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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정담

달하 노피곰 돋으샤 ..정읍사의 날개를...

작성자갑내|작성시간17.02.09|조회수261 목록 댓글 0

샘물은 흘렀더라 우무골에서,

백제의 젖샘이..

 

여기 정읍가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 봅니다.

언제 한 번 가보더라고요...'

즐거운 나날을..


갑내 두손

...........

정읍가(井邑歌)에 대하여

 

 

 

1장 연구의 개관

 

 

백제는 한반도의 따뜻하고 비옥한 지역에 위치하여 많은 농산물을 생산함으로써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남조 등과의 교역을 통해 선진국의 문물을 일찍부터 수입함으로써 삼국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훨씬 월등한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고구려나 신라에 못지않게 활발한 모습을 보여 주었음에 틀림없다. 일본에도 크게 영향을 주어시덕삼근(施德三斤)계덕삼근(季德三斤), 계덕마차(季德麻次)진노(進奴) 등이 일본에 건너가 백제악을 가르쳐 주었다. 일본에 있어 전통음악으로 손꼽는 기악(伎樂)도 백제인, 미마지(味摩之) 가르쳤음을 일본서기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공후(箜篌)는 중국에서 들어온 현악기의 하나이지만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해져 백제라는 의미의 구다라고도 불리어진 사실에서도 백제의 음악이 얼마나 융성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기록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것은 영성하기 짝이 없다. 정확히 말해서 원형이 그대로 현존하는 것은 한 편도 없다고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백제유민들이 백제에 대한 미련을 지우기 위하여 무자비하게 말살한 데 그 원인을 찾수 있을 것이다. 무지한 탄압에도 구하고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하던 민요는 어쩌지 못하여 많은 부분이 뒷날까지 전하였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조 삼국유사의 작자나 삼국사기의 작자는 의도적으로 도외시한 듯한 편의 곡명조차 싣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겨우 삼국사기에 중국() 사료인 통전(通典)과 북사(北史)를 각각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언급되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백제의 시가를 탐색한다는 작업은 절망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조 초의 문헌에 선운사(禪雲山)지리산(智異山)무등산(無等山)방등산(方等山), 정읍(井邑), 산유화(山有花), 등의 노래가 백제악이라 하여 전하고 있기 때문에 백제 시가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문헌에 전하는 백제의 가요를 통틀어 조감한 바 있거니와 본고에서는 정읍가)에 초점을 두어 몇 가지의 사견을 피력해 볼까 한다. 정읍가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상당히 높아서 매우 많은 량의 주석과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데 상대가요의 해독과 구가 거의 다 그런 것처럼 역시 이것에 관해서도 자기 나름의 주장들을 내세우고 있어 다양한 견해들이 난립, 족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연구라는 관점에서 , 서로 다른 독특한 지론들은 바 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정독하여 그 구조는 객관적으로 규명해야 됨에도 를구하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부대설화 등에 매이거나 또는 자가류의 상상에 의하여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써 권위내보이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정읍가의 해석을 포함하여 고전 연구에 있어 지양해야 할 점을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의 취급에 있어서 소홀한 점을 들 수 있다. 원전과 그 관계문헌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정밀하게 검토해야 옳은 일인데도 그렇지 못하고 자가류의 주장에 알맞은 자료을 편협스럽게 취사선택해서 쓰는 경우가 가끔 눈에 뜨인다.

둘째기록의 미시적인 자전에 구속되어 작품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위에 든 첫째의 경우가 자기의 주장을 위해서 때로는 원전을 자의적으로 개변하는 대담성을 보여 위험성을 드러낸다고 하면이것은 훈고학적인 주석과 때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잘못된 기록내용을 금과옥조처럼 여겨 결국은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이상에 든 두 문제를 어떻게 합리적이며 유연성 있게 처리해 나가느냐하는 데에 그 성패의 관건이 놓인다.

셋째, 주석적 해독의 단계를 연구로 자처거기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과거의 고전연구는 거의 그러한 양상을 보여 주었다. 물론 어법에 따른 해독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해독이 다음에 올 연구의 정지적인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넷째주변 연구에만 너무 몰입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신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작자의 전기적 사실이나 시대배경 등등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작품의 본문에 기초한 분석을 우리 고전문학작품에 시도할 때, 적지 않은 무리가 야기것임은 뻔하며 따라서 그러한 방법에 대한 비난을 모면할 길이 없겠으나, 작품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에서 원용해봄 직하다고 본다. 현대문학에 속하는 작품과 고전문학에 속하는 작품의 접근방법이 따로 있는 양, 아는 것은 큰 착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섯째, 작품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문학 현상을 어느 하나, 이를테면 심리학, 사회, 인류, 신화학 등등의 보조과학을 이용하여 그 근저로부터 해명하려는 방법상의 아쉬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에 든 신비평가들로부터 배격을 받고 있는 것들인 바,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방법이 사회학이나 심리학, 력사학 등 문학외적 사실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도 하나의 심리적 산물이요, 사회력사적 산물이고 보면, 다양하면서 넓은 천착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특히 고전문학의 경우, 그러한 시도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될 줄로 믿는다. 그밖에도 가요의 경우, 국악과의 관련성에 대한 외면, 또 맹목적인 권위에의 추종 등등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상 열거한 사실들을 머리에 담되 지나친 욕심을 부리려고 하지 않는다. 정읍가를 주로 달노래라 보고 r에 초점을 두어 인류학적 측면과 심리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려 고 하는바(이 소전문헌, 제작시기, 작자, 내용, 형식 등을 정리 겸해서 가볍게 언급하고자 한다. 이렇게 악사와 북의 배치 상황에 관하여 쓴다욤에 잇대어 정읍가의 가사를 쓰고 있는데, 으로의 서술을 위해서 그대로 옮겨 보기로 한다. 원문은 한 행에 두 줄로 쓰여 있는데 편의상 한 줄로 하되 판의 위와 아래를 그대로 맞추기로 하겠다.

前腔하노피곰도도샤어긔야머리곰비취오

시라어긔야어강묘리小葉아으다롱디리後腔

져재녀러신고요어피야즌디쿨드디을세라어긔야어강

됴리過篇어느이다노코시라金善調어긔야내가논디졈그

ᄅᆞᆯ셰라어긔야어강됴리小葉아으다롱디리

이 뒤에 춤추고 노래하는 방법이 다음처럼 상술되고 있는데 이것은 고려사 악지의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이밖에 동국여지승람에도 고마사 삼국속악조와 거의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또 조*록권 32 중종 134월조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성소소복부고(惺所覆부고), 증보문헌비고 에도 보이며 특히 시용향악보와 대악후보(樂後譜)에는 악보가 실려 전하고 있다. 그리고 투호아가보(投壺雅歌譜)에는 아롱곡(阿弄曲)이라 하여 다음처럼 실려 있다.

阿高高的上來些遠遠的照着時阿 漁«魚堪釣阿弄多弄日曰尼

달아노피곰도드샤멀니비취곰시라어긔어감조리아롱다롱일일

 

1. 소전 문고

백제사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소중한 사료가 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삼국사기와 국유사의 두 저서다. 이 저서들이 준거한 사료들이 많이 있었건만, 현재에는 모두 무위로 돌아가 하나도 전하는 게 없어서 결국 두 문헌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수밖에 없음온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나 고려조에 이루어져 우연히 남온 이 사료들은, 하나는 관 곧 상층문화와 다른 하나는 민 곧 하층문화로서 서로 조응되는 표리의 관계에 놓이는 바, 모두 신라쪽으로 심하게 경사되어 있어서 백제사 특히 문학음악 둥에 관한 연구로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삼국악지 권32 잡지 제1속에 악지(樂志)가 있어 악기, 가악, 무악과 더불어 고구려, 백제악도 설정되어 있으나 빈약함을 피할 수 없다. 정읍가의 명칭과 그 가의가 기록되어 현부하는 최초의 것은 조선조 초 왕명에 따라 여러 사관에 의하여 만들어진 고려사다. 고려사에도 악지(樂志)라는 항이 변도로 설정되어 있는데 우선 악지 2의 배렬 순서를 든 다음 거기에 실린 정읍가와의 관련 내용을 훑어보기로 한다.

