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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뎅 (Auguste Rodin ,1840-1917 )의 조각작품세계[3]

작성자김의천|작성시간09.05.19|조회수330 목록 댓글 0

Auguste Rodin
(1840-1917)

 

 

 

 

 
Jean de Fiennes, Draped
(Figure from The Burghers of Calais)
1885-86
Bronze
82 x 48 x 38 in (208.3 x 121.9 x 96.5 cm)
 
 
 
 
 
로댕은 장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된 프티트 에콜Petite Ecole에서 드로잉을 배운다. 여기서 그는 그와 동년배이며 친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조각가로 활약했던 쥘 달루(Jules Dalou, 1838-1902)와 만나게 된다. 그는 세 번이나 국립조형미술학교Ecole des Beaux-Arts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자연사박물관에서 평소에 존경하던 낭만주의 조각가 바리 (Antoine Louis Barye, 1796-1875)에게 해부학 드로잉을 배운다. 로댕은 장식미술가로서의 재능이 알려지면서, 19세기 중반 카르포 (Jean Baptiste Carpeaux, 1827-75)만큼은 아니지만 그와 코르디에와 함께 트리오를 이루어 전성기를 만끽했던 카리에 벨뢰즈 (Albert-Ernest Carrier-Belleuse, 1824-87)의 작업실에서 여러 조수들 중 하나로 고용되어 장식미술품 주문작들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된다.
 
 
 
 
 
 
Jean de Fiennes, Draped
(Figure from The Burghers of Calais)
1885-86
Bronze
82 x 48 x 38 in (208.3 x 121.9 x 96.5 cm)
 
 
 
1863년과 64년 사이 겨울, 로댕은 이웃집 막노동일을 하던 ‘비비’라는 이름의 남자를 모델로 <코가 부러진 사나이>란 두상을 제작했는데 이는 그의 최초의 주요작품이었다. 원래의 테라코타는 사고로 인해 두상의 뒷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파손된 두상에서 독립된 표현적 가치를 직감한 로댕은 이를 버리거나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의 상태로 살롱에 출품했으나 거절당한다. 이 작품은 이후 각각의 특수한 프로젝트의 요구들을 수용하기 위해 수백 개가 넘는 다양한 크기와 매재의 인체부분들을 종류별로 모아놓는 로댕의 형태들의 레퍼토리 출발점이다. 아울러 이 작품은 그의 혁신적인 통찰력, 즉 조각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되거나 완전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에게 그것이 자라는 과정, 다시 말해 예술가의 손에 의해 ‘죽은’물질이 살아나는 기적을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Danaid
1885-89
Bronze
12 3/4 x 28 1/4 x 22 1/2 in.
(32.4 x 71.8 x 57.2 cm)
 
 
 
 
 
1871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로댕은 잠시 군복무에 임한 뒤 새로운 일을 찾아 벨기에에 정착한다. 거기서 그는 조각가 반 라스부르(Van Rasbourg)와 동업으로 갖가지 건축프로젝트를 위한 장식조각일을 맡게 된다. 6년 동안 벨기에에 머물며 그는 파리로 돌아오기에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 악몽과 같은 보불전쟁의 기념으로, 또 이탈리아 여행에서 미켈란젤로와 고전작품에 대해 받은 감동의 결과로 로댕은 <패배자>라는 명칭의 왼손에 창을 든 등신대 크기의 누드 전사를 제작하였다. 남성 누드인물의 선택은 19세기 후반까지 정부가 후원하고 운영하는 작가 지망생들의 아카데미 교육 과정의 기초인 것을 생각할 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창조물은 고대 그리스 조각 이래로 가장 신성시되어왔던 이상주의 관습들을 깨는 것이었다.
 
