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봉창 의사 의거일(8)
우리 나라가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때에, 이 봉창 의사가 일본 도교에서 일황 히로히또에게 폭탄을 던져서, 의거를 한 것이 1932년 1월 8일이다. 이 봉창 의사는 자기의 몸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국가 민족을 위하여 싸운 훌륭한 의사이다.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승리도 이끈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압박이 가일층심 하던 당시, 기회를 엿보아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져 수라장을 만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고, 일황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여 침략을 그칠 줄 모르는 일본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이 봉창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이 진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열 살에 겨우 용산 문창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을 다닌 후에,19살 때에 용산 정거장에 운전 견습생으로 들어갔었다. 당시 용산역의 간부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어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 대우가 심할 뿐더러, 때로는 천대가 심하여 의사는 나라 잃은 겨레의 비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의 압박에서 탈피 하루 속히 조국 독립을 해야겠다는 굳센 결심과 신념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기로 하였다. 그것은 일황 히로히또를 죽여 복수를 하고 조국 광복의 길을 열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23세 때 분연히 직장을 버리고 일본 오사까로 건너갔다.
의사의 가슴속에는 복수, 혁명, 조국이 해방이란 불길이 항시 깊이 타고 있었으며, 도쿄, 오사까 등지를 방황하기 7년, 그 동안 어느 친구 소개로 왜놈의 사위가 되라는 말도 있었으나 이를 단연 거절, 때로는 기한에서 시달리고, 때로는 노동해가면서 오직 적정을 탐지하는 데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이러는 동안에 의사는 왜놈의 말과 동작에 능란해져 '기노 시다 쇼오소오'라고 변명을 하여서, 왜인들도 그가 한국인인 줄을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복수의 기회가 성숙해짐을 깨닫고 단독으로 거사하여 하였으나, 여기서 다시 생각한 바 있어 평소 그리던 상하이 - 우리 임시 정부가 있고, 독립 운동자가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1931년 1월 상하이에 도착하였으나, 모든 것이 낯설어서 누구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더욱이 언어와 태도에 왜놈 냄새가 풍기니, 한 때는 우리 동포에게 왜놈의 밀정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웅은 영웅이 아는지라 김 구씨에게 발견되어 비로소 그 본색이 알리어졌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김 구씨는 그의 비범함을 간파하고, 드디어 거리낌없이 흉금을 털어 놓게 까지 되었다. 이리하여 상해에 도착한지 근1년 만인 그해12월 중순에 정식으로 한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본 천황을 죽일 것을 정숙히 선서하고, 수일 후 의거의 장도를 올랐다.
도쿄에서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1932년 1월 8일 일황의 행렬이 사꾸라다 뭉 앞을 지날 때, 가지고 있던 폭탄을 일황을 향해 던졌으나, 아깝게도 명중되지가 않았다, 수많은 군중들이 아우성을 치고 수라장이 되었을 때, 이 봉창 의사는 가졌던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고,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참 성명과 원적을 똑바로 선포하고 한인 애국단의 한 사람으로서 왜제를 폭팔 하려고 했음을 설명하였다.
그 뒤 왜놈의 법정에 나가서는 함구불언이고, 심문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다음과 같이 준엄한 말로 이것을 거절하였다.
"글쎄 나는 너희들의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인데. 너희놈 들이 어찌 나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거냐?"
이런 까닭으로 9개월이 지나도록 한번도 예심을 못하고, 결국은 저희끼리 어물어물 공판이란 것을 하여, 드디어, 1932년 1월 10일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 때 의사의 나이 33세의 청춘이었다. 1946년에 의사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다가 효창 공원에 모셨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의사의 애국 충성은 후일에 해방을 초래케 하였으며, 그 정신은 길이 빛났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 정신은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같은 애국 애족의 정신과 기백을 본받아, 하루 속히 남불 통일의 성업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선열에 대한 보답의 길이요,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임을 알아야 한다. 선열의 얼을 가슴 깊이 되새겨, 민족 중흥의 사명을 가지고, 과감히 전진하는 자세를 굳게 가져야 하겠다.