雅樂 唐樂(樂器 呈才(舞樂) 歌詞

俗樂(*俗樂)(樂器 呈才(舞樂) 歌詞

三國俗樂

用俗樂節度

현재에도 구왕궁아악(舊王宮雅樂)으로 남아 있어서 그 명칭을 볼 수 있다. 이상 정읍가의 명칭이 실리어 전하는 문헌들을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뢰도가 높은 것은 고려사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가사는 r악학궤범에만 보이니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읍의 명칭을 가진 제문헌의 기록들이 과연 같은 내용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서로 틀린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보통명사로서의 곡조명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가설도 보여 준다.

이러한 견해 특히 후자의 경우는 그럴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헌영 교수는 그의정읍사의 연구라는 론문에서 서로 틀린 것이라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 삼국속악을 악보에 근거하여 차례를 엮었다는 근본사료인 악보가 전게한 고려속악 24편을 편차한 악보와 동일한 악보를 지칭하는 것인지, 또는 달리 r삼국속악보(가칭)라는 것이 있어 r고려속악보(가칭)와는 다른 자료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고려사편수관들이 이것을 구별하여 고려속악삼국속악으로 구별하여 놓고 있는 점은 주목을 끈다. 이리하여 삼국속악조가 동경계림부와 동경(東京, 안강)을 가사내용(음악절주도 달랐을 )에 따른 구별을 내려놓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에 보이는 r정읍사(정읍곡으로 가창)와 같은 자료인삼국속악조에 보이는 정읍(井邑)은 가사내용에 있어서나 음곡(音曲)에 있어서고려사악지2의 편차방식으로 본다면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고려사 악지의 편차 방법으로 보아, 동서에 각기 실려 있는 동명의 작품을 실상 별개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정읍사도 고려사삼국속악조의 정읍과 상이하며 또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도 r삼국속악조의 부연에 불과한 것으로서 전자의 정읍사와는 전연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작자, 제작년대, 제작환경을서로 달리 하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는 까닭은 별개의 가요에 대한 사승(史乘)의 기록 때문이라는 것인데r악학궤범r고려사가 똑같이무고(舞鼓)조에 싣고 있는 정읍사는 단적으로 고려 충렬왕 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그 나름의 독특한 주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학궤범 소전의 정읍가(井邑歌)의 작자와 제작시기를 달리 보려고 한데서 생겨진 견해라 보여 진다. 같은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는, 백제시 정읍가가 무비판적인 고려사 편수관들에 의해 실려진 것으로 보고 숫제 백제의 것은 원래 없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추단함으로써 앞서 주장과의 논리상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려 때 시가 전설이 생겨났다는 것도 얼핏 납득하기 어렵거니와r고려사의 사관(史觀)이 무비판적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전설은 아무런 근거 없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하나의 민간전승으로서 긴 역사적 연원이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또 고려사의 사관(史官)들이 가볍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삼국사기잡지 악지의 편차 방식을 따랐을 뿐 아니라 용어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 역력히 엿보이기 때문이다. 최정여 교

수는 그러한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崔正如. 井邑詞 再考).

필자의 견해로는 고려사(高麗史) 악지의 r삼국속악조 앞에 총설로서 백제시대로부터 전승해 오던 가요로 고려조에서도 불리었다고 봄이 온당할 것 같다. 이 점은 다음 항에서 더 서술하거니와 여기서 분명히 밝힐 것은 정읍 군의 가요는 상호 별개의 것이 결코 아니며 이것의 연원이 백제 또는 그 이전의 삼한시대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新羅百濟高麗之樂高麗竝用之故附着於此詞皆俚語, 고려사).

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현존 이왕직(李王職) 아악부 정읍(井邑))과의 관계다.정읍을 보통명사적인 악조의 뜻으로 본다면 문제는 간단할 듯싶으나, r악학궤범의 여러 군데 보

이는 처용만기(處容慢機)봉황음중기(鳳凰吟中機)북전위기(北殿急機) 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는지 곤란하게 된다. 존의 아악 정읍곡(井邑曲)과 정읍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직은 그 단서조차 잡히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건대 정읍가의 사()만 중종 시에 궁중연악에서 배서 그 곡은 점차 바뀌어 느릿하고 처절하던 것이 장중한 것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되 정읍 군()의 노래들을 모두 백제의정읍가에서 연원된 동류의 것으로 보고자 한다.

 

2. 제작시기 및 작자

이 가요의 제작시기와 작자에 관한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는 사료의 기록이 분명함에도 불

하고 매우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1) 제작 시기

백제의 멸망 후 8백여 년이나 지나 세 왕조의 부침을 거쳐 비로소 문자로 정착된 때문에 백제의 가요로서 그 원형이 조금의 손상이나 개변됨이 없이 그대로 고스란히 현존한다고는 믿는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백제 멸망 후의 다난한 역사도 그렇거니와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8백여 년이나 그대로 전승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을 전혀 무시하고 고려조나 조선조의 노래로 본다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적어도 이 가요의 모티브나 테마가 삼국시대의 고대문학적인 요소를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 그 고 장르상의 형태 발전에 따른 통시적 위치를 규명함으로써 백제의 것이냐 아니면 비백제의 것이냐 하는 결론을 추출해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동장되는 것은 "삼국시대의 고대적 요소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이것

필자는 제의(祭儀, ritual)라고 본다. 우선, 제작시기에 관한 학계의 대표적인 견해들을 정리하여 소개해 보인 다필자의 의견덧붙이고자 한다. 학계의 견해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백제의 가요로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 그리고 이것에도 저것에도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관점이 그것이다.

() 백제의 가요로 보는 견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김태준, 문일평, 이병기, 이희승금형 규장덕순, 박성의, 김동욱, 강귀수, 이종출, 최정여 둥의 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대부분, 소전 문헌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믿거나 또는 문헌의 신뢰성을 규명하여 백제의 노래라고 보는 것인데,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현재 전하는 백제 노래의 단 하나인 것이다(이병기,박병채, 최정여, 강귀수 외).

() 비백제의 가요로 보는 견해

백제의 가요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가요 내용의 성격, 형태 그리고 고려속악 무고(舞鼓)에 실려 있다는 점 등이 그 근거가 된다. 이 주장은 첫째, 고려조의 가요라는 것, 둘째, 조선조의 가요라는 것 셋, 왕조는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으나 신라 유리왕조 솔가에서 파생되었다는 것 등으로 분류할 있는바첫째의 견해가 절대 지배적이라 할 수 있다.

() 고려조의 노래라는 주장

이 견해는 다시 둘로 나눈다. 막연히 고려조의 가요라 견해시기 히 잡아 고려 충열왕

때 제작되었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 확실한 년대는 모르나 고려조에 창작 되었다는 견해

앞에서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라 말한 바 있거니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려조의 노래라고 보

고 있다. 량주동, 조윤제, 지헌영, 김사엽, 장사훈, 리명구, 0, 고정옥 등 많은 학자들이 이에 속하는데 몇 가지 견해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본가는 현존 유일의 백제가요인 바 형성년대는 미상이나가사 중에 r전주의 명칭이 있을 보아 백제대의 소성이 아니고 신라 경덕왕 이후 백제지방의 행요이였음을 알 수 있다. 정 읍사(井邑詞)는 백제 노래라고 했으나 여러 가지로 의심된다. 아마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백제지방의 노래이리라.

