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와 아기예수
중세에는 성모 마리아 숭배가 매우 번성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위치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중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된 종교적 이미지는 성모자상입니다.
이러한 성모자 상은 특히 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위상을 강조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게 한 매개자였으며,
동정녀로서의 위상은 그녀에게 특별한 신성을 부여했습니다.
고대 세계의 모친 숭배 사상이 성모 마리아 숭배와 결합했으며,
성모 마리아는 교회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PIERO della FRANCESCA
Polyptych of the Misericordia (detail)
1460-62
이 그림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1445년에 고향인 보르고 산세폴크로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성당 평신도 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단면 제단화 가운데 패널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망토를 펼쳐 평신도회 회원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신도 중 일부는 실제 초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왼쪽에 두건을 쓴 사람은 성모 마리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에도 고행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는 많은 일반 교인들이 기도를 올리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LIPPI, Fra Filippo
Madonna in the Forest
c. 1460
풍경화와 경배화가 만났습니다. 호젓하고 서늘한 숲 속에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성모는 오랜 미술의 규범을 따라서 붉은 속옷과 푸른 겉옷을 입었죠.
누운 아기 예수에게 기도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프란체스코 교단 승려 요한네스 데 카울리와
스웨덴의 성녀 비르기타가 보았던 환상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알몸으로 뗏장에 누워 손가락을 빠는 아기 예수를 성부와 성령이 내려다봅니다.
이들은 뭇별의 시중을 받고 있습니다.
성부의 후광에 붉은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요,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죠.
성부는 두 팔을 가로로 펼쳐서 누운 아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루 축성을 베풀고 있습니다.
아기를 눕혀 두고 기도하는 마리아의 자세는 성탄 그림에서 예수 탄생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요셉 대신에 시토 교단을 일으킨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성모의 기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도 두 손을 모았죠. 낙타 털 옷을 걸친 어린이는 세례 요한입니다.
막대 십자가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들었습니다.
리피는 '어린양'을 'ANGNUS'라고 썼습니다.
상용어와 고전어를 섞어 쓰던 이 시대에 화가들은 가끔 철자를 혼동하는 일이 있었죠.
세례 요한은 리피가 활동했던 피렌체 시의 수호 성자이기도 합니다.
반 년 터울인 요한과 예수가 어린 시절에 만났던 적이 있을까요?
성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사 도메니코 카발카가 쓴 [요한의 생애] 가운데
이들의 만남에 관한 대목이 르네상스 화가들 사이에 널리 읽혔습니다.
이집트 피신길에서 귀향하던 성가족이 광야에서 살고 있던 아기 요한과 우연찮게 마주친다는 내용이죠.
아기 예수의 머리맡에 나무 그루터기가 놓여 있습니다.
나무 둥치에 박혀 있는 도끼 자루에는 '수사 필리푸스가 그렸다'는 화가의 서명이
금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글자 P는 'pinxit(paint 그리다)'를 줄인 말이죠.
MANTEGNA, Andrea
Madonna with Sleeping Child
1465-70
만테냐는 안료를 아교에 녹여서 칠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종횡으로 치밀하게 직조된 아마포의 결감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표정위로 떠올랐죠.
보는 이의 시선 거리가 반신상에서보다 더 가깝습니다.
아기의 쌔근대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네요.
이런 그림은 경배화보다 초상화의 형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아기는 잠들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 흰색의 싸개천은 주검을 감싸는 수의의 색깔이기도 합니다.
아기는 두 눈을 감고 입술을 반쯤 벌렸고, 아기의 잠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마리아의 오른손이 아기의 무거운 머리가 기울지 않도록 받쳐주고 있습니다.
'마리아 엘레우사'의 근대적 전형이죠.
어머니의 왼손은 부풀고 가라앉기를 되풀이하는 아기의 가슴에 놓여 있습니다.
잠든 아기를 지키는 마리아의 시선은 먼 곳을 응시합니다.
또는 아무 곳도 응시하지 않습니다.
시선을 잃은 마리아의 표정에는 기쁨과 고통, 안도와 불안의 이율배반적인 감성이 교차합니다.
겉옷 자락에 금빛 석류 문양이 새겨져 있네요. 짙은 어둠 위로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살풋 젖혀서 아기의 곱슬한 머리카락에 오른쪽 뺨을 대었습니다.
