘에 꿰맨 일관(一 貫)이 아닌가?
1980년 출감을 해서 잠시 한수면 동창리에 사셨는데 그때 제원군수가 막걸리를 질머지고가서
제천찬양 글씨 2장을 받아온다.
그런데 내가 서울와서 고물장수 한테서 4년 전에 한 점을 발견하고 샀다.
지금 의림지 대도사 차실에 걸어놓았다.
그런데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 글씨를 보면 사람을 안다.
노촌 선생의 글씨는 획과 점의 두께가 일정하다. 일편단심이다.
한석봉의 글씨가 왜 임금과 행정서체가 됐고,
안평대군 글씨체가 활자가 됐는지 글씨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추사체는 왜 임금이나 행정서체가 되지 못하고 스님 글씨로도 안되는가는 글씨를 보면 안다.
파석(타제석기)처럼 날카롭다. 그 글씨는 예술체지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이 쓰면 성질 버리는 체다.
용(龍)이 다 왔다고 그만 내리란다.
(2026년 1월 1일 정의공주와 계산, 노촌 선생과 대화)
이가원 교수는 ‘변음과 토착’을 말 자체를 풀이하는 것으로 접근했다. 즉, ‘변음’은 소리가 바뀜에 따른 문자 제정이나 변동의 문제이고, ‘토착’은 조사나 어미가 붙으면서 생기는 음의 변화나 그에 따른 문자 표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는 김슬옹 교수는 이가원 교수가 말하는 ‘변음과 토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었다. ‘몸’이라는 단어에서 첫소리 ‘ㅁ’과 끝소리 ‘ㅁ’의 발음이 다른데 이것을 같은 문자로 만들 것인지, 또 ‘몸’에 조사 ‘이’가 붙으면 [모미]로 발음되는데 이처럼 끝소리가 다시 첫소리로 오는 현상을 어떻게 반영하여 문자를 만들 것인지 등이 ‘변음과 토착’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변음과 토착’이 어떤 문제였는지 명확하게 밝히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졸기(拙記, 고인에 대해 약술한 기록)를 보면, 과연 정의 공주가 재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역산’을 해득했다고 한다. ‘역산’은 ‘천문학과 수학’을 뜻하는데, 역산을 해득했다는 것은 천문학과 수학에 능했다는 말이다. 세종 역시 천문학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 예로 세종은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조선에 맞는 일월식을 계산해 새로운 역법과 ‘일성정시의’라는 시계를 만들었으며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간의’, ‘혼천의’ 등을 만들어 당대의 천문학 진흥에 힘썼다. 또한 세종은 수학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서 대군들에게 수학을 공부하게 했고, 신하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 선진 수학을 배워오도록 했으며, 본인도 부제학 정인지에게 고난도 수학서인 ≪산학계몽(算學啓蒙)≫을 배웠다.
졸기에도 나오듯, 세종은 자신을 쏙 빼닮은 정의 공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실제로 세종은 정의 공주가 시집 간 후에도 궐 근처에 살도록 했고, 부마(사위)인 안맹담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안맹담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염려해 세종이 친히 안맹담의 친구들을 불러 “누가 안맹담과 술을 마시는가?”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만약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정의 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이지적인 인물로서 자신에게 애틋했던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