() 고려 고종 대 전후에 제작되었다는 견해

것은 지헌영교수의 주장으로서 학계에서는 유일한 학설이 되고 있다. 따라서고려사악지 2 고려속악 무고조의 기록과 악학궤범 무기정재조의 기록으로써만 한다면 r정읍곡r정읍사는 고려속악으로 이혼(李混) 시대(고종 충선왕) 형성되었던 것이 리조 성종대까지 궁중가악으로 전승되어 악학궤범에서 고정된 모습을 이 볼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현존 정읍사(r악학궤범에서 볼 수 있는) 가사는 이혼(李混)이 만든 속악이다.

() 조선조의 가요라는 견해

이 주장은 위의 ()에 결론을 두면서 서술의 전개 상 쓰여 진 것으로 보이는 바, 지헌영 교수의 같은 논문 서두에 보인다. 악학연범 록은 리조 성종대에 있어서 문자로 고정정읍사의 모습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며, 또 학연화대처용무합설(花臺處容舞合設)에서 무고정재(舞鼓呈才)가 어떤 기능지녔던 것인가를 보이는 것이니정읍사는 엄격 의미에 있어서는 리조 성종대의 가요로 수밖에 없다(이탁).

() 도솔가(兜率歌)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

어학적으로 살펴 본 우리 시가 원론에서 이탁(李鐸) 교수가 보여 준 주장으로서 확실한 왕조는 밝히지 않아서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글의 흐름으로 보아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되 백제와 신라를 통틀어 하나로 묶는 것 같다.

이밖에 3구가 다 단구로 된 삼구륙명의 기본형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바로 정읍사(井邑詞)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사내(思內)와는 달리 정읍사란 이름이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사내(思內)란 가요종류의 이름이요정읍사는 마치 안민가, 혜성가, 찬기파랑가와 같이 사내가중의 한 가요의 제목인 것이니 정읍사란 사()는 사뇌의 약칭이거나 뇌()자의 탈락일 것이다.

() 백제가요란 점에 회의적인 견해

물론 비백제의 가요로 보는 견해들은 모두 이 범주 속에 속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말하고

자 하는 것은 문헌의 기록을 부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다론 왕조의 노래로 보기도 어

려워 하는 그런 애매한 태도다. 이를테면 조윤제교수의 태도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오늘날 백제의 시가라 하며 고려 이래로 전하고 있는 정읍사만 보더라도 또는 마치 백제의 정읍사와 같이 장구의 구별이 불분명하다(조윤제).

이상으로 정읍가의 제작 시기를 학계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관해 종합, 분류하여 제시하였거니와 여기에는 각기 많은 문제점을 수반하고 있다.

첫째, 백제의 가요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헌 검토 없이 액면 그대로 믿는다는 점을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헌을 신뢰해야 까닭을 분명히 밝힌 분도 없지 않으나 다른 각도에서 더 밝혀야 될 필요성을 느낀다. 필자도 정읍가를 백제의 것으로 보는 터로서 그 까닭은 후술하고자 한다.

둘째, 비백제의 가요로 보는 견해에 있어서 먼저고려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정조와 형태 등으로 보아서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조선조 초에 간행된 문헌에 전해 온다 하더라도 백제의 것이라 하여 그 제작동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고 또 그 모티브가악학궤범소전의 정읍사 내용과 일치한다고 하면 구태여 고려의 것으로 보아야 할 까닭이 없지 않을까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가요의 성격으로 보아 다른 고려속요와 구별된다고

믿는 것이다. 다음, 고려조 고종 전후 충렬왕 대라고 정확히 잡아서 그 연대를 밝힌 견해에 있어서도 광범위하고 긴밀한 고증에도 불구하고 의문점이 따른다. 이 견해는 주로 두 가지 사실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는 고려사의 무고조 내용과악학궤범소재의 무고조 내용이 거의 일치할 뿐만 아니라 궁중의식인 학연화대처용합설(鶴蓮花臺處容合設)에서 함께 불려졌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한림별곡에 나오는 구절과 동일한 구절이 있다는 점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한림별곡이 제작, 유행된 시기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r무고(舞鼓)의 제작시기를 더 이상 소급해서 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견해다. 무고는 r고마사에 의하건대 이혼(李混)이 영해의 적소에서 소요했다는 것으로서 고려조의 궁중연악으로 채택되어 정읍가가 그 속에 끼어 불리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혼(李混) 부자의 영향으로 인하여 정읍가가 궁중연악으로 까지 끼어든 것은 기록대로이지만, 다른 노래들 이를테면 처용가, 정과정봉황음북전영산식상 등과 함께 불려 졌다는 점과 고려사의 고려속악조에 보면 r무애(無碍)등 신라요가 들어 있다는 점 등을 상기해 볼 필가 있다.

그리고 한별곡 가운데의 (내 가논남갈셰라와 정읍속의 (내 가논그ᄅᆞᆯ새라)에서 상호일치하는내가논 들어 한림학사문인, 악사, 악공 또는 교방기생 등 특정한 환경의 계급에서 사용되던 은어가 아니냐 하는 것으로서, 한림별곡의 창작년대가 분명하니만큼

서로 가까운 시기에 쓰여 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말내가논가 나만이 가논 곳곧 비밀적인 은어로서 인체의 성적인 상징으로 본다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우연히 한 구절이 같다고 하여 창작 초기를 하나의 범주로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논>가 유행어로서 폐쇄된 그 사회의 어느 특수한 환경하에서 단기간 유행한 말이 아니라고 할 때 오히려 정읍가로부터 영향을 발은 것이라고 주장해도 반론을 펴기 어려울 것이다. 이밖에 제작연대를 조선조 성종시운운은 이 주장자가 다른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술상 삽입한 말이기 때문에 문제 삼을 까닭이 없다고 보며, 신라 리왕시 솔가게서 파생하였다는 견해도 학계의 여러 신중한 주장과 거리가 너무 멀며 따라서 독단과 비약의 위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견해는, 문헌은 비록 백제조로 되어 있으나 고려조로 본다는 립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정읍가(井邑歌)가 신라의 향가와는 물론 고려속요와도 서로 이질적인 발상양식을 취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발상양식의 독특한 바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달에 관해서는 내용 부분에서 상술하고자 하거니와, 류생활의 시작과 함께 신화적인 존재였을 것이라고 본다. 특히 농경사회로 정착되면서는 상대사회의 지상목표였던 풍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신화적 의미가 더욱 커갔을 것이며 또한()의 결정으로이 주는 의미를 여체와의 관계로서 성과 관련된 풍요 등에까지 신화의 령역은 확대되었을 것이다. r정읍가는 그런 천지신명으로서에게 기원한 종의 제의적(祭儀的) 성격을 지니는 것이며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순한 에로티시즘의 망부가-여인으로서의 심한 질투를 결들인 것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짙다.