 
 
 
 
 
Danaid
1885-89
Bronze
12 3/4 x 28 1/4 x 22 1/2 in.
(32.4 x 71.8 x 57.2 cm)
 
 
 
 
 
우선 그는 벨기에 태생의 오귀스트 네이 (Auguste Neyt)라는 살아 있는 모델로 하여금 포즈를 잡게 했는데, 이것은 가능한 한 사실자연에 근사치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소재에 관해서는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패배의 주제를 잡아 미켈란젤로의 노예상들을 영감의 출처로 삼았다. 이 노예상들은 교황 율리우스 2세 묘소의 벽감을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이들 중 두 개를 루브르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었다. <패배자>의 머리 위로 들어올린 오른팔 제스처와 얼굴표정에서 루브르소장인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Dying Slave)>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한편 한껏 힘이 주어진 창을 든 왼팔의 포즈나 콘트라포스토의 고전개념은 기원전 5세기의 폴리클라이토스의 유명한 <창을 든 이(Doryphorus)>를 연상케 한다. 1877년 파리 살롱에 이 작품을 보내기 직전 그는 창을 제거하고 황금시대의 행복과 대조되는 ‘슬픔의 시대’를 지칭하는 <청동시대>라는 상징적인 새 이름을 부여했다.
 
 
 
 
 
 
 
 
Danaid (Back)
1885-89
Bronze
12 3/4 x 28 1/4 x 22 1/2 in.
(32.4 x 71.8 x 57.2 cm)
 
 
 
 
이 <청동시대>는 로댕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작품으로, 이를 통해 그는 대중의 관심과 찬사를 안게 되었다. 인물의 생생한 해부학적 사실주의는 동상을 살아 있는 인물로 주조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이 비판은 오히려 일반대중들에게 로댕이 중요한 작가라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후 로댕은 1878년에 제작한 두번째의 장대한 남성 누드 석고상을 살롱에 출품했는데, 이 <설교 하는 세례 요한>은 <청동시대>와 많은 점에서 대비된다. <청동시대>가 정적이고 수동적이며 정확한 의미가 없는 반면, <세례 요한>은 액션과 운동감으로 넘쳐 있고 분명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세례 요한>의 다리와 팔, 두상을 절단해 또 다른 독립적인 작품으로 번안한 <토르소>는 로댕예술의 자율성과 생성의 미학을 상징하는‘자족적인 신체의 단편들’의 긴 연작들의 효시다. 매우 거칠면서도 다이나믹한 카오스적 생성과정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 <토르소>는, 조각가의 손에 의해 무기력한 물질이 생명을 획득하는 과정을 표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코가 부러진 사나이>와 짝을 이룬다
 
 
 
 
 
The Kiss
1886
Marble
87 x 51 x 55 cm
Musee Rodin, Paris
 
 
 
 
 
1880년 로댕의 전생애에 걸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해 그는 정부로부터 새로 지어질 장식미술관 입구의 청동문을 조각으로 장식할 것을 의뢰받는다. 이것이 후에 <지옥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이 된다. 로댕은 즉각 작업에 들어갔고 1884년 중반 거의 완성단계에 돌입, 이 문들의 청동주조경비의 예산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후 4년 동안 로댕은 모형을 수정하고 계속 요소들을 첨가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주문의뢰는 로댕으로 하여금 <지옥의 문> 청동주조 계획을 지연시키게 했고, 1900년 석고 <문>을 최초로 일반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전 해인 1899년에 다시 작업을 하게 된다. 알마광장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 때에 지어진 파빌리온에서 첫 개인전을 갖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정된 장식미술관의 위치가 루브르로 바뀌면서 더 이상 청동으로 주조할 이유가 없게 되자 로댕은 완전히 <지옥의 문>에서 손을 떼게 된다.
 
 
 
 
 
 
 
The Kiss
1886
Marble
87 x 51 x 55 cm
Musee Rodin, Paris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댕이 커미션을 받았을 때 그는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을 주제로 생각했으며, 그가 이탈리아 여행 때 본 르네상스청동문인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1432)을 시각적인 영감의 출처로 생각했다. 작업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로댕은 직사각형 패널들의 연속으로 구성된 기베르티식의 구도를 버리고 미켈란젤로의 후기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상기시키는 구성으로 변형시켰다. 그리하여 성난 파도를 연상시키는 ‘지옥’의 바다에서 발버둥치며 추락하며, 혹은 서로 부둥켜안는가 하면, 고통 속에 쓰러져가는 수많은 인체들의 격동적인 흐름으로 두 개의 움푹한 패널을 통일하고 있다. 패널보다 한층 더 깊이 파인 팀파눔은 중세의 그것과 유사하게 거의 호러 바쿠이적 구성으로 갖가지 제스처와 포즈의 인물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부조 배경에서 거의 튀어나올 듯한 좌상의 인물은 단테를 상징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Thought (Camille Claudel)
1886-89
Marble
29 inches high
 