만테냐는 어린 성모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바람의 갈피를 붙들어서
섬세한 시적 서정으로 옮길 줄 알았습니다.
RAFFAELLO Sanzio
The Virgin and Child with Saint John the Baptist (La Belle Jardinière)
1507
프랑스어로 '라 벨라 쟈르디니에르'라 불리우는 이유는 꽃이 피고 있는 초원에
아름다운 성모가 앉은 모습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여인은 성모라 불리우기보다 청순하고 우아한 젊음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이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의 환희를 그 환경과 배경에 주고 있습니다.
풍경에 등장하는 세속 건축물과 자연풍경은 성모가 세속과 천국의 연결자, 즉 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스러운 공간에 성모를 배치함으로써 그녀의 신성은 무염시태,
즉 원죄없는 상태에서의 잉태로써 강조됩니다.
당대의 이탈리아 학자 바지리에 의하면 이 작품은 시에나 시의
귀족 필립 셀루가르디를 위하여 제작된 것이며,
그 후 프랑스의 왕 프랑소와 1세가 입수하였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성모의 연민이 모정에 얽힌 표정은 안보이며,
모자간의 은은한 정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융합되어진 걸작입니다.
RAFFAELLO Sanzio
Madonna of Belvedere (Madonna del Prato)
1506
라파엘로의 성모자 회화 작품 중에서 앞, 뒤 두 작품과 함께,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 소개되는 그림입니다.
시원한 초원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성모는 아기 예수와 아기 성요한이 서로 어울리고 있는 장면을
애정에 넘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일견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성모의 연민어린 모정이 은연히 이 장면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전원적인 자연 풍경은 멀리 마을이 있는 산천을 넓게 보이게 하고 있으며,
자연 공간성에 대한 라파엘로의 이해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정적이며 종교적 분위기를 온건한 색조로 조절하고 있으며,
인물의 동세, 묘사적인 선, 색채 등에서 강렬한 성격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성모의 동세는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에서 아기까지 연결되어 합류돼 있고,
독특한 음악적인 리듬을 낳고 있네요.
RAFFAELLO Sanzio
Madonna del Cardellino
1507
성 모자의 주제의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풍미를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제목은 어린 요한이 쥐고 있는 검은 방울새에서 비롯되었는데
가시나무의 가시를 먹는다고 하는 검은 방울새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사역을 예고라도 하듯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검은 방울새를 성모자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왕자와 같은 포즈의 아기 예수는 세례 요한과 대비되어
세속의 하인과 천상의 왕이라는 신분을 드러냅니다.
앉아 있는 성모가 화면의 중심이 되고,
그 앞의 두 아기는 성모와 함께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며 안정감을 주면서
그 좌우로 자연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을 같은 주제를 가진 '목장은 성모', '아름다운 여 정원사'와 비교해보면
크기가 가장 작고, 구도는 세 점이 모두 비슷하지만 명암의 대조가 가장 강하며,
명쾌한 색채보다는 통일된 색감을 주어 쓰고 있습니다.
친구의 결혼 선물로 그려 준 이 그림은 지진으로 인해 17조각으로 파손되어,
복원할 때 가필되었으나 라파엘로 필적의 정확한 모습이 잘 나타난 걸작 중 하나이죠.
PARMIGIANINO
Madonna dal Collo Lungo (Madonna with Long Neck)
1534-40
파르미지아니노의 성모는 자연 관찰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정신의 우미(우위, 의미)를 으뜸 가치로 삼는 신플라톤주의의 뼈대에 살을 붙였죠.
미학의 사상이 자연의 모방을 앞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품의 '타고난' 아름다움이 예술의 '가꾸는' 아름다움을 누른 것이죠.
마리아의 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를 버리고 있습니다.
'베누스 푸티카', 곧 순결한 아름다움이 자신의 체와 다르지 않다는 손짓입니다.
바닥에 겹쳐 둔 두 개의 발방석 위에 오른발을 올려 놓았죠.