의 상대적 성격을 우리는 신라의 향가 중 달을 담고 있는 가요와 비교할 때 그 차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月下 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ᄃᆞᆯ하이뎨 西方장 가샤리고

咽鳴爾處末 露曉邪隱月羅里«

열치매 나토얀 ᄃᆞ리

 

이상의 사뇌가 가운데. 보이는 달은 정읍가에 나오는 달과 성격을 달리한다. 물론 빙(祈願)을 받는 당체로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나>을 파악하는 시각에 큰 상이점이 있다. 곧 사뇌가의 경우는()이 불처(佛處)여여(如如), 진여(眞如) 둥의 상징으로 쓰여 불교적인 색채가 질은데 반하여 정읍가의 경우는 토속신앙이 순수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진여(眞如)의 상징으로서을 드는 바이것은 인도의 자연적 환경에서 말미암은 산물로서 불교가 전래된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현금도 그 상징체계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신라 탈해왕대에 불리었다는 가사불전의 돌아악(突阿樂)”은 어쩌면 불교적인 열반의 원관념으로서가 아닌 천지신명으로서의 달노래였을지 몰라서 r정읍가와 동궤의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불교적인과는 달리 기원이나 여성적인 에로티즘은 "동경명기월량(東京明期月良)의 처용가를 위시하여 정과정곡의 아니시며 거츠르신 ᄃᆞᆯ 殘月曉星이 아ᄅᆞ시리이다.”, 송강(松江)

각시님 달이야ᄏᆞ니와 구ᄌᆞᆫ 비나 되쇼셔

찰하리 싀여디여 落月이나 되야이셔미인곡>

님계신 안희 번드시 비최리라상동

東山의 ᄃᆞᆯ이 나고 北極의 별이 뵈니

님이신가 반기니 눈물이 절로난다(사미인곡

둥 여러 노래, 황진이의 중의적 어구인 明月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등의 바

탕에 흘러 오늘날의 여러 시 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천체로서의을 끌어와 기원과 애정을 노래한 작품이 고려속요에는 찾

기 어렵다. 내용으로 보아 석별(惜別)과 가시리와 서로 대응되는 것 같으면서 실은 정읍가가 더 고풍스럽고 원시신앙에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정읍가는-기록대로 백제의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 노래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조에까지 전승되어 널리 불리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혼(李混) 부자에 의해 음악적으로 정리되어 궁중악으로 채택되었고 이것이 조선조에까지 지속되서 궁중연악으로 불려 오다가 중국의 시가가 우세해 짐에 따라 음사(淫辭)라는 구실로 궁중악에서 제거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정읍가는 국문학사상 현존하는달노래>의 원류로서 달 신화>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3. 작자 논의

정읍가(井邑歌)의 작자 문제는 창작년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느 왕조 때 지어지고 불리어진 것이냐에 따라 작자는 각각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요의 경우는 어느 왕조에 되어 진 것이냐에 활발한 론의가 있어 왔을 작자의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작자에 관해서 가볍게나마 론의된 견해들 합해 보면 다음처럼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백제 어느 행상의 처

둘째, 고려조 이혼(李混) 부자 또는 그의 주변 관, 교방기생 등

셋째민요

첫째의 견해는 문헌에 나와 있는 기록을 그대로 믿는 입장으로서 역시 소전대로 백제의 가요로 보는 학자들이 대부분 취하고 있는 주장이다. 둘째의 것은 앞서 제작 시기를 언급하는 곳에서 잠깐 이야기한 바 있지만, 지헌영(池憲英) 교수의 특한 주장이다. 지헌영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고려조의 사회적 불안과 동요라는 시대적 환경에 영향을 받아 이혼(李混) 또는 그가 중심이 되어 복산장(福山莊) 출입의 관원이나 한량들이 작사, 곡하여 놓고, 양반의 체면상 작자로서 자기들을 내세우기 곤란하니까 전설을 만들어 엉뚱하게 백제 행상의 아내가 지은 것처럼 위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아무 비판 없이 조선조초고려사편찬의 사관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이 주장은 고려사와 악학궤범의 무고조(舞鼓條)에 정읍가가 가창이 되었고 무고는 이혼과 성균악정이었던 그의 아들 이이(李異)가 정읍가를 작사, 작곡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한 위험한 유추가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다른 가요와 마찬가지로 전래하는 것을 전문적인 음악가의 립장에서 부분적으로 약간 수정만 가하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백제 때부터 유행하던 가요가 통일 신라를 지나 고려조에까지 이르러 에로티시즘이 활개를 치는 퇴폐적인 사회환경에 따라 되살아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읍 지방에서 불리던 민요를 보면 비 그런 흔적을 찾아 낼 수 있다.

의미로 본 이 노래는 원래 어느 특정한 일들 이를테면 가부장적인 부권사회에서 한 여인이

바람난 남편을 기다리다가 운명한 사례, 또는 나라의 군역 등에 동원되어 오래 동안 들아 오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을 때, 한 사람(여인)의 입에서 저절로 불리던 것이 점차 전파되면서 널리 불린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사 악지2 삼국속악조와 증보문헌비고 예문고(藝文考)에 실린 백제의 가요인 선운산, 방등산, 지리산, 무등산 등도 마찬가지다. 선운산가는 군역에 나가 오래 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어느 장사인(長沙人)의 아내가 지은 것이며 방등산(方等山, 半登山)가도 도적에 잡힌 여인이 즉시 와서 구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원망) 지은 노래라고 할 때 정읍가와는 의미상 오십보백보가 된다.

앞서 논의한 대로 원래 이 정읍가부른 층은 이름 없는 서민의 아낙네이었지, 이혼(李混) 같은 양반 계급이 아니었다. 엘리엇(T.S.Eliot) 그의 글의 세가지 소리에서,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음성과 크든 작든 어떠한 하나의 청중에게 말하는 시의 음성, 그리고 시인이 만들어낸 극중물로 하여금 시로써 말을 하려고 할 때의 시의 음성으로 나누었거니와, 대개의 경우 시는 문학으로서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상대시가의 경우는 가영자 군()의 생활환경과 불가불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의도적으로 극적구성을 기도하거나 자기의 감정을 객관화하지하지 못하고 충만한 정볼 단순소박하게 로출하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정읍가도 어느 관원들이 여러 작품으로 지은 것이 아

니라, 남편에의 그리움(기다림),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여인의 질투, 그리고 이 노래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생활의 어려움 등이 어우러진 절실한 생활감정을 바탕으로 한 백제여인들의 노래라 보아 이 노래의 작자는 어느 한 사람에게 국한시킨다는 것온 무리일 상 싶다.

이러한 중국의 사서(北史, 隋書)가 전하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여인들이 갖는 한()이나 그리움(望夫)은 대단하였고 또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우리는 또 왜 하필이면 행상의 처라 하여 행상을 들고 있느냐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한 장소에 틀어 박혀 살지 않고 집시처럼 유랑하는 장돌뱅이가 그의 남편으로 등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치, 가산(可山)의 서정시와도 같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허생원을 위시하여 조선달동이 등의 장돌뱅이가 등장함으로써 더 애틋한 정조를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정착해 살 수 없었던 유이민의 한 계층이었을지 모른다. 추측이 더 허락된다면, 고구려에서 내려온 지배족의 탄압을 받던 원주민의 한 계층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정읍사가 불리던 때 지게()가 벌써 쓰였고 지게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보부상이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 삼국지(三國志)의 자료를 보면, 어쩌면 이 가요는 백제보다 더 오래전 이를테면 삼한시절부터 불리어진 민요로서 오늘날의 강강수월래, 오들또기 등으로 접맥되는 옛날 상고의 달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2장 정읍가(井邑歌)의 내용

 

이 노래의 제작시기가 고려냐, 백제냐 등등의 서로 엇갈린 주장과 함께 내용에 대한 해

독도 구구한 실정임은 주지하는 바와 갈다, 특히 몇 어휘의 문제, 이를대면. 후강(後腔)

는 후강전(後腔全)으로 보는 견해를 비롯해서 몇 가지 어구의 해독이 학자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이 나름대로의 해독에 머물려 있을 뿐

문학적인 감상과 과학적인접근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본고에서는 번거롭게 느껴질는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해독을 하되 원형적인 탐색이라

는 데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갈이 이 가요도 달 노래라 규

정하고 신화비평의 방법과 또한 이 노래의 페르소나가 사랑에 관련된 여인이라는 점에서 심

리적인 접근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어사의 풀이를 현대의 입장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적 문맥에다 놓고 분석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자구에 얽매일 필요

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의 어사를 놓고 글자 그대로 보려는 입장과는 달리 역설이라든가상징이나 은유 등으로 보고자 한다.

