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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1

우리 동네 이야기 93

작성자뭉개구름|작성시간26.06.12|조회수22 목록 댓글 0

■ 삼청동, 산도 물도 사람도 맑은 곳

삼청동이라는 지명은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을 모시는 신전인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했다.
조선 후기 도교적 관념이 약해지면서 산도, 물도, 사람의 인심도 맑은 동네라는 의미에서 삼청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삼청전의 위치는 삼청공원 서쪽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 학자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한양의 으뜸 명소로 삼청동을 꼽았다.
삼청동은 경복궁에서 가까우면서도 숲이 울창하고 골이 깊었다.
지금도 삼청동은 면적의 절반 이상이 북악산이다.

북악산(백악산)에는 삼청동천(三淸洞川)이라는 이름의 계곡이 있었다.
지금의 삼청동길은 물길을 복개한 것으로, 삼청동길 아래에는 여전히 중학천이 흐른다.
중학천은 동십자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뒤쪽 지하, 교보문고 옆, 광화문우체국 옆을 지나 청계천에 합류한다.
삼청공원 북쪽 계곡과 복정우물 등에서 물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나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려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북쪽을 향해 걷는다.
동십자각, 국립민속박물관, 삼청동파출소를 지나면 총리공관이 나온다.
총리공관은 조선시대 태화궁이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1970년 삼청동에 흡수되기 전까지 이 일대 이름은 태화동이었다.
공관 안에는 900년 묵은 등나무, 300년 묵은 높이 11m의 측백나무가 있다.
등나무는 높이 16m, 둘레 1.8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총리공관을 등지고 맞은편을 바라본다.
바위에는 ‘三淸洞門’(삼청동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지금은 건물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
축대를 쌓는 과정에서 콘크리트가 흘러내려 글씨가 일부 훼손됐다고 한다.

총리공관에서 작은 길을 건너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삼청동 남쪽 끝 경계선이 화동과 만나는 부근에 높게 솟은 코리아사우나의 굴뚝이 보인다.
높은 건물이 없는 북촌에서 랜드마크와도 같은 건축물이다.
1948년 문을 연 코리아사우나는 현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는데, 굴뚝은 그대로 남아 있다.

코리아사우나 바로 아래에는 복정우물이 있다.
원래는 궁중의 우물이었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짓고 자물쇠로 문을 잠갔다.
우물을 지키는 군인들도 있었다.
다만 정월대보름에 이 물로 밥을 지으면 내내 복이 있다고 해서 이날은 백성들도 물을 길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 묻혀 있던 우물은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큰길로 나와 금융연수원을 향해 올라간다.
금융연수원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단골로 자리 잡아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마다 정치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무기와 관련된 정부기관이 있었다.
병기 제조 기관인 군기시의 화약 창고인 북창이 있었고, 병기의 근대화에 힘을 기울였던 구한말에는 기기국의 번사창이 들어섰다.
번사(飜沙)는 터지면 천하가 진동하고 대낮처럼 밝아지는 포탄 제조법으로, 번사창은 이를 생산하던 화약 공장이었다.
금융연수원 뒤편에는 고종 21년(1884)에 지은 번사청 건물이 여태껏 남아 있다.

금융연수원 입구 근처에서는 ‘지청천 장군 집터’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지청천은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투사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됐다.

길을 건넌다.
삼청공원 쪽 북촌로와 길이 갈라지는 곳에 표지판이 있다.
정조의 사돈이자 순조의 장인로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장동 김씨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 옥호정(玉壺亭 삼청동 133-1)이 있던 곳이라는 표식이다.
옥호는 ‘옥으로 만든 작은 병’으로, 신선의 세계를 의미한다.
김조순은 병자호란 때 삼학사로 알려진 김상헌을 필두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수항, 김창집의 직계 후손이다.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병조판서, 훈련대장을 지내며 조정의 실권과 군사권을 장악했고, 막강한 권력은 아들 김유근에게 대물림됐다.
옥호정 역시 김유근에게 상속됐다.
옥호정은 《옥호정도》라는 채색화가 남아 있어 전체 모습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사대부 원림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마치 드론을 띄워 놓고 보는 듯하다.

왼편으로 길을 접어든다.
주택가에 들어선 사찰 칠보사를 만날 수 있다.
칠보사는 조계종단 원로인 석주 스님이 머물렀던 사찰로, 1960년대 창건됐다.
석주 큰스님은 불경의 한글화를 주창했고, 칠보사의 현판과 주련은 모두 한글로 돼 있다.

더 위로 올라가는 길에 성제정(星祭井)이라는 우물을 만난다.
‘별에 제사를 지내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안내판은 이 우물의 물이 조선 후기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 전기 국가 차원의 제사를 관장하는 소격서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물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소격서는 고려시대에는 개경에 있다가 조선의 한양 천도와 더불어 성제정 인근(현재 삼청파출소 부근)으로 옮겨 왔다.

우물에서 30m 오르막길을 오르면 가수 전인권의 집이 나온다.
집 대문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祈天石 康日菴 徐月堂 咸豊三年癸丑仲春書(기천석 강일암 서월당 함풍삼년계축중춘서)’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름 그대로 ‘하늘에 기원하는 돌 제단’이다.
철종 3년(1852) 당시 정권 실세였던 김좌근, 김재근 등 장동 김씨들이 대대손손 권력을 누리기를 하늘에 빌며 새긴 글이라고 전해진다.

전인권의 집은 가장 높은 곳이자 막다른 곳에 위치해 있다.
올라올 때와는 반대편 길로 내려간다.
백악산에서 흘러나오는 삼청동천의 물길이 시작되는 주택가와 맞닥뜨리는데, 물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집들이 수상가옥처럼 들어서 있다.
물가에는 미나리가 수북하다.
좁은 골목길을 호젓하게 걷는다.
물소리가 은은하게 퍼진다.

삼청공원으로 간다.
물이 맑고(水淸), 숲이 맑으며(山淸), 사람의 마음까지도 맑은(人淸) 삼청(三淸)의 가장 깊숙한 곳이다.
삼청공원은 1934년 조성됐다.
삼청공원 밑으로 삼청터널이 뚫리면서 종로구 삼청동과 성북구 성북동이 이어졌다.
삼청공원을 둘러보고 공원 앞 종로마을버스 11번 종점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속세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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