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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해 가슴이 촉촉해지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3.06.16|조회수57 목록 댓글 0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해 가슴이 촉촉해지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1
정말 천국은 아무나 못 간다. 열두 진주문 안에 들어가는 게 까다롭다는 건 그 문 앞에 서보면 안다. 사탄은 천국 가기가 아주 쉽다는 거짓말로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향하게 했다. 이제라도 천국 가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4)는 말씀에 눈귀가 뜨이는 자가 복이 있다.

2
자기 생각이 우상이 된 이들은 주님의 길이 늘 버겁기만 하다. 진리가 아무리 분명해도 자기 육신에 익숙해 있는 것들이 그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너무 강해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는 말씀이 그에게는 번번이 무력해진다. 세상 병원에서는 못 고치는 중병이다.

3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에 이어지는 세계평화 무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마 24:21) 종말적 심판을 앞둔 폭풍전야다. 동시에 교회에는 회개와 성결의 기회이자 세상에게는 이삭 줍기 같은 마지막 복음전도의 기회다. 세상을 거꾸로 사는 교회는 늘 끝에서 현재를 봐야 잠들지 않는다.

4
이땅에서 신자가 날마다 소원해야 할 삶의 목적은 전인적인 구원이다. 마지막때인 지금은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시든 거룩한 삶 가운데 맞을 수 있는 준비가 바로 그 구원이다. 이 종말적 긴장감을 놓치면 교회는 타락하기 쉽다. 아무리 좋은 게 많아도 첫사랑은 놓친 인간의 열심이다.

5
개척 목회를 하기 전에는 은연중 '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은 '하나님이 하시는구나'를 어느 때보다 체감한다. 직접 현장에서 체험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는 하나님이 있고 신앙이 있다. 이론과 실제, 안과 밖은 글자 모양만큼이나 다르다.

6
참된 회심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특별한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회심의 과정에서 사람의 의지적이고도 인격적인 결단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결단의 지점조차도 이미 성령의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동사다. "나는 있다"(I AM)라는 뜻을 가진 1인칭 be 동사다. 하나님은 있는 분이지 없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임재를 무시하면 그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함을 명사나 형용사로 여기면 동행의 기쁨을 모른다.

8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신앙의 힘은 하나님을 분석하고 탐구하는 데서 나오기보다 그분을 기뻐하는 감정적인 데서 나온다. 주께 대한 지식에만 머물고 적극적인 기도와 찬양과 예배로 못 나아가면 신앙이 무력해진다.

9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해 가슴이 촉촉해지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일상의 팍팍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늘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삶이 불가능하다고 당연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실제로는 가슴으로 만나는 하나님 없이 그냥 살아서다.

10
지식이 많아 사회나 교계를 놓고 비판을 일삼는 이들은 마음이 메마르고 의분이 쌓여 자기의도 쌓이기 쉽다. 그래서 대체로 찬양이나 기도, 예배에 건조해지기도 쉽다. 지식 추구의 갈망이 예배자 의식을 압도한다. 지성인일수록 예배에 뜨겁게 몰입해야 살아남는다.

11
신자가 삶의 자리에서 이땅에 정의와 공평이 이뤄지도록 힘쓰는 일은 복음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믿음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믿음의 결국은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다(벧전 1:9). 개인 구원과 내세 복음을 경시하는 이들을 경계할 것.

12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배우기는 열심히 하는데 끝내 진리에는 못 이르는 풍조가 기독교 지식주의일 수 있다. 거기선 주님의 재림이나 천국, 지옥은 너무 원시적이어서 지적 사유를 즐겁게 해줄 사변에 밀려난다.

13
성경이 신자는 이렇게 살 수 있다는데 신자들은 지금은 그렇게 사는 이가 없다고 한다. 아브라함이나 다윗, 바울 같은 사람은 성경 밖에선 없다고 한다. 연약함을 늘 인정하는 건 좋지만 신자들의 하향평준화를 당연시하는 듯한 리더들의 언행은 비성경적이다.

14
개혁주의자들의 가르침에는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은혜만능주의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이래도 나를 이뻐하시고 저래도 나를 이뻐하신다. 만사가 주의 절대주권에 속하니 나는 웬만큼만 해도 그분이 척척 알아서 챙겨주신다. 아니라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15
내가 개혁주의 신학의 틀을 비판하는 건 단순히 그 신학이 싫거나 해서가 아니다. 전도자의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다 발견한 전도자의 마땅한 의무여서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신학대로 가르침받은 이들이 구원에 대해 오해하면 최대한 막아서는 것이 전도자의 일이다.

16
신학적 문제든 신앙생활의 문제든 오류나 오해에 대해 주께서 알게 해주시는 만큼은 나름껏 순종해야 그분의 종이다. 사역자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파수꾼들이 입을 닫고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겔 33:6). 그 피값을 누구에게서 찾으실까.

17
바울은 구원을 일생일대의 가장 큰 영예요 상으로 여겼다. 칼빈주의 구원론을 믿는 자들은 구원이 떼놓은 당상이다. 성화는 잘하면 좋고 못해도 최소한 천국이니 긴장감이 없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18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성경은 두려움이 믿음의 증거라 하는데, 교리는 두려워하면 믿음이 없는 거라며 안심하란다. 어디를 따라야 성경적인가?

19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5)은 자신의 생존과 영광을 더 중시하고도 그것을 자기 신학 노선이라며 포장하기 쉽다. 나를 포함해 누구도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걸 합리화시키며 고민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건 죄다.

20
초반에 균형있게 잘 시작하다가 나중에 치우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성령사역자나 성령운동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누구든 무슨 운동이든 내가 중시하는 건 구원이다. 이걸 등한시하게 만드는 어떤 것에도 성도들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 년 전 어제 나눈 단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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