길게 가로로 누운 아기 예수의 허리를 편안하게 받쳐 주려면 차라리 왼발을 올려놓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잠든 아기는 왼팔을 맥없이 늘어뜨렸으나 오른손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놓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머리를 아래로 비스듬히 숙여서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어깨 뒤로 늘어선 신전 기둥들은 다가올 예수 태형의 수난을 예고하죠.
인물 구성의 평온한 균형을 비틀면서 다섯 천사가 그림 왼편에서 몰려듭니다.
천사가 든 은제 항아리는 아기를 잉태한 모태의 견고한 상징일까요?
또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흥겹게 했던 기적의 포도주가 담겨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수수께기 같은 것은 배경 오른쪽에 서 있는 늙은 예언자입니다.
황량한 신전 앞마당에서 두루마리 예언서를 펼쳐 들고 머리를 돌려 외치고 있습니다.
동정녀 잉태를 예언했던 이사야의 모습일까요?
그와 마주 선 또 한사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발바닥에서 발목까지만 그려진 붓의 유령이죠.
DURER, Albrecht
Feast of the Rose Garlands
1506
뒤러는 로사리오 성모 마리아 사상을 신봉하는 베네치아의 독일인 평신도회를 위해 이 제단화를 그렸습니다.
도미니쿠스회에서는 로사리오(묵주)를 돌리면서 성모송을 암송하는 기도 방식을 강조했습니다.
조야한 독일식 목판화를 유화로 개작한 이 작품에는
베네치아 제단화의 형식과 화려한 색채가 사용되었습니다.
평신도회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리아는 오른쪽의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에게
장미 화환을 씌워주고 있으며,
아기 그리스도는 왼쪽에 있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역시 장미 화환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LEONARDO da Vinci
Madonna and Child with St Anne and the Young St John
1507-08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중에서 신비스러운 미소를 띈 초상화는 <모나리자>에만 국한된 작품은 아닙니다.
<성 안나와 성모자> 작품속의 미소도 그렇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여러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 중에 하나여서 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가 함께 그려진 작품은 거의 없죠.
성 안나에 대한 신앙은 성모 신앙에서 파생되어 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었다가 신의 선택을 받아 신의 아들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는 그때부터 예배의 대상이 되어지고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도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죠.
중세에 성모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표현되어져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로 표현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것에 중점을 둔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성모자상도 변화를 겪게 됩니다.
예배의 대상자 신의 어머니가 아닌 보통의 어머니와 아들로서 인간적인 측면이 강조되기에 이르렀죠.
그래서 르네상스 이후 성모상은 인간적 측면을 강조한 작품이 많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자> 작품도 인간적인 정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적 정신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린 양을 올라타고 있는 아기 예수의 행동은 십자가 위에 수난을 상징하는 의미이며
성모 마리아의 빨강과 파랑색의 옷은 애정과 진실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세 이후 교의상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비극적인 아기의 운명을 구하고자 성모 마리아는 손을 뻗어 아기를 안으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비극을 알고 있었기에 마리아의 미소는 슬픔에 가깝습니다.
<성 안나와 성모자> 작품은 가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지만 분명 교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RUBENS, Pieter Pauwel
Madonna in Floral Wreath
c. 1620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무릎 위에 세웠습니다.
그림 밖을 내다보는 아기는 루벤스의 둘째 아들 니콜라스의 용모를 빼 닮았죠.
니콜라스가 1618년에 태어났으니, 그림의 탄생 시기는 그 이듬해 이후로 잡는 것이 적절합니다.
성모는 홀아비 화가의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푸르망의 용모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것은 루벤스가 어린 아내 헬레나를 만나기 전, 아니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입니다.
그렇다면 화가는 미리 그려 둔 그림 속의 성모에게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투사하고,
그 후에 똑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을 자연으로부터 구하여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자연이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회화 예술을 모방하는 이상한 일이
플랑드르 바로크 화가의 붓에서 일어났습니다.
성모자를 그린 그림이 벽에 달려 있습니다.
그 위에 못을 치고 화환을 매다는 천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합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그림 속의 그림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검게 빛나는 액자틀이 그들의 존재 영역을 경계짓고 있죠.
열한명의 날개 달린 천사들이 화환을 들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꽃은 꽃 정물의 대가 브뤼겔의 솜씨죠.
백합과 장미가 마리아를 경배합니다.