 
 
 
이 단테 상은 처음에는 문 앞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구상했으나, 곧 팀파눔의 중앙으로 올라앉게 된다. 인물들의 수를 늘이기 위해 로댕은 다양한 스케일과 높낮이의 부조로 장식된 건축 프레임을 패널 양옆에 새로 배치한 다음 두 개의 거대한 동상들을 문 양쪽에 세우도록 계획했는데, 이 동상이 <아담>과 <이브>이다. 엘센이 지적했듯이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 벽화 중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창조>에서의 아담과, 피렌체 <피에타>에서의 죽은 예수의 이미지를 합성시킨 듯한 <아담>의 형상은 문 꼭대기에 배치될 <세 망령>에서 다시 반복--사실상 <세 망령>은 <아담>의 이미지를 시점만 바꾸어 재제작된 것이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댕은 미켈란젤로의 제스처가 담고 있는 의미를 간파했고, 그의 마음속에는 아담이 <지옥의 문>의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 같다. 이 단일한 인물은 생과 죽음의 제스처를 동시에 표현할 뿐 아니라, 그의 고통으로 뒤틀린 토르소는 처음과 끝 사이에 놓인 세속적인 실존의 고통을 극화하고 있다. 로댕의 친구였으며 상당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평론가 귀스타브 제프루아가 1889년 <지옥의 문>의 주제를 가리켜 아담과 이브의 끊임없는 고통의 재연이라고 해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Thought (Camille Claudel)
1886-89
Marble
29 inches high
 
 
 
 
 
<지옥의 문>으로 대표되는 로댕은 미술사를 통틀어 볼 때 미켈란젤로 다음으로 인체의 모든 표현적인 잠재력을 발굴해 보였던 조각가였다. 전체의 부조는 초월적인 상상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나, 끊임없이 유출되며 엉키며 연결되고 있는 작은 인물들은 그들을 일단 개별적으로 경험하려는 관객들에게 어려움을 던져 주고 있다. 이들은 5미터 이상 높이 솟아 있는 전체구조 속에 갇혀 광선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명암속에서 드라마틱한 액센트를 산출하며 용해되고 있다. 로댕은 그가 지각하고 있었던 인간조건의 비극을 <지옥의 문> 을 통해 극화하고 있으며, 그에게 이 작품은 속세의 삶의 소우주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의 개념에 맞는 완벽한 표현을 찾으려는 위대한 연극연출가처럼 그는 계속해서 그의 석고인물들의 군상을 다시 바꾸고 재변형하고 또 다시 조합했다.
 
 
 
 
 
 
 
Paolo and Francesca
c. 1887-89
Bronze
11 3/4 x 25 x 12 in (29.8 x 63.5 x 30.5 cm)
 
 
 
따라서 단테의 시에 나오는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은, 시의 비극적인 테마를 환기시키는 매우 개인적이고 기이한 환상들과 모티브로 대체된다. 사실 지옥편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 중 로댕은 우골리노백작과 리미니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에피소드만 골라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로댕의 의도는 관습을 따르지 않은 극히 현대적인 사고의 결과였고, 그는 카톨릭교회에서 제공하고 있는 보안과 구조가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된, 그래서 의미와 질서가 결여된 속계와 동일한 조각품을 추구했다. 남녀노소, 순진성과 악은 모두가 그의 지옥 속에서 꼭같은 복수와 완강함으로 처벌받고 있다. <지옥의 문>의 압도하는 듯한 격렬한 운동감은 인간존재의 정신적인 고통과 그칠줄 모르는 육욕, 탐욕과 그 결과로 인한 절망의 유출과 같은 전혀 새로운 시각적인 서사시인 것이다. 
 

