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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베소(아르테미스 신전터)

작성자김의천|작성시간09.05.30|조회수223 목록 댓글 0

아르테미스 신전터
 
 
로마 제국의 도미시아누스 황제(81-96년 재위)는 말년에 자신을 '주님이요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 자처하며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 묵시록 저자는 에페소 일대 아시아 속주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 신앙을 굳건히 지킬 것을 촉구했습니다. 성서에서 '일곱'이란 전부를 가르키는 충만한 숫자이기 때문에 묵시록의 일곱 교회는 세상 모든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페소 일대 아시아 지방은 사도 바오로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지만 1세기 말엽 요한계 문헌이 씌어질 당시 이 지역은 사도 요한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래서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거의 모든 성당들이 요한 성당으로 명명되었지만 바오로 성당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스미르나(현재의 이즈미르) 항구도시에서 남쪽으로 74km에 자리잡은 에페소(현재의 셀주크)는 바오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도시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 강으로 흙이 내려와 현재는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이며(요한 묵시록 1,11; 2,1), 사도 바오로가 제3차 전도여행 중인 53년경에 27개월 가까이 머문(사도 19,8. 10; 20,31 참조) 에페소는 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왕, 베르가모 왕국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129년 로마 제국 아시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고린토 교회를 창립한 다음,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를 데리고 고린토 동쪽 외항 겐크레아에서 배를 타고 에페소에 상륙하여 거기에 부부를 남겨두고 자신은 가이사리아와 예루살렘을 거쳐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습니다(사도 18,18-22). 그리고 53년경 제3차 전도여행(53-58년경)중 터키 중부 갈라디아 지방 교회와 그 남쪽 프리기아 지방 교회(데르베, 리스트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둘러보고 나서 에페소로 가서 27개월을 머물며 활발히 전도한 도시입니다. 또 에페소에서 여러 편의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인정받을 정도였기에 에페소 은장이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상 모형을 만들어 순례객들에게 팔아 커다란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활발한 전도로 수입이 줄자 은장이 대표 데메드리오가 동료 은장이들과 시민들은 선동해 난동을 피웠고(사도 19,21-40), 바오로는 에페소 로마군 병영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오로의 주된 전교 지역이었지만, 1세기 말경 요한계 문헌들이 집필될 때에 에페소를 비롯한 아시아 교회들은 대부분 요한의 영향하에 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고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5-27) 하며 성모님을 모시도록 하셨는데,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이라는 전설과 또 요한이 성모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옮겨와 처음에는 에페소 시내 성모 성당터에 사시다가 나중에 에페소 앞산 남서쪽 능선 아래 성모 마리아의 집에 사셨다는 전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에페소에서 선종해 에페소 뒷산 너머 아야솔루크 요새 남쪽에 묻혔다는 전설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묻혔다는 무덤 위에 4세기에 목조 성당이 지어졌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527-565년) 돌과 붉은 벽돌로 거대한 대성당을 세웠습니다. 십자형 성당 한복판 네 개의 대리석 기둥이 서 있는 곳이 사도 요한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성당에서 내려본 아르테미스 신전터 모습입니다. 신전을 허물어 에페소 사도 요한 성당과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해서 현재 신전은 전부 파괴되고 가운데 돌기둥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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