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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Rodin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작성자김의천|작성시간16.03.05|조회수724 목록 댓글 0


The Gates of Hell, The Kunsthaus Zürich, Zurich.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The Gates of Hell - Musee d'Orsay.

조각, 석고(sculpture (technique),platre,)

100 x 396 x 775 cm

1880년 ~ 1888년


1871년 프랑스 정부는 화재로 불 타 버린 감사원 건물 자리에

최고로 화려한 장식 미술 박물관을 건축하려 하고 있었다.

또한 이 박물관에 기념비적인 조각으로 이루어진 문을 설치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지옥의 문>이 탄생하게 된 정황이었다.


 

La Porte de l’Enfer (The Gates of Hell)

by Auguste Rodin situated at the Kunsthaus in Zürich (Switzerland)


<지옥의 문>은 로댕이 1880년부터 죽을 때(1917)까지 제작을 위해

기나긴 여정을 지나온 만큼 그의 가장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로댕은 20년을 <지옥의 문>과 씨름했지만 작업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는 창조의 순간에 느끼는 전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최종적일 수 없었다.



크기는 세로 635㎝, 가로 400㎝, 너비 85㎝이며, 청동으로 만든 조각이다.

로댕의 1880∼1917년 작품으로, 파리 로댕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 《발자크 기념비》와 더불어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끊임없이 다시 고치고, 여러 인물 사이에 또 다른 인물을 끼워 넣고,

그런 다음 그 인물을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고, 그러다 정 안 되면

그것들을 부수어 다음 실험을 위한 재료로 삼았다.

그러나 <지옥의 문>은 그가 담고자 했던 조각품을 모두 담아 낼 수 없었다.

그의 영감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변모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상들은 조각가로서의 그의 삶을 기록한 일기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단테의 《신곡》을 즐겨 읽었던 로댕은

《신곡》의 〈지옥편〉을 조각의 주제로 삼았는데,

그 내용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을 방문하여

처절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는 이야기이다.


Detail, upper left-hand door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단테의 ‘지옥 편’에 나오는 여덟 개의 원을 그리면서

단테하고만 꼬박 1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해가 저물 무렵 나의 데생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다.

자연을 기초로, 모델을 써서 작업했다."라고 말했다.



로댕은 단테가 쓴 걸작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해 먹을 기초로 하면서도

조각적 효과를 내고자 갈색 잉크로 농담을 나타낸 수백 점의 데생을 그렸다.

<지옥의 문>은 높이 7.75m, 넓이 3.96m, 폭 1m의 직사각형의 대작이다.

문의 형태는 건축적 양식을 취했고, 문틀의 장식적인 몰딩, 기둥머리 등은

르네상스의 장식미를 한껏 발휘하고 있다.

또한 많은 인물들이 서로 뒤엉키고 소용돌이 쳐 한 눈에 작품을 감상하고

느끼기엔 불가능한 작품이다.



<지옥의 문> 규모가 어느 정도 설정되자 로댕은 거대한 목조 틀을 짠 다음

그 위에 점토를 씌우고 다시 석고를 덧발랐다.

거기다가 로댕은 자기가 미리 그린 그림을 높고 얕은 돋을새김으로 나타냈고,

그 판 위에 환조나 환조에 가까운 조각을 새겨 넣었다.

대칭을 무시하고 배열된 200여 명의 인물은 서로 용해되면서

얽히고설킨 군상을 만들어 낸다.



로댕은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이 낳은 현란한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인물상 여러 개를 없앴으며 1900년에 열린 석고상 전시회에서는

환조 인물상을 대다수 제거했다.



파리 로댕 박물관의 수석학예관이 <지옥의 문>을 짜 맞춘 것은

로댕이 죽은 뒤였다.

그리고 1926년에야 최초의 청동상이 만들어졌다.

<지옥의 문>은 걸작으로 가득하다.”고 로댕의 친구인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Antoine Bourdelle)은 격찬했다.

실제로 <지옥의 문>에 나오는 여러 인물상은 그 자체가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détail d'Ugolin et ses enfants


지옥문의 가운데 팀파늄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그중 가장 유명한 독립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창조적인 인간의 정신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우골리노》 《웅크린 여인》 《세 망령》 등의 작품이

지옥문에서 시작되어 나중에 독립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The Three Shades" of 1899,

detail of the sculpture group "The Gates of Hell".


 

"Danaïd" (1884)


<생각하는 사람>, <세 망령>, <웅크린 여인>,

<한때는 투구 제작자의 아리따운 아내였던 여인>, <우골리노>,

<아담>, <이브>, <절망>, <사랑의 도피>, <무릎 꿇은 탕녀>가 그들인데,

어떤 인물상은 다른 인물상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가령 <돌아온 탕아>,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사랑의 도피>, <절망>

모두 <우골리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에서 유래했다.


Porte de l'Enfer (entre 1880 et 1917).

Haut-relief en plâtre


모든 인물은 얼마든지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었고 석고, 대리석,

청동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다.

더욱이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상들은

말년까지 로댕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했다.


La Porte de l'enfer(지옥도)


《지옥의 문》은 2쪽의 패널로 구획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기베르티(Lorenzo Giberti)의 피렌체세례당의 문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옥문 속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각기 다른 모습의 인간 군상이 한데 얽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러한 구성은 네모로 나누어진 청동문의 형식을 무시하고

형상과 문이 한데 얽혀 녹아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La Porte de l'enfer

《지옥의 문》은 1917년 로댕이 죽을 때까지 제자리에 세워지지 못했다.

장식미술관 부지에 오르세미술관이 들어서고 장식미술관은 루브르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래의 계획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 로댕은 이 작품의 오리지널 석고 모형을 자신의 회고전에서 선보였다.

《지옥의 문》의 청동 작품은 모두 로댕의 사후에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은 로댕의 전생애에 걸친 집약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즉, 여기에는 고딕건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단테와 보들레르 등

로댕의 주된 관심사들이 폭넓게 반영되어 있으며,

인간 신체에 부여한 로댕의 표현력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지옥의 문》파리 로댕미술관을 비롯하여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스탠퍼드대학교,

시즈오카 현립미술관 로댕관, 서울 로댕갤러리 등 전세계 7곳에 소장되어 있다.


La Porte de l'enfer in the Jardin du Musée Rodin, Pari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La_Porte_de_l%27enfer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La_Porte_de_l%27enfer_(Kunsthaus_Z%C3%BC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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