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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멸망

작성자짠밥|작성시간04.07.07|조회수42 목록 댓글 0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는 내부의 문제점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였고, 당나라는

고구려 침입에 실패한 후 다시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들어갔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 하류로 침입하였지요.

백제 계백장군의 결사대는 신라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그들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마침내,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동생과 아들들이

서로 권력을 잡으려고 싸우게 됨에 따라 국력이 약화되자, 나.당 연합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지요. 그래서 마침내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습니다. (668년)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독재정치,

지배 계급의 분열,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생활 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함으로써 나라가 쇠퇴하고 있었지요.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옛 영토에서 나라를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주류성(서천), 임존성(예산)을 주요 거점으로 하여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왕자 풍을 받들고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켜, 200여성을 회복하고

당군과 신라군을 여러차례 격파하는 등 처음에는 성공하였으나, 지도층의 내분으로

힘이 약해짐에 따라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은 왕족 안승을 받들고 부흥 운동을 일으켜,

한때 평앙성을 탈환하였고, 당나라를 견제하려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부흥운동은

기세를 떨쳤으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7세기 말에 발해가 건국됨에

따라 고구려의 전통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지요.

 

 

신라의 통일

신라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후 비로소 삼국 통일을 완수했습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옛땅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였고, 다시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 도독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지요.

 

신라가 백제 지역에 있던 당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당과의 전쟁은 고구려 지역으로 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당도 신라의 공격에 맞서 침략군을 계속 투입하였기 때문에 치열한 싸움이

여러 곳에서 벌어졌지요.

 

신라는 매소성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크게 격파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고, 이어서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도 당의 수군을 무찔러 당의 세력을 완전히 쫓아내었지요.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지 8년이 지나서야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676년)

 

삼국 통일의 의의는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통일을 이루었다는

자주성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된 기반위에서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국의 힘을 빌렸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 지역만의 통일이었다는 점에 한계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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