 

우선 이 노래의 이름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바른 순서가 될 것이다. 이 노래의 이름에 관

 

해서는 별깊은 고찰을 보여 주고 있지 않으나 대강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수 있

 

. 첫째 고려사에 보이는 정읍전주속현 운운의 말하자면 현 전북의 정읍을 지칭한다는

 

것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듯하며 둘, 보통명사로 보되 음사(淫辭)라는

 

데에 착안, 골 곧 여성의 성을 상징한다는 독특견해이고 마지막으로, 혹시 음악의 곡명이

 

아닐까 하는 견해이다.

 

필자는 고대의 가요 특히 고려사 악지에 보이는 노래의 대부분이 산천명 등 지명을 피하고 있

 

을 뿐 아니라 이 노래의 가사 중에 져재가 있음을 미루어 보아 현 전북의 지명이라고 믿는

 

. 하기야 원래 민속에는 제목이 붙지 않는 법이어서 고려사의 편찬자들이 붙였으리라 보지

 

만그 당시의 말로 바꾸어 본다면 얼ᄆᆞᆯ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세종실록 지리지의 은천

 

이 현의 서쪽어을동(於乙洞)이고, 고려사 권57에 교하군(交河郡)이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천정

 

구현(泉井口縣) 달리 어을매곶(於乙買串)이라 함을 보면 천(), (), 이기 때문이

 

.

 

이러한 사실은 달리 나정(蘿井)을 다리 나을(奈乙)이라 함에서도 그런 개연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읍현원이름은 정촌현(井村縣) 곧 얼ᄆᆞᆯ은 성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은 이성

 

의 교합을 뜻하는 말로서 고려의 속요인 동동(動動)에 보이는 어져녹져하논어져

 

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른이라는 낱말의 어원도 이성과 교합한 자라는 얼+은이며 지금도

 

동물의 교미를 "어로다. 얼래 라 부른다. 농본사회에서는 풍요가 최대의 이상이기 때문에 암수

 

의 성을 결합시킨 지명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이 노래도 성의 결합을 뜻하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는바, 가요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가사를 차례로 분석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ᄃᆞᆯ하

 

이것은 기구이자 이 노래 전체불 포괄한다. 달을 호격으로 시작하고 있는 이 노래는 전편을

 

달을 향한 독백으로 채우고 있다. 따라서 정읍가에 있어서 달은 임 그리움의 중요한 모티브로

 

, 그리고 기원의 중요한 대상으로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체언에 감탄조사를 결합시켜 감탄적인 말을 만드는 방법은 다른 나라의 말에서는 찾기 어려

운바, 첫 시작을 갑자기 달을 부르는 돈호법(頓呼法)을 쓰고 있어 절박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준다. 더욱이 태장의 양극에 서는 이라는, 밤을 배경으로 한 천체의 이미지와 :

라는 개구 감탄모음이 중복됨으로써 그 효과는 배가되고 있다. 지용(芝容)은 우리말의 바다

처럼 해()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영어의 sea, ocean

어의 mer emd이 주는 청각적 효과에 비하여 바다의 :는 해()의 망망함과 그것의 경악

감을 십분 나타내 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 노래의 기구인 달아도 시니피에의

페이소스와 함께 시니피앙의 개구모음이 페르소나의 절박한 심상을 드러내는 데에 과적으로

여하고 있는 것이다.

 

달은 분주한 낮이 아니라 휴식의 밤에 나타나기 때운에 그리고 태양처럼 강렬한 광선이 아

 

니라 차가운 빛이기 때문에 많은 신화를 낳는다. 인도라든가 혹서의 남양에서는 달을 진선미

 

의 표상으로 삼고 있는데 불교에서 여여(如如)의 세계를 달에 비유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

 

. 이러한 사실은 동서를 막론하고 상통되는 바로서, 엘리아데는 이것을 "달 신화(lunar

 

myth)라고 불렀다. 이것은 달의 신비에 기초를 두는 것으로 부활과 재생의 원형이라는 것이

 

.

 

달은 작은 초승달로 나타나 날이 거듭될수록 점점 커져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점차 작아

져 결국엔 사라져 버린다. 없어져 죽었는가 하면 다시 살아나서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달은 원

시인들에게 피조물은 죽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첫 번째의 것이며 또한 다시 재생하는 피조물의 첫

번째이기도 한 것이다. 주기적인 반복으로 인하여 달은 "영원한 회귀"를 나타내며 또한

의 의미를 지닌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인도유럽어족에 있어서 tIe monthtIe moon을 나타내

는 대부분의 말은 어근 me-예서 파생되었는 바, 가명 라틴어의 mensistIe month를 의미

하며 같은 어근을 가진 metior는 측정(mesure)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달의 운행에 바탕을 둔 농본사회(어민 포함)에 있이서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나. 가령 일본의 경우도 달의 의인신은 시간을 계산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의 경우도 두이레, 세이레 따위로 날짜를 드러낸다.

7일 곧 이레를 단위로 하고 있는 것은 도교의 영향이 아니라 보름(望月)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로 각기 나누되 그 전후를 다시 양분한 수치 때문이다. 우리말의 ᄃᆞᆯ()돌다()‘라는 동사에 나왔다고 본다. ᄃᆞ리()와 다리()이 같은 의미소에서 유추되어 파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회전하기 때문에 돌다에서 나온 말이라고 본다, 따라서 달이 축정을 의미하는 것은 인구어

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 ᄃᆞᆯ이 측정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영원한 회귀에서 오는 불사의 상징으로 보아야 하며 성과 관련해야 옳다고 본다.

회남자(淮南子)는 음()의 한기가 쌓여서 물이 되고 소기(小氣)의 엣센스가 달이 되었다고 말

 

한다, 이리하여 해가 양()의 주체라면 달은 음()의 주체(日者陽之主也, 月者陰之宗也)

 

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해를 남성에 비기면 달은 여성이 된다. 이것은 보편화된 상식이다.

 

것은 인류의 공통된 잠재의식으로서 특히 성숙한 여성이 갖는 생리현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아프리카 만데인고족은 월경을 가로루 곧 달이라 부르며 이러한 사례는 콩고의 원주민이나

기니아의 스스족에서도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말에서 발견된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섬에 사는

 

원주민은 월경을 달의 병곧 마태마라마라고 부르는데 나름대로 달의 형태와 짝하여 나타나

 

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달을 그들의 진정한 남편이라고 믿는다. 여기에서 언뜻 달을 남법편로 보는 게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에 있어서는 성의

기능과 관계가 깊기 때문에 생겨진 민속신앙에 불과한 것으로 여성의 역설적 표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튼 달은 여성의 성욕과 밀착되어 있으며 음양의 결합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남녀

의 로맨스는 휘영청 달 밝은 밤을 공간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이

성씨네 처녀와 처음이자 마지막 관계를 가진 공간적 무대도 달밤이며 황진이가 벽계수와 수작

을 건 때도 역시 달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처용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오늘날의 여러

민요들에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 있어서도 가장 오래된 문헌인 시경(詩經) 속에 달과

관련하여 임 그리움을 나타낸 노래가 들어있다.

