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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프랑스)

작성자김의천|작성시간07.05.12|조회수230 목록 댓글 0

1988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성당과 4개의 교회, 로앙 팔레 등 기념물들이 중세도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지의 중심에 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출처 블로그 > danbyul님의 블로그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신랑과 성가대석 사이에 있는 벽과 궁륭의 배치를 보면 고딕 양식의 구조를 가진 성당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대성당 문에 보이는 돋을새김과 점점이 박혀 있는 조각이 방문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강렬하게 전해 준다

 

13세기에 지은 생토마 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부르주아지 거주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단연 돋보인다

 

천문 시계

 

높이가 3m나 되는 커다란 천문 시계이다. 기계 장치는 1838~1842년에 수리했지만, 장치가 들어 있는 상자는 16세기에 만든 것이다. 정오가 되면 12명의 사도가 1줄로 늘어서서 그리스도를 향해 절을 하고, 그리스도는 손을 들어 축복을 내린다. 그 뒤 금속 수탉이 날개를 퍼덕이며 3번 시각을 알린다. 매시 정각에는 낫을 든 죽음의 신이 나타나며, 인간의 일생을 나타내는 아이, 소년, 어른, 노인 넷이 15분마다 시각을 알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출처- http://www.cathedrale-strasbourg.asso.fr/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 (로마네스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성당)

 

1771년에 독일의 대표적인 시인인 괴테가 처음으로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을 보고는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압도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응장한 규모를 지닌 성당의 전체적인 인상이 내 혼을 진정시켰고, 조화롭게 통합된 많은 세부의 모양을 나는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식별해서 설명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했다.” 예전에는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1176년에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남쪽 익랑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문이 두 짝 남아 있는데, 이것이 개축 전에 있던 대성당의 흔적이다. 이 대성당에 있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상징적으로 의인화한 여성상 2점(복제품, 원작은 노트르담 박물관 소장)은 샤르트르에서 활동하던 어떤 성당 건축가가 1220~1230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천사의 기둥’과 함께 성모 마리아의 대관과 죽음을 나타낸 팀파눔은 당시 조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은 안길이가 103m, 너비가 41m, 신랑의 높이가 32m이며, 가는 기둥들이 닫집을 받쳐 준다. 12~14세기에 만든 훌륭한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로 빛이 들어와 삼랑식 신랑을 가득 채운다. 트레이서리도 아름답지만, ‘클레메르가세(상인의 거리)’를 마주보고 있는 파사드의 원형 장미창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 색채의 묘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섬세한 세공을 새긴 이 예술 작품은 지름이 13m나 된다. 이것은 슈타인바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남쪽 익랑 문을 통해 대성당으로 들어가면 ‘천사의 기둥’이라고 하는 ‘최후의 심판 기둥’이 있다. 이것 또한 앞서 말한 이름 없는 성당 건축가의 작품이다. 이 예술가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사람들을 3층으로 나누어 표현했다. 아래쪽에는 복음서 기자를 등장시켰고, 가운데에서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다. 위쪽에서는 그리스도와 천사들이 가시관, 십자가, 창 등 고난과 구원의 상징을 몸에 달고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조감도

 

높이가 66m나 되는 대성당 테라스에 서면, 누구라도 현기증이 날 것이다. 1839년에 빅토르 위고가 ‘계단 모양의 박공과 채광창이 잔뜩 달린 지붕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라고 여기서 본 광경을 그리고 있듯이, 테라스에서는 옛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성당 북쪽에는 기원전 12년에 개척한 이르젠토라툼이라는 고대 로마의 식민지 성채 터가 확연히 드러난다. 돔 길과 알바르드 길이 만나는 곳에는 3세기에 요새화한 도시의 중심부가 있다. 스트라스부르라는 이름은 프랑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성은 6세기에 이미 중요한 통상로가 교차하는 곳에 있었고, 그래서 스트라타부르굼(도로의 거리)이라고 불렀다. 건물의 음울한 집합’이라고 평가한 빅토르 위고의 말을 믿다 보면, 자칫 19세기에 그랑일이 타락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나무 골조로 지은 건물을 모두 깨끗하게 단장해서 음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특히 유명한 것이 1589년에 대성당 근처에 세운 카메르젤 저택이다. 4층 건물인 이 저택에서는 프레스코화와 나무 조각이 볼 만한데, 그 가운데에서도 황도 12궁을 나타낸 조각이 특히 유명하다.


