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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한 해에 총재 얼굴이 3명이나 됐을 정도?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3.23|조회수27 목록 댓글 0
 
1998년은 한 해에 총재 얼굴이 3명이나 됐을 정도로 총재의 퇴임과 선임을 놓고 진통을 겪어야 했다.

1996년 7월 3일 제9대 총재로 취임하고 이듬해 3월 총회에서 재선돼 2000년 3월까지 임기를 연장했던 홍재형 총재는 1998년 5월 6일 당시 종금사 인허가문제로 의혹을 사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사의를 표명했다. 이에 앞서 3월에는 박종환 총장이 일부 구단주의 압력에 의해 잔여임기의 연봉에다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은 후 사임했다.

홍재형의 사임에 따라 실무형 총재를 영입해야 한다는 야구계의 여망이 컸으나 '낙하산식 총재인선'의 관행은 여전했다. 여당이 된 국민회의의 정대철(鄭大哲) 부총재가 5월 27일 제12대 KBO 총재로 선임돼 2000년 3월까지 잔여임기를 맡게 됐다. 이보다 2주일 앞선 5월 13일 총재선출에 관한 구단주총회가 열렸으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일부 언론이 정대철 선임에 대해 보도하자 KBO는 '낙하산식 인사'라는 인상을 지우기 위해 총재선임을 유보하기도 했다.

정대철 총재는 이상국 전 해태 타이거스 단장을 사무총장으로 추천했으나 야구계가 반발, 박종환의 후임을 선임하지 못하고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상국은 총재특별보좌관으로 임명돼 주변을 관망하고 있는 사이 정대철 총재는 9월 2일 경성그룹특혜대출 비리와 관련, 6천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지검 특수1부로부터 2일 하오 구속영장이 신청돼 수감됐다.

KBO 현역총재가 임기 도중 구속되기는 이번이 두번째였다. 5년 전 5대 총재였던 이상훈이 율곡비리사건으로 임기중 구속되자 사의를 표명, 임시구단주총회에서 오명 6대 총재를 선임했었다.

정대철은 구속상태인 9월 14일 총재직을 사임했고 하루 뒤인 15일 구단주들은 롯데호텔에서 간담회 형식으로 모임을 가졌다가 급히 구단주총회로 명칭을 바꾸고 박용오(朴容旿) OB 베어스 구단주를 제12대 총재로 선임했다. 그리고 10월 10일에는 LG구단의 추천에 따라 MBC 제작국 부국장을 지낸 최영언(崔永彦)을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KBO는 9월 16일 감독관청인 문화관광부에 총재 승인을 신청하면서 "총회의 임원(주로 구단주)만이 총재가 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정관개정안까지 함께 제출했으나 반려됐고 10월 9일에는 "총회의 임원도 총재가 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문구를 수정해서 제출했으나 문화관광부는 정관을 고쳐야만 할 특수한 사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또다시 관계서류를 KBO에 돌려보냈다.

그러자 일부 언론에서는 문광부의 총재승인 거부가 집권층에서 또다시 '낙하산식 인사'를 내려보내기 위한 조치가 아니냐고 비난하며 박용오의 총재직을 옹호했다. 그러나 총재를 선출한 9월 15일의 임시총회가 정관상의 총재선출의 요식행위를 전혀 갖추지 못한 데다가 "총재는 중립적인 인사여야 한다"는 피선자격에도 문제가 있었으므로 박용오가 합법적인 총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정관개정작업을 벌인 뒤 새로운 정관에 따라 다시 총재로 선출되는 모양갖추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문화관광부 신낙균 장관은 11월 26일 구단주들과 면담, 총재대행마저 중립적인 인사가 아니면 안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OB 베어스 구단주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박용오는 27일 총재직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박용오가 정식총재로 취임하기 위한 일련의 수순을 따른 것이었다.

신낙균 장관은 구단주직을 내놓으면 '중립적인 인사'로 간주하겠다는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박용오는 OB 구단주 자리를 친동생 박용성(朴容晟)에게 넘겨주고 비로소 '중립적인 인사'라는 모양새를 갖춰 11월 30일 임시구단주총회에서 다시 총재로 선출될 수 있었다. 박용오 총재는 12월 7일 문화관광부의 총재 승인을 받아 8일 제13대 총재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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