따라서 이 정읍가의 머리에 느닷없이 나오는 "은 퍼스나의 복잡한 사랑과 간절한 기구가

교요하게 얽혀 있는 일종의 객관상관물로서 전편을 지배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노피공 도ᄃᆞ사

머리곰 비취오시라

이것은 돌연한 기구 ᄃᆞᆯ하에 이어 서사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곳은 없다. 노피와 머리는 서로 대를 이루는데 전자가 수직적인 것으로 천상에의 승화 곧 기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횡적인 것으로 님에 대한 그리움 곧 녀인의 질투로 얽힌 미

묘한 감정이 스미어 있다. 그리고 이곰이 반복됨으로써 그러한 분위기를 한층 강화해 준다,

져재 녀러신고요

ᄅᆞᆯ 드욜셰라

이것은 본사라고 할 수 있다. 달에게 높이높이 떠 멀리 멀리 비추어 달라고 한 것은 오로지

임의 안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부은 연구자들 간에 엇갈리는 석이 많아 우선 가지만 골라서 보기로 한다.

()全州市(시장)에 가셨는가요진데를 디딜.

()全州市場에 가셨는가. 진데(泥處)를 디딜세라.

() 져자에 가신가. 이뻐하는 곳(花柳) 드딜가 두려워 하외다.

() 저자를 다니고 계신가요. 제발 즌곳일란(泥水汚 ) 디디지() 않게 하여 주소서.

() 市場에 가 계신가요. 진 곳을 디딜세라.

() 모든 장에(하도 여러 장에)가신 그 이라(그 사람이고 보니)진 데라도 디딜까 걱정이다.

(-)은 거의 갈으며. ()全州市場이냐, 그냥 市場이냐만 다를 뿐 역시 같다()의 경우도 "져재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보일 내용의 파악에 있어서는 같다고 수 있으며 ()의 경우도 가신고요의 해석이 특이할 ()과 비슷하다. 위 가운데에서 가장 특이하면서 이 가요의 성질상 정곡찌른 견해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이다.

필자도 ()의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하는바문제가 되는 어사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가요에서 가장 논의가 활발한 곳은 "져재u인데 학계에서 논의된 견해들을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져재, 全州市場이라는 것

둘째, 져재 곧 시장이라는 것

셋째. 져재"이되 온(모든) 시장이라는 것

넷째, ""자의 오각이 아닐까 하는 것

 

첫째의 경우는 고려사의 기록을 믿는 데서 오는 것으로백제시에는 완산 또는 비사벌(比斯

)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15(757)에 전주(全州)로 개명하였기에 잘못된 견해아닐까 한다. 이의를 제기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노래가 채록될 때의 지명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사정을 모르는 데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처용가에 보이는 동경(東京)이나 서경별곡

에 보이는 서경(西)이 그 노래가 불렸던 당시의 지명이 아니고 적어도 채록될 때의 것이라 볼 때, 전주(全州)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全州져재"라 하지 않고 져라고 한 것은 은 주()가 지명에 붙는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한다. ()는 모두 한 글자의 이름으로, 그리고 군현은 두 자의 이름으로 각각 고쳤으므로 全州"의 경우는 전()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사의 의미로 볼 때 정읍에서 가까운 가장 큰 고을은 전주이며, 읍과의 거리가 불과 7.80리밖에 안 되므로 전주시장이라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다. 끝으로, 져재'라고 하지 않을 경우, 후강전(後腔全) 되는데 이러한 음악의 술어가 정읍전문이 게재된 학궤범이나 그밖의 문헌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둘째, ‘져재로 보는 주장은 앞의 견해와 아주 대조적이다. 우선 L져재 위에 전() 자가 관치되어 全州져재의 준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인데, 그 이유다음과 갈이 여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악학궤범에 있는 악곡 이를테면 처용만기(處容慢機), 봉황음중기(鳳凰吟中機), 봉황음위기(鳳凰吟急機- 三眞勺). 북전위기(北殿危機) 등의 형식어 볼 , 정읍가의 경우는 전강과 과편에 소엽(小棄)이 붙있으나 후강전(後腔全)에는 없어 후강(後腔)으로만 완전히 끝난다는 후강전(後腔全)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만약 져재 가 전주라고 하면 정읍과의 거리가 불과 7-80리밖에 되지 않는데 망부석에 발자취를 남길 정도로 절박한 상태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서 무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용향악보의 원문 후면에 낙서한 글 가운데에 후강반(後腔半)1이라는 악조명이 보인다는 사실을 들어 후강전(後腔全)이라 술어가 없지 않으리라고 본다거나 또는 정읍가는 악목곡만 빼모두 국문으로 표기되었는데 유독 전주의 략칭으로 전()자라는 한자를 끌어들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셋째, ()全州이나 -什一俱의 전()이라는 서로 팽팽히 맞서는 견해에 대하여, 시선을 좀 더 혀서 관형사 모든()으로 풀이해야 옳다는 견해다. 이르자면 전국, 전부, 전시 등에서 보이는 전()과 같다는 것이다(최정여).1

넷째, 옛 문헌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오자의 경우가 여기에도 적용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 곧 판본사본을 막론하고 오각. 오식 등 오자가 전혀 없다는 것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져재"" 의 오각이 아닐까 하는 것인바, 그 이유로 이 노래의 전편이 국

문으로 표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한자이어야 할 까닭이 없으며 또한 다른 장

으로 가시립니까라고 하는 것이 전체의 가사 내용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맥락을 이루기 때문

이라 하였다(이희승). 이상에서 져재에 관련된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집약하여 살펴보았다.

필자의 견해는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全州시장의 견해에 궤를 함께 한다. 그 까닭은

다음 항의 형식고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후강전(後腔全)이라는 악조명의 용례가 없을 뿐 아니라우리나라 말의 조어법상 한자어 +고유어 또는 고유어+한자어로 된 보통명사가 적지 않

게 있어 져재'의 조어가 가능하며 또한 ,모든으로 보기에는 이 노래의 의미상 추상성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의 오자로 보기에는 정읍가와의 깊은 상관성을 간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앞에 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 있지만, 어느 지방의 자연발생적

인 민요라고 할 때 그 불리는 지명이 쓰임은 당연한 현상이다.

져재의 경우에 있어서도, 막연히 시장에 가 계시나라든가 모든 시장에 다니고 있느냐 라

고 하기 보다는 남편의 구체적인 모습과 함께 어디엔가 있을 구체적 지명을 떠올린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정읍가의 가명은 물론 져재도 全州시장으로 보는 것이 옳

다고 생각한다.

ᄅᆞᆯ 드욜셰라

 

여기서 즌진곳(泥處)’를 이른다. 그러나 단순히 진곳을 이르지는 않는다. 이 노래의 화

 

자인 퍼스나가 여인이며, 또 오랫 동안 들아 오지 않는 남편에의 그리움은 온갖 망측스런

 

상과 질투로 가득하였다고 할 때, 고려사의 편찬자들이 발한 이수처(泥水處)라고 하기는 어렵

 

. 의 원관념은 여인의 성이다. 일찍이 지헌영교수는 "(眷處)로서 그리워 하는 곳

 

뻐하는 곳으로 파악, 화류항이라고 볼 수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필자는 여성의 성을 가리킨

 

다고 본다. 그것은 이 노래가 음사(淫辭)라고 하여 궁중연악에서 열외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노래의 .모티브로 보아 달님에게 호소하고 애원하는 성적 질투의 노래라는 점, 그리고 내용상

 

전후의 자연스러운 맥락이 사실 들을 고려해 볼 때 그렇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에 연결되는 드디을세라의 드다도 성행위로 볼 수 있다. 현재 충남, 전북,

경북 일대의 방언에 가축들의 교미를 드린다라고 하고 있거니와 잠재의식의 측면에서 파악

할 때에도 역시 같은 결론을 추출해 낼 수 있다. 딛다라는 행위는 발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발

 

은 남자의 성을 상징하기 때문이I. 메닝거(Menninger)는 그의 저서 '인간의 마음(The Human

 

Mind)'에서 발의 상징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풀이하고 있다. 발이 갖는 속성과 기능으로 보아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등 남성의 성을 상징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 대목은 여성과의 성

 

적 결합이 이루어질까 두렵다는 뜻으로 파악된다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가는졈그ᄅᆞᆯ셰라

이 부분은 결사가 되는데. 그 풀이가 학자마다 구구하므로 먼저 각각 간추려 보기로 한다.