 
 
 
 
 
 
Paolo and Francesca
c. 1887-89
Bronze
11 3/4 x 25 x 12 in (29.8 x 63.5 x 30.5 cm)
 
 
 
인간조건에 대한 보편적인 진술을 구축하려는 로댕의 욕구에서 우리는 세기말 상징주의 작가들의 공통된 노력을 유추해낼 수 있다. 특히 뭉크의 <인생의 프리즈>, 클림트의 프레스코 연작은 물론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같은 대형 캔버스는 모두가 지식과 행복을 목마르게 추구하도록 영원히 저주받은 인간계의 비참한 곤궁을 요약하고 있다. 이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염세주의, 즉 쇼펜하우어의 철학, 모든 예술장르의 혼합 (Gesamtkunstwerk)과 공감각의 미학 (synaesthesia or ‘correspondances’)은 표제음악의 창시자인 바그너와 다른 한편으로는 보들레르와 연관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지옥의 문>의 문학적 출처가 단테보다는 보들레르와 더 가깝다는 해석은 그러한 의미에서 개연성이 짙다.
 
 
 
 
 
 
La Douleur
c. 1889-92
Bronze
12 x 6 1/2 x 5 1/2 in (30.5 x 16.5 x 14 cm)
 
 
 
 
 
 
세망령 혹은 <아담>, <입맞춤>과 함께 하나의 독립된 상으로 더 잘 알려진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여타 독립상들과 마찬가지로 <지옥의 문>과 분리하여 생각하기는 어렵다. 사실 상당수의 건축드로잉들과 모형들로 미루어 짐작할 때, 또 주제를 생각할 때나 구성면에서 볼때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의 중심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이미지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생각하는 사람>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의 심판자로서의 예수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사실 로댕의 생각에 잠긴 자세의 모티브는 상당수 르네상스 조각가의 조각작품과 회화, 가령 산 로렌조에 있는 로렌조와 줄리아노 메디치 형제의 묘소조각이라든가 또는 시스티나성당 천정화의 예언자 예레미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미켈란젤로 자신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되는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에서의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미지 또한 <생각하는 사람>과 적어도 시각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근사치는 로댕이 평소 존경하던 카르포의 유명한 그룹조각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1867-61)에서 배고픔의 고통으로 손가락을 씹고 있는 우골리노의 이미지다. 오히려 좌상이며 팔자세, 그리고 단테와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둘은 가까우나 공통점은 그 정도 뿐이다. 오히려 <생각하는 사람>의 연원은 로댕 자신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로댕이 벨기에에서 파리로 귀향하기 직전에 제작한 것으로 짐작되는 <우골리노>상은 머리와 팔다리의 일부분이 없는 토르소 습작이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와 그 이후의 조각가, 화가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쳤던 헬레니스틱시대의 고전작인 아폴로니오스(Apollonios)의 일명 <발베데레 토르소>의 포즈를 본딴 것이나 <생각하는 사람>의 기초인 것만은 틀림없다. 사실 로댕이 <지옥의 문>의 팀파눔 중앙에 한때는 <우골리노>의 이미지를 놓을 생각을 했던 사실을 미루어봐도 둘의 연관성은 개연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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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Douleur
c. 1889-92
Bronze
12 x 6 1/2 x 5 1/2 in (30.5 x 16.5 x 14 cm)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로댕의 디자인 개념의 중심을 차지한 것에 틀림없으나,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조각가는 한참 후에야 말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이야기가 있다. 한참 전에 나는 <지옥의 문>의 개념을 생각했다. 문 앞에, 바위에 앉아 단테는 그의 시를 계획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우골리노, 프란체스카, 파올로 그리고 신곡의 모든 인물들이 있었으나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두에서 떨어져서 긴 코트를 걸친 마르고 금욕적인 단테는 의미가 없었다. 나의 첫번째 인상에 따라 나는 또 다른 생각하는 사람을 고안했다. 벌거벗고 바위에 앉아 발은 밑에 모으고 주먹은 입가에 대고 그는 꿈을 꾼다. 풍부한 구상이 점차 그의 머리속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하며 이제 더이상 그는 몽상가가 아니라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단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당시 로댕의 친구들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옥타브 미르보 (Octave Mirbeau)는 1885년 『프랑스』에 기고한 <지옥의 문>에 대한 글에서, “문 꼭대기에 약간 휘어진 천정의 패널 안에 단테가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그는 지옥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부조들로 덮인 배경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엘센이 제공하고 있는데, 단테의 지옥편의 심판관 미노스로서 그는 뱀의 꼬리가 몸을 몇 번 감는가에 따라 지옥에 새로 도착하는 영혼들이 어느 ‘장’에 배정될 것인가를 정하는 모습이 로댕과 동시대 사람들은 이 연관성을 읽지 못했으나 조각가는 흥분한 군중 속에서 몸을 곧추세우고 앉아있는 심판 중의 미노스를 그린 바 있다. 따라서 엘센이 지적했듯이 로댕이 <생각하는 사람>을 군중들 앞, 팀파눔 안에 배치했을 때 그러한 유추를 전혀 생각치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펠리시앙 샹소르는 미르보보다 1년후 『피가로』지 부록에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 오귀스트 로댕"이란 타이틀의 글을 발표했다. 그는 미르보의 분석을 대부분 받아들여 “저부조 위에 두드러지고 있는 (인물이) 지옥에 막 도착하여 생각에 잠겨 있는 단테 알레고리이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팔굽은 한 다리에, 한 손은 턱을 받치고 있는 그의 영감어린 응시는 (고통과 절망에) 이를 부득 갈고 있는가 하면 (관능의) 입맞춤과 포옹들이 혼재해 있는 심연의 저변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라고 적고 있다.
 