우리 나라가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때에, 이 봉창 의사가 일본 도교에서 일황 히로히또에게 폭탄을 던져서, 의거를 한 것이 1932년 1월 8일이다. 이 봉창 의사는 자기의 몸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국가 민족을 위하여 싸운 훌륭한 의사이다.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승리도 이끈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압박이 가일층심 하던 당시, 기회를 엿보아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져 수라장을 만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고, 일황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여 침략을 그칠 줄 모르는 일본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이 봉창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이 진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열 살에 겨우 용산 문창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을 다닌 후에,19살 때에 용산 정거장에 운전 견습생으로 들어갔었다. 당시 용산역의 간부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어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 대우가 심할 뿐더러, 때로는 천대가 심하여 의사는 나라 잃은 겨레의 비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의 압박에서 탈피 하루 속히 조국 독립을 해야겠다는 굳센 결심과 신념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기로 하였다. 그것은 일황 히로히또를 죽여 복수를 하고 조국 광복의 길을 열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23세 때 분연히 직장을 버리고 일본 오사까로 건너갔다.
의사의 가슴속에는 복수, 혁명, 조국이 해방이란 불길이 항시 깊이 타고 있었으며, 도쿄, 오사까 등지를 방황하기 7년, 그 동안 어느 친구 소개로 왜놈의 사위가 되라는 말도 있었으나 이를 단연 거절, 때로는 기한에서 시달리고, 때로는 노동해가면서 오직 적정을 탐지하는 데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이러는 동안에 의사는 왜놈의 말과 동작에 능란해져 '기노 시다 쇼오소오'라고 변명을 하여서, 왜인들도 그가 한국인인 줄을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복수의 기회가 성숙해짐을 깨닫고 단독으로 거사하여 하였으나, 여기서 다시 생각한 바 있어 평소 그리던 상하이 - 우리 임시 정부가 있고, 독립 운동자가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1931년 1월 상하이에 도착하였으나, 모든 것이 낯설어서 누구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더욱이 언어와 태도에 왜놈 냄새가 풍기니, 한 때는 우리 동포에게 왜놈의 밀정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웅은 영웅이 아는지라 김 구씨에게 발견되어 비로소 그 본색이 알리어졌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김 구씨는 그의 비범함을 간파하고, 드디어 거리낌없이 흉금을 털어 놓게 까지 되었다. 이리하여 상해에 도착한지 근1년 만인 그해12월 중순에 정식으로 한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본 천황을 죽일 것을 정숙히 선서하고, 수일 후 의거의 장도를 올랐다.
도쿄에서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1932년 1월 8일 일황의 행렬이 사꾸라다 뭉 앞을 지날 때, 가지고 있던 폭탄을 일황을 향해 던졌으나, 아깝게도 명중되지가 않았다, 수많은 군중들이 아우성을 치고 수라장이 되었을 때, 이 봉창 의사는 가졌던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고,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참 성명과 원적을 똑바로 선포하고 한인 애국단의 한 사람으로서 왜제를 폭팔 하려고 했음을 설명하였다.
그 뒤 왜놈의 법정에 나가서는 함구불언이고, 심문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다음과 같이 준엄한 말로 이것을 거절하였다.
"글쎄 나는 너희들의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인데. 너희놈 들이 어찌 나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거냐?"
이런 까닭으로 9개월이 지나도록 한번도 예심을 못하고, 결국은 저희끼리 어물어물 공판이란 것을 하여, 드디어, 1932년 1월 10일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 때 의사의 나이 33세의 청춘이었다. 1946년에 의사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다가 효창 공원에 모셨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의사의 애국 충성은 후일에 해방을 초래케 하였으며, 그 정신은 길이 빛났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 정신은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같은 애국 애족의 정신과 기백을 본받아, 하루 속히 남불 통일의 성업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선열에 대한 보답의 길이요,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임을 알아야 한다. 선열의 얼을 가슴 깊이 되새겨, 민족 중흥의 사명을 가지고, 과감히 전진하는 자세를 굳게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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