() 어디에다가 놓고 계서지라 내 가는 데에 저물을셰라

()어느(어떤)것 다(모두) 놓으시라(놓고 오시라) 내가(나의) 가는 곳에 저물을셰라.

() 어느 곳(娼女)에 놓고 계신가요 나의 가는 곳(금단지역)에 잠그올까 두렵네.

() 어느 것의 불안스러운 일=처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불안. 의구, 고뇌 등)이나 다

놓게 하소서. 내가 살아가는 곳에 어둠이 없게 하여 지이다.

() 어느 것(사람)에다 놓고 계시는가 나의 가는 곳에 어두워질까 두렵구나.

() 어디든지(그 밝은 빛을 비추어) 놓고 있거라. 내 가는 데(우리 앞길에)저물까 걱정이다. 이 부분도 다른 곳 못지않게 엇갈린 견해들을 보여 주고 있다. 대체로 보아 (-)

()서로 유사하며 그 밖의 (--) 각기 독특한 풀이를 하고 있다. 각 부분

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어느이다

 

이 말은 어느이, 어느+이다, 그리고 어느+로 형태를 분석할 수 있다. 어느이+다는 어늬+다 로서 어늬어느의 주격형으로 어느 것, 무엇등으로 해석되며 는 모두의 뜻으로 풀이된다. 다음에 어느+이다는 이다의 기가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임란전의 이른바 봉좌문고(蓬左文庫)의 표기로는 이다로 되어 있어 그렇게 보려는 것인바, 해석이 곤란해진다. 왜냐하면, ‘어느이로는 볼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럼 어느와 이다로 분리해야 하는 데 서술격 조사 -이다는 어느아래 통합될 수가 없다.

또한 의미상으로도 맥락이 닿지 않는다. 끝으로 어느+ +"의 분석인데가장 합리성을 갖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풀이는 구구하다.

어느어느. 무슨, 어떤의 뜻을 갖는 관형사이며 는 의존명사이고 는 부사다.

그런데. 문제는 의존명사 를 무엇으로 보느냐는 데에 달려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행상(行商)

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흔히 물건으로 보는가 하면 그가 있는 장소로 보기도 하며 심지어는

남편의 불안스러운 일로도 본다. 또 음사라는 데에 초점을 두어 화류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본사에서 보였던 절박한 자기학대의 감정이 이 결사에 와서는 방어기제로로 변형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질투의 대상인 어느 미지의 여인을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 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는 중층적인 모호성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낱

말을 볼 때 자명해진다.

 

노코시라

이것은 "놓다'의 어간에 원망형 종결어미 -고시라의 결합으로 분석된다. "를 사물로 보는

이는 도적의 침해가 두렵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데나 놓아 버리다 뜻으로 풀이하며 음사로

는 분은 어느 녀인에다 정을 주고(또는 농고) 있느냐고 풀이한다. 전자는 기원으로 보며 후자는 의구형으로 본다. 풀이는 자못 구구하다.

후자의 관점이 옳다고 믿지만 앞에서 나온 "비취오시라오시라 형태요,

용이라고 한다면 이것만 의구형이 될 까닭이 없어 결국 설득력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필자는방하(放下)의 뜻으로 보고자 한다, 여인이 핵심이 되지만 애타는 망부(望夫)의 감정은 짐짓 모든 것(사랑이나 재물 들을 모두)을 버리십시오라고 풀이할 수 있다.

 

내가논

 

+가는+ 형태를 분석해야 옳다. 학자에 따라서는 서경별곡의 가 시럼난듸 몰라서

 

으로 주격 -가를 인정, 내가 논듸로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정열모). ‘의 주격형 또

는 소유격형으로서 노래를 부르는 퍼스나인가 아니면 남편인가로 서로 엇갈린 해석을 보여주며 심지어는 천()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또 부사인 내내로 보기도 하는가 하면 고려조 한림별곡(翰林別曲)위 내가 논ᄂᆞᆷᄀᆞᆯ세라로 보아 당대에 유행하던 음사(淫醉) , 나의 가는 곳(남이 가서는 안 되는 곳) 말하자면 남편의 성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필자는내가 가는 곳에로 보고자 하며 는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은 가는이라는 말 때문에 남편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남편이 타고 한다면 아내(퍼스나)가 있

는 집쪽으로 와야 하지, 간다고 하면 말이 되느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있을 쪽을 향하

여 한 발짝 두 발작 걸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는 것인데 만약 이것이 합리적 해석이라고 한다면 뒤에 붙은 구절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따라서 는 당신 곧 남편으로 보는 게 옳다. 아내가 남편 앞에서 남편을 가리킬 때 라고 부르는 경우가 지금도 시골의 노년층에서 발견t된다. 남편이 본디 떠돌이 장사꾼이라서 며칠씩 또는 몇 달씩 집에 없기 때문에 지금쯤 어디에 씌여 다니는지쯤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점그ᄅᆞᆯ셰라

 

"점글다 의 어간에 의구형종결어미 -세라의 결합이라고 형태분석할 수 있다. ‘점굴다는 저물다(日沒)잠그다(, )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앞에 것으로 의 해석은 불합리하나 위에 것의 해석으로는합리적이다, 달이 중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떠오르는 단계에 있다 하더라도 저물다라는 말은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다, 해가 저물다는 말은 쓰여도 밤이 저물다. 달이 저물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후자 곧 잠기다로 보아 빠질까 두렵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남편이 싸다니는 곳에 여인이 있어 그 여인에게 빠질까 염려스럽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정읍가의 내용을 분석하여 보았거니와 그 구조를 간단히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기사 - 달님이시여

서사 - (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님 계신 곳까지) 멀리멀리(임이 무엇을 하는지환히 비추어 주사이다.

본사 - <달님 이시여)

(혹시나 이 근처에서 제일 번화한) 전주시장에 가 계신지요(어느 여인을 만나)진곳(여자

의 성)을 디딜까(성의 결합) 두렵습니다.

결사-(달님이시여)

여인이라거나 재물이라거나) 어느 것이나 모두 (애착을 갖지 말고) 버려 주사이다.

(이 달 밝은 밤) 당신이 다니는 곳에 (어느 여인이 있어 그 여인에게) 빠질까 두렵습니 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달에게 빌며 바라는. 남편을 그리는 정 곧 아낙의 질투에 찬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풀이해 보면 이렇다, 밝은 달이 뜨니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한결 강해진다«달은 여성의 성적 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장사하러 나가서 오래 동안 돌아 오지 않는 남편이 불현듯 그리워지고 또 무엇을 하느라고 그렇게 소식이 없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女人은 사립문 밖에 나가 떠오르는 뜨는 것은 종교적 승화의 세계를, 횡적으로 멀리 멀리 비추는 것은 여인의 간절한 그리움을 표상한다. 노피곰과 머리공이이곰)을 공통 운소로 하여 조응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달밤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님만은 내려다보고 계시겠지. 달님이시여행상이야 이곳저곳 두루 다

니겠지만. 짐작컨대 이(정읍) 근처에서 제일 사람이 많이 모여 드는 전주장에 가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객주집 어디에서 노닥거리고 있것이다, 그 어느 미지의 여인

과 노닥거리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전주시장에 많이 널려있을 화류항에 가서 그것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인의 착잡한 심사를 엿볼 수 있다. 없이 그

짓을 한다고 믿지만 -라라 하여 추측의 미래시제에 의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와 드욜셰라 의 상징 곧 구체적인 성의 간접적 표현이라는 자리바꿈(displacement)과 함

께 극한적인 경지로서 자기보호를 하게 되는 방어 메카니즘(defence mechanism)이라 수 있다. 극한적인 질투에서 절망의 절정에 이른 여인은 달님에게 다시 빈다, 여자고 뭐고 모두 다 내버려 달라고. 그러나 거센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이 다니는 곳에 어느 여인이 있어 빠져들까를 염려한 나머지 이에 대한 방어 기제가 작용하게 된다.