 
 
 
Iris, Messenger of the Gods
1890
Bronze
37 1/2 x 34 1/4 x 15 3/4 in.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1887년 수집가 갈리마르는 로댕에게 보들레르의 시집인 『악의 꽃』의 삽화를 의뢰한다. 로댕은 27개의 드로잉을 제작했고 이중 상당수의 드로잉들이 <지옥의 문>을 위한 조각이미지들로부터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 중 여러 개가 텍스트와 수반되며 로댕은 때때로 시의 한두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각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보석만 빼고는 홀딱 벗은 꿈속의 요녀에 의해 유혹당하고 있는 시인에 관한 <보석>이라는 산문시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쓰이고 있다. ‘나의 영혼의 안식을 괴롭히기 위해 고요히 홀로 수정바위에 앉아 있는 영혼을 교란키 위해’라는 구절이 아마도 로댕으로 하여금 모든 유혹과 방심으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있기를 갈구하고 있는 시인의 영혼의 구현체로서 <생각하는 사람>을 이미지로 택하게 했을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지옥의 문>에서 앉아 있는 <생각하는 사람>의 등 뒤에 빙빙 돌고 있는 관능적인 누드 여인군상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처음 코펜하겐에서 독립된 상으로 선보였던 1888년에 로댕이 타이틀을 <시인>이라고 붙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은 아니다. 아울러 생각하는 사람(Penseur)과 시인/현인(Mage)을 보편적인 신비를 추구하는 동격의 인격으로 생각했던 빅토르 위고와 시인을 신비의 세계를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철학자, 견자(Voyant)로 간주했던 보들레르를 떠올릴 때 해석은 더욱 타당성을 지닌다.
 
 
 
 
 
Heroic Bust of Victor Hugo
1890-97
Bronze
27 3/4 x 18 3/4 x 18 3/4 in (70.5 x 47.6 x 47.6 cm)
 
 
 
 
 
로댕의‘시인’이란 말의 선택은 <지옥의 문>이 두 시인, 즉 단테와 보들레르에게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시인’은 장르와 매체, 혹은 시대를 초월해 창조에 임하는 모든 예술가를 뜻한다. 조각 이미지의 동물적인 원시성, 즉 크고 강한 손과 발을 지닌 무거운 근육질의 신체라든가 좁은 이마, 수풀같이 두텁고 튀어나온 눈썹 밑에 동공이 배제된 눈 등을 감안한다면, 이 이미지가 자신을 고고한 인물이 아니라 조각가·석공·노동자로서 간주했던 로댕의 자화상과 멀지 않다. 사실 <지옥의 문>의 오른쪽 하단부에 로댕은 그의 자화상에 기초한 <조각가와 그의 여신>을 삽입하고 있는데 근육질적인 신체라든가 포즈가 <생각하는 사람>의 나이들은 번안이다. 이렇게 <지옥의 문>과 관련된 내용을 고려할 때 <생각하는 사람>은 엘센이 지적했듯이 시인=노동자로서 로댕의 정신적인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
 