프티프랑스와 생토마 성당

관광 명소인 나무 골조 가옥 사이를 일 강이 흐르고 있고, 그 수로를 따라 관광용 잔교가 늘어서 있다. 프티프랑스라 일컫는 이 구역은 한때 풍기문란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최고의 매력 포인트이다. 피혁 공장의 심한 악취와 거리의 매춘부도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에는 매독을 치료하는 전문 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질병을 들여온 사람은 프랑스인이라고 한다. 이 지역을 프티프랑스라 일컫는 것도 이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이 성병을 치료할려면 많은 수은이 필요했는데, 수은은 피혁업자가 업무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이런 병원이 들어섰을 것이다. 피혁 직공들이 사는 구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노트르담 대성당만큼이나 중요한 고딕 양식의 생토마 성당이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과 더불어 이 도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 성당이다. 지금도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는 이 성당에서 1521년부터 설교를 한 알자스의 마르탱 뷔세로는 그보다 3년 전인 1518년부터 마르틴 루터를 열렬히 옹호했다. 대성당에서 가톨릭식 미사를 올린 것은 1559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태양왕 루이 14세가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한 1681년 이후 이 도시에 가톨릭이 부활했다. 태양왕은 생토마 성당의 전통을 인정해 시의 모든 기관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한테 번갈아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톨릭을 믿는 사람은 겨우 2가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연주한 오르간

생토마 성당의 오르간은 1740년에 요한 안드레아스 질버만이 만든 것이다. 질버만은 스트라스부르 출신으로서, 악기 제작으로 유명한 작센 왕가의 사람이었다. 모차르트는 1778년에 이 오르간을 사용해 콘서트를 열었는데, 관객이 그다지 모이지 않은 것은 불만이었지만, 이 오르간에 대해서는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1906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이 악기로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는 것은 정말 한없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유명한 의사이자 신학자인 슈바이처는 생토마 성당의 보조 신부와 교육 간부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이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다. 루이 15세 시대에는 생토마 성당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일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이었다. 그래서 국왕은 가장 유능한 장군 모리스 드 삭스의 유해를 1777년에 이 교회로 옮겼다. ‘삭스 원수’는 비록 1750년에 샹보르 성에서 죽었지만,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기 때문이다. 교구 사제와 지역 주민들의 뜻과는 반대로 교회의 내진에는 장 바티스트 피갈이 만든 웅장한 영묘가 있다. 이 곳에는 여성이 곡을 하면서 원수를 만류하고, 원수는 막무가내로 죽음을 상징하는 열린 관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원수의 뒤쪽에는 프랑스 국기가 펄럭이고 있고, 바닥에는 오스트리아의 독수리, 영국의 표범, 프랑스의 사자가 재기불능 상태로 축 늘어져 있다.


대주교가 들여온 파리 분위기

스트라스부르에서 가톨릭 신앙이 부활하면서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귀족들이 속속 이주해 왔다. 특히 부르고뉴의 로앙 집안은 1704~1789년에 스트라스부르 주교를 4명이나 배출했고, 사교계를 주도했다. 심지어 대주교인 가스통 아르망 막시밀리앵 드 로앙 수비즈는 1732~1742년에 대성당 곁에 로앙 저택을 지을 정도였다. 파리의 궁정 건축가 로베르 드 코트는 태양왕의 서자라고 일컫는 아르망을 위해 전형적인 파리식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에는 훌륭한 주교 도서관 외에 나폴레옹이 스트라스부르에 머물 때 쓰려고 준비한 침실도 있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계 옹기장이 아농의 스트라스부르 공장에서 만든 바로크 양식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오리나 거위처럼 생긴 수프 접시, 올리브와 엉겅퀴를 놀라울 만큼 사실적으로 새겨 넣은 접시 등의 견본을 저택에 전시해 놓았다. 지금의 스트라스부르는 희한하게도 라인란트의 전형적인 전원풍 이미지와 파리의 분위기를 합쳐 놓은 모습이다. 이것은 건축가들이 스트라스부르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모두 로앙 성을 보고 지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로앙 성의 영향은 컸고, 로앙 가문의 권력 또한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로앙 가문의 마지막 대주교 루이 르네 에두아르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단두대를 피해 도망해야만 했다. 그는 라인 강을 통해 안전한 바덴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에텐하임에서 죽고 말았다. 혁명가들은 대성당을 ‘이성의 전당’으로 바꾸어 놓았고, 많은 성인의 그림과 조각을 파괴했다. 다행히도 탑만은 화를 면했는데, 누군가가 궁리한 끝에 얇은 금속판을 모자 모양으로 만들어 씌워 탑의 모습을 숨겼기 때문이다. 혁명은 주교의 본거지를 하나의 지방 도시일 뿐이라고 얕보았는데, 나중에 행정상의 거점이 되어 중요성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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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성화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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