 

3장 정읍가의 형식

 

고대시가의 형식을 고찰하는 데에 있어서 음악적인 면을 지나치면 안 된다. 노래로 연행되

었기 때문이다. 정읍가도 물론 노래로 불렸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원래는 민요로서 당시 세

간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달 노래로서 불리던 것이 고려조와 조선조에 들어와 궁중악

이 되면서 틀에 잡힌 음악적 형식를 갖추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흔히 이 노래는, 전강(前腔), 후강(後腔). 과편(過片)의 셋으로 나눈다. 이것은 가사의 양이

 

각각 균형을 이루는 데에서 말미암은 듯하다. 그리고 전강에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있으

 

며 과편에도 같은 소엽이 붙는데 후강에만 없기 때문에, 기록을 그냥 믿는 이들은 후강으로 완전히 끝난다는 후강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판각할 때 잊고서 빠트렸으므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전자의 관점을 취하는 사람의 견해를 들어 보기로 한다.

 

4장 결론

 

신라나 고구려 못지않게 찬란한 문화를 백제가 가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외 래의 문물을 섭렵한다든가 일본에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백제의 운명은 패전의 운명에 휘말려 모두가 물거품이 되었으며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들조차도 신라로 기울어진바, 고려의 사가들의 편견에 매몰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이름만 전하는 무등산가, 지리산가. 선운산가*, 방등산가, 산유화가 그리고 변형된 채로 가사가 전해 오는 산유화가와 함께 정읍가가 문헌에 전해 옴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정읍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 적쟎은 연구물이 족출하였다. 고대문학

작품의 해석이 거의 그런 것처럼 이것도 여러 갈래로 엇갈린 견해들을 보여 주고 있다.

 

필자는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종합하고 정읍가와 관련한 소전 문헌과 제작시기 및 작자와 내용, 그리고 형식적인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앞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전 문헌에 관하여

주지하다시피 정읍가의 명칭과 전하는 최초의 문헌은 조선조 초기 여러 사관에 의하여

지어진 고려사(高麗史)이며 가사가 살린 문헌은 조선 성종조 성현(成俔)에 의하여 만들어진 악학궤범(樂學軌範)이다. 그밖에 여러 문헌들에도 정읍(井邑)이란 명칭이 보이는데.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것은 믿기 어렵다. 동일한 노래로 파악해야지 정읍가군으로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정읍의 노래가 장중하여 상호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의문이 남게 된다.

둘째, 제작시기 및 작자

제작 시기는 어느 때라고 다잡아 이야기하기 어렵다. 백제멸망 후 세 왕조의 부침을 거쳐 800여년이 지난 태에 비로소 문자로 정착하였기 때문에 백제 가요로서의 원형이 고스란히 전승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문헌의 기록을 무시하고 고려조나 조선조의 노래로 보는 학자가 많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비백제계의 노래라고 하는 견해들을 요약하면, 고려조의 노래라는 것, 조선조의 노래라는 , 신라 유리왕의 도솔가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으로 삼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백제의 가요로서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확실히 신라의 향가와 비교하여 볼 때, 달을 향한 토속 신앙과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감정이 교묘한 민요적 표현 속에 숨어 있어 가위 고형을 꽤 많이 지니고 있는 노래라 추단할 수 있다의미만 전하는 다른 백제가요와 비교할 때 동질성을 찾을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것이 달노래로서 불리운 시기는 틀림없이 백제보다 더 소급하여 삼 한까지 을라간다고 믿는다. 이 노래를 지어 부른 여인의 남편이 행상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하였는데, 기복에 의하건대 벌써 삼한시대에 지게가 쓰였고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작자를 행상인의 라고 하지만 믿기 어렵다. 가부장적 권위사회에서 아내는 집에만 있어야 하고 남편만 밖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을 때인데 어느 여인이나 보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세계인 때문이다. 그리고 행상이라는 것으로 보나 정착한 농본사회에서 일정한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고 천민으로서 떠돌아다니던 유이민의 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노래가 아니라 탄압 받던 한 계층의 민요라는 근거가 된다

셋째, 정읍가의 형식

고대가요는 모두가 노래하는 문학이었다. 음악과의 관련을 무시하면 안 된다따라서 자수율 얽힌다면 넌센스가 될 수 있다. 이 노래의 음악형식은 거의 전강(前腔). 후강(後腔) 과편과 전강, 후강 대엽(大葉, 過篇 金善調)으로 각각 삼분한다는 점에서 위의 두 종류는 사실상 같은 내용을 가진다. 다만. 후강으로 보 다 끝났다는 후강이냐 아니면 있어야 할 소엽(小葉)이 빠뜨려진 것이냐, 하는 문제가 엇갈려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전강과 후강으로 양분하고 전자에도 소엽이. 후자에 또한 과편과 금선조, 소엽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국문학의 형태 진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적 위치를 차지

한다. 첫째민요의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 둘째. 향가체에서 형성되었다는 것. 셋째,

가체에서 형성되었다는 것. 넷째, 고려 속요형식의 남상이라는 것다섯째, 시조의 형식이 이

노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등의 견해가 그 점을 잘 드러내 준다.

소박한 민요가 고려조에 와서 음악적으로 정제되었기 때문에 원형을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 없어서 백제 시대 가요형식의 패턴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감탄사와 후렴구를 떼어 내고 유의어만 나열하는 형식인 1 3음보를 취하고 있으며 36구의

평시조 형식과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으로 정읍가의 몇 가지 면을 고찰하였거니와 진솔

한 감정의 상징적인 표현과 외형률이 주는 유포니 그리고 형식 등높이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노래라고 하겠다.

넷째, 정읍가의 내용

 

단적으로 말하여 달에게 빌며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낙의 질투에 찬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은 달이다달은 여인의 성적 욕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부(望夫)라는 유교적인 부녀자의 미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여인의 본능적인 성적 충동에 초점을 맞추어 풀이해야 된다. 이 노래는 내용의 해독 상 져재, , 욜셰라 등등 문제가 많다, 그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노래의 처음 달하는 매우 충격적인 기사(起詞). (ㅏ ㅏ)의 개모음에 달을 향한 호격의 돈호법(頓呼法)은 벅찬 정서를 축하고 있다. 이런 기사는 뒤에 오는 모든 구절의 앞에 붙는다. 서사는 노피노피 돋으셔서 멀리멀리 비추어 주사이다의 기원으로 되어 있는바, 수직적인 승화와 수평적인 그리움. 질투가 (이곰)의 해조음과 더불어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둘째의 본사는 혹시나 근방에서 가장 번화한 전주시장에 가계신가요, 어느 여인과 수작을 할까 두렵습니다는 의구(疑懼)의 절정을 치닫고 있다. 말하자면. 여인이 갖는 투기의 극한적인 경지다. 이러한 절박한 감정은 결사에 와서 어느 여자건 돈이건 모두 다 버리십시오. 혹시 당신이 가시는 곳에 어느 여인이 또 있어 그곳에 빠질까 염려스럽습니다는 기원과 의구심을 아울러 드려내 준다. 외형뿐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도 서로 교묘한 대응을 이루고 있어 견고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상으로 정읍가(井邑歌)의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보았다. 진솔한 정성의 솔직한 표현과 외형률이 주는 유포니, 그리고 형식 등등, 높이 그 가치를 기릴 만한 노래하는 문학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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