 
 
 
 
Heroic Bust of Victor Hugo
1890-97
Bronze
27 3/4 x 18 3/4 x 18 3/4 in (70.5 x 47.6 x 47.6 cm)
 
 
 
로댕의 비서였고 동시대 논평가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체코 태생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1903년 발표한 시적이고 통찰력있는 해석을 들어보자.
... 그(<생각하는 사람>)는 생각에 빠져 무겁게 침묵하며 앉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해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의 모든 신체는 머리가 되고 그의 혈관의 피들은 전부 뇌수가 되어, 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위에 프레임의 정상에 세 명의 남성 인물들이 깊은 곳을 내려다보듯이 모두가 머리를 밑을 향해 굽히고 서 있다. 각각은 한 손을 뻗쳐 그들을 아래로 끌어내릴 것 같은 심연을 향해 가리키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이 무게를 그 자신 속에 감당해야만 한다
 
 
 
 
 
 
 
Nude Study of Balzac
c. 1892
Bronze
50 1/4 x 21 1/2 x 23 in (127.6 x 54.6 x 58.4 cm)
 
 
 
 
 
제3 공화국 동안 프랑스는 멀고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들, 혹은 중요한 인물들을 소재로 공공기념물 제작에 열을 올렸다. 대체로 주제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1871년 프러시아와 전쟁에서 참패한 프랑스는 패전으로 인해 저하된 도덕성을 회복시키고 시민정신과 애국심을 고양시킬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작은 도시까지도 시민들의 결속을 함양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화려한 업적을 남긴 동향인들을 기리는 기념물들을 앞다투어 세웠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로댕의 <깔레의 시민>이었다.
 
 
 
 
 
 
 
Nude Study of Balzac
c. 1892
Bronze
50 1/4 x 21 1/2 x 23 in (127.6 x 54.6 x 58.4 cm)
 
 
 
 
 
1884년 가을 프랑스 서북쪽, 영국과의 경계선에 위치한 깔레시의 시민의회는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영웅인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울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전국적인 기부신청을 내자는 결의안에 동의했다. 장 프루아싸르 (Jean Froissart)의 14세기 편년사에 의하면 100년전쟁때 영국의 에드워드 3세의 포위 속의 기아에서 생 피에르의 발의가 깔레시민들을 구했다고 한다. 부연하자면 에드워드 3세는 깔레의 성벽들로 통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여 항거하는 도시에게 굴복할 것을 요구했다. 도시의 가장 유력한 시민들 중의 여섯 명은 깔레시와 시민들을 구하는 조건으로 바지와 셔츠를 벗고 밧줄로 모두 묶여 도시의 열쇠와 함께 자신들을 영국왕에게 양도할 예정이었다. 도시의 최고의 갑부였던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자원했고 그의 용단은 다른 다섯 명을 고취시키는 데 충분했다. 이들은 앙드리위 당드르(Andrieu d’Andres), 장 드 피엔느(Jean de Fiennes), 장 데르(Jean d’Aire)와 자크와 피에르 드 비쌍(Jacques & Pierre de Wiessant) 형제였다. 에피소드는 해피엔딩이었다. 당시 임신하고 있었던 에드워드 3세의 아내 필리바왕비는 사형판결이 태어날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전설이 두려워 이 용감한 시민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간원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기념비 건축의 제안은 국가적이며 동시에 지역적,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호전적인 침략자인 이웃나라에 고고한 프랑스인의 조건부 항복은 깔레의 포위뿐아니라 당대의 프러시아 전쟁과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Balzac
1898
Bronze
9'2" high
 
 
 