백합은 성모의 순결과 탄생의 미스터리를, 장미는 사랑을 뜻하죠.
원래 사랑의 신 베누스의 꽃이었던 장미는 기독교적 사랑으로
의미가 개종되어서 흰색 장미는 순수한 사랑을, 붉은 색 장미는 열정적 사랑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미 줄기에 박힌 가시가 가시 면류관을 만들었던 엉겅퀴 가시와 닮았다는 이유에서
종교적 순교를 뜻하기도 합니다.
꽃잎 끝자락이 날카로운 카네이션은 십자가에 박힌 못을 닮아서 수난을 뜻합니다.
카네이션의 라틴명 디안투스는 '신의 꽃'이라는 뜻이죠.
원래 그리스어에서 나온 아름다운 꽃말에 기대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편, 밤에 피는 양귀비는 악의 꽃으로, 아침에 피는 나팔꽃은 선한 덕목의 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는 꽃들이 거의 예외없이 마리아와 예수의 상징 꽃이 되고,
넝쿨을 뻗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담장을 기는 딸기꽃, 제비꽃, 패모속 따위가 겸손의 미덕을 나타낸 것은
꽃잎이 때맞추어 피고지는 일처럼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애기똥풀처럼 눈병에 좋은 약꽃을 소경을 눈뜨게 하신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연관시키거나,
딸기꽃의 세 갈래 꽃받침의 형태를 두고 성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읽는 것도 네덜란드 꽃 정물의 특징입니다.
사철 피는 꽃들을 모은 것은 화가 브뤼겔의 재치입니다.
봄이 꽃을, 여름이 씨앗을, 가을이 열매를, 겨울이 구근을 통해서 표현되었던 정물 재현 전통이
성모자의 도상과 어울리면서 향기로운 종교적 의미가 덧붙었죠.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천국의 풍경,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예술의 재간,
조각가의 끌이 새기지 못할 붓의 솜씨로 그림속의 꽃다발을 해석해둔다면
우리는 브뤼겔의 입가에 5월 연꽃처럼 번지는 미소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자의 그림은 꽃다발로 말미암아 경배화가 되었습니다.
루벤스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림 속의 그림에 가두었습니다.
예수는 눈길을 들어서 그림 밖의 관찰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꽃다발을 장식하는 수많은 꽃들이 기필코 시들고야 말 운명이라면,
그림 밖의 보는 이라고 해서 운명의 빛깔이 다를 리 없죠.
그림 앞에 꽃을 바치는 자는 시드는 꽃과 시들지 않는 꽃이 던지는 냉엄한 유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림 속의 풍경과 그림 속의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신비롭게 현신한 아기 예수의 눈짓이
보는 이의 옷깃을 붙들어 그림 속에 펼쳐지는 비밀스런 시각의 향연으로 초대합니다.
저곳에서부터 이곳으로 나타난 그림,
곧 '이마고'의 형상이 천국을 훔친 화가 루벤스의 솜씨로 완성되었습니다.
LA TOUR, Georges de
프랑스의 화가 라뚜르는 촛불이나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그렸기 때문에
빛의 화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독특한 명암 대비와 단순한 기법으로 그림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으며
그는 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즐겨 그렸죠.
라뚜르는 아기의 탄생을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 촛불을 든 여인과 아기를 안은 어머니가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로 그려져 있습니다.
왼편의 여인이 들고 있는 촛불의 빛은 평온하게 잠자고 있는 갓 태어난 아기와
어머니에게 은은히 번져 나갑니다.
우수에 젖은 어머니의 표정과 수의 같은 흰 천으로 겹겹이 싸여 있는
아기의 모습은 장차 예수가 겪게 될 십자가상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빛은 볼 수 있지만 촛불은 볼 수 없습니다.
라 뚜르는 빛의 근원인 촛불을 드러나게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있어 참 빛은 아기 예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GIOTTO di Bondone
Madonna and Child
1297
FRANCESCO DI GIORGIO MARTINI
Madonna with Child and Two Saints
c. 1470
GRECO, El
The Holy Family
c. 1585
HOLBEIN, Hans the Younger
Darmstadt Madonna
1526 and after 1528
MEMLING, Hans
Madonna Enthroned with Child and Two Angels
149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