 
로댕은 이 중요한 커미션을 따기 위해 6명의 등신대 크기의 인물들로 구성된 기념비를 단일한 인물의 그것과 같은 가격으로 제공하겠다는 기발한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은 당시 깔레시에 통합된 신산업도시인 생 피에르시--유복하고 보수적인 상인층으로 구성된 깔레와 비교해 가난하고 급진적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이 신도시는 기념비 제작에 불만이었다--의 과격성을 진정시키는 온건한 예산책정과 부합하였다. 1885년 1월 시의회는 로댕이 제출한 모형에 입각해 기념비를 제작하는 데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일단 커미션을 따낸 로댕은 곧장 인물습작에 착수, 여러 모델들을 고용한 후 상당수의 누드와 착의상과 신체연구에 몰입한다. 같은해 8월 조각가는 계약에 제시된 대로 등신대의 3분의 1 크기의 인물들로 구성된 두번째 모형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첫번째의 비교적 관습적인 구성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높은 대좌를 없애고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여섯 명의 인물군상을 관객의 시점으로 내려놓은 것이었다.
 
 
 
 
 
 
 
Balzac
1898
Bronze
9'2" high
 
 
 
 
이러한 배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조각을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심리적으로 그 공간에 통합된 부분으로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후에 로댕은 “나는 나의 동상들이 깔레시청 앞 광장의 보도 위에 놓여 마치 고통과 희생의 살아 있는 ‘염주’가 되기를 바랬다.”라고 말했다. 이 새로운 개념은 의회와 대중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들이 원했던 표현은 ‘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진정한 순교자’였지 ‘ 대죄를 짓고 처형받기 직전의 처절한 슬픔과 고뇌, 그리고 절망에 찬’인물은 아니었다. 또 하나 로댕이 기념비에서 중요하게 의미를 둔 개념은 생 피에르를 선두로 한 인물들의 이어진 행렬이었다. 어쨌든 작업은 1889년 완성되었고 로댕은 완성작을 조르주 프티화랑에서 가진『모네-로댕』 2인전에 출품하였다.
 
 
 
 
 
Invocation
c. 1900
Bronze
22 x 10 1/4 x 9 1/2 in (55.9 x 26 x 24.1 cm)
 
 
 
 
로댕이 의도한 대로 20cm 가량의 낮은 직사각형의 좌대 위에서 가운데 생 피에르를 주축으로 선회하듯 행렬을 이루고 있는 여섯 명 중에서 가장 표현주의적인 인물은 피에르 드 비쌍이다. 그의 춤사위를 방불케 하는 과장된 손의 제스처와 뒤틀린 토르소와 포즈는 신체 속에 내재된 감정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한 즉, 표현주의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같이 밧줄로 동여매여져 있고 상체가 거의 드러나 보이는 자루옷을 입고 있다. 이 자루옷은 너무 무거워 깊게 주름을 드리우며 걸쳐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체의 윤곽선을 드러낼 정도로 투명하기도 하다. 비쌍의 손과 발은 다른 부분에 비해 과장되게 커 상대적으로 중요성을 간파할 수 있다.
 
 
 
 
 
 
 
Invocation
c. 1900
Bronze
22 x 10 1/4 x 9 1/2 in (55.9 x 26 x 24.1 cm)
 
 
 
땅에 견고하게 박혀 있는 그의 왼발은 떠나기를 원치않는 듯 주저하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 반면, 오른쪽 발은 그의 운명을 재촉하듯 보다 능동적으로 회전하고 있다. 양발의 상반된 감정상태를 반영하듯 엄청나게 큰 손들, 즉, 왼손은 머뭇거리며 왼발의 느낌을 반영하고 있는 한편 오른발을 따라 돌린 고개를 싸듯 들어올린 오른팔에서 파생되고 있는 좍 벌린 손가락들의 과장된 제스처는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남음이 있다. 그 밖에 앙드리외는 굴욕과 절망의 면전에서 과장되게 강한 손가락들로 그의 숙인 머리를 감싸안는 제스처로, 위스타슈는 그의 존엄성과 결단을 얼굴에서 잃지 않고 있으나 죽음 앞에서 그의 운명을 받아들이듯 눈을 아래로 깔고 굽힌 자세를 보이고 있다. 로댕은 <깔레의 시민>을 영웅적인 순교자로보다는 존엄성과 자제력을 지탱하려는 노력속에서도 절망과 공포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내적 감정의 진실을 드러내는 인물들로 극화하였다.
 
로뎅갤러리 도록에서...


모차르트(Mozart,Wolfgang Amadeus)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G장조 

3악장 Allegr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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