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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만나려면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하다... 이것저것 잠깐씩 건드려보듯 진리를 대하면 백날이 가도 역사가 안 일어난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3.09.23|조회수81 목록 댓글 0

진리를 만나려면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하다... 이것저것 잠깐씩 건드려보듯 진리를 대하면 백날이 가도 역사가 안 일어난다

1
일회성 은혜만으로는 죄를 지속적으로 이기는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곧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해도 일상에서 하루 종일 주와 밀접하게 동행하지 못하면 매번 그 한 번의 은혜로만 끝나기 쉽다. 골방이 아닌 일상에서 나만의 지성소를 체득할 때 지속적으로 죄를 이긴다.

2
자신만의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은 자기 중심성이 특히 강한 사람이다. 예전에는 둥글둥글한 사람이 매력없게 여겨졌는데 요즘은 나름의 내공이 단단한 사람으로 알아보게 된다. 주위에서 까칠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만큼 육성이 강한 줄 알면 된다. 친절과 겸손이야말로 신자의 성품으로는 갑이다.

3
천국을 정말 알면 이 세상이 주는 쾌락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천국에는 이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기쁨의 원형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만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 때만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천국의 쾌락은 모두 자기 만족이 아닌 주와의 관계성에서만 충족되는 어떤 것이다.

4
그동안 설교에서 교우들에게 생밥을 많이 지어 먹였다는 때 늦은 반성이 든다. 전해주고 싶은 내용이 많은 변증적 접근의 설교를 하다 보니 설명하는 방식의 설교를 주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 청중이 누려야 할 입체적인 감동을 반감시킨 듯하다. 밥도 밥이지만 입맛을 돋워줄 반찬과 온기가 부족했다.

5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눈에 띄는 교보문고 시구다. 누군가 문학은 빙그레 웃게 만드는 거라고 했듯 나 또한 문학 속에선 그 절제된 여유가 늘상 고마워 곧잘 웃는 데 넘어간다.

6
목회자로 살다보니 교우들의 직장이나 형편에 따라 다양한 상담을 나누게 된다. 때로 영적인 원리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인 가이드를 나눠야 할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것들이 퍼즐 맞추듯 엮인다. 일상적인 걸 떠나 영적일 방도가 없다.

7
우리는 육체의 정교함이나 영혼의 복잡한 지적, 영적 특성들을 보면서 신의 위대성을 가늠해야 한다. 내가 똑똑하다면 창조주는 더 똑똑해야 한다. 내가 사랑이 많다면 창조주는 더 사랑이 많아야 한다. 내가 이토록 살아 있다면 신은 더 살아 있어야 한다.

8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그가 이땅에서 불가사의한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의 말 한 마디에 풍랑이 그치고 죽은 자가 살아난 건 너무 지나치게 자제하신 결과다. 십자가에 죽으신 건 아예 연약한 나처럼 되신 것이다.

9
사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감정이 자리한다. 아무리 머리로 이해해도 가슴이 거부하면 아직 아닌 거다. 하나님과 감정으로 친밀하지 않으면 실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것과 같고 내 삶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과 비슷하다. 그 친밀함을 깨뜨리는 주범이 죄다.

10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9). 하나님이 아주 작은 죄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못 느낀다면 제대로 회개해본 적이 없어서다. 죄에 치가 떨리고 죄가 징그럽고 거북하게 느껴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깝다.

11
진리를 만나려면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하다. 이것저것 잠깐씩 건드려보듯 진리를 대하면 백날이 가도 역사가 안 일어난다. 하나님이 너무도 존귀한 분인 걸 모르면 자신의 벽을 뛰어넘는 일에 마냥 게으르다. 앉아서 잽만 날리지 말고 통째로 몸을 던져야 한다.

12
철학과 과학, 종교의 영역에서 기독교적인 논리를 구축해야 효과적인 기독교 변증이 가능하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하지만, 세인들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사고방식으로 그들의 편견과 오해를 먼저 걸러주지 못한다면 믿음의 길로 안내하기 어렵다.

13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으로 종말의 때에 큰 환난이 있으니 미리 대비하라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그 경고의 실체를 상징으로 여기는 자들은 신자들에게 아무런 대비 없이 "가만히 있으라!"고만 한다. 교회를 노아의 방주가 아닌 세월호로 만들려 한다.

14
큰 환난 전에 교회가 들림받을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 들림받는 조건이 거룩한 삶에 깨어 있는 거라면 교회는 신자들을 미리 대비시켜야 옳다. 환난 전 휴거의 가능성 자체가 꽤 높고 미리 대비해서 손해볼 게 없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

15
마지막때의 큰 환난기에 교회가 이땅에 남아 모든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면 평화의 때인 지금 진리로 인해 받는 고난이 무색해진다. 교회는 이땅에서 고난은 받지만 주의 종말적 진노는 안 받는다. 교회가 지금 순교적으로 깨어 휴거를 기다림이 더 이치에 맞다.

16
지금 한국교회의 전반 분위기로 보면 휴거를 사모하는 이들이 너무 적다. 목회자의 3분의 1이 환난 전 휴거를 기다린다는 미국과도 대조적이다. 성경에 환난 전 휴거의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고 영생을 좌우할 만한 큰 이슈라면 지금보다 더한 관심이 필요하다.

17
비성경적인 시한부 종말론 탓에 휴거의 소망이 부정적으로 비치게 되어 안타깝다. 신자들이 환난에 남겨지면 고문과 순교를 거쳐야 하는 만큼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지기 쉽다. 교회가 다시 오실 신랑을 애틋하게 안 기다린 데 대한 대가는 상상 외로 클 것이다.

18
요즘 휴거에 대해 말하면 다 뜬금없다는 듯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가 많다. 지식인들에게 이런 말을 꺼내면 그들은 이땅의 일들에 너무 어른스러운 나머지 위엣것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19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7). 여기서 구름이나 공중은 상징일까, 문자 그대로일까? 휴거를 미심쩍어하는 이들은 이 말씀이 불편하거나 믿기 어려울 것이다. '굳이 뭐 번거롭게 그렇게까지' 싶다면 믿음대로 된다.

20
휴거가 언제 있든, 종말적 재난이 언제 들이닥치든 시대의 징조들은 무시하고 맡겨진 일만 잘 감당하면 된다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신랑이라면 신부가 나를 최우선으로 마음에 두고 기다리지 않고 맨날 일하느라 바쁘다면 파혼이라도 하고 싶을 것 같다.

21
'이거 깨끗이 빨아봤자 걸렌데...' 집에서 대청소하고 손걸레들을 빨던 중 구정물이 다 빠질 때까지 헹구다가 문득 든 생각. 걸레도 일단 깨끗해야 대신 더러워지는 쓰임을 달게 받는다. 난 연약하니까 하나님이 좀 살살 쓰시겠지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22
프란시스 쉐퍼는 칼빈주의자였고 C.S. 루이스는 알미니안주의자였다. 그런데 난 쉐퍼에게서 알미니우스를, 루이스에게서 칼빈을 느낀다. 쉐퍼와 루이스가 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실한 신자들은 어느 진영에 있든 서로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

23
개인적으로 신앙이 좋은데 성품이 안 좋다면 비정상이다. 신앙공동체에 적응 못하고 매사에 이리저리 부딪친다면 더 큰 문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선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개인적인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열매로 검증되어야 개인주의 신앙으로 전락되지 않는다.

24
교회가 게토화되지 않고 세상과 계속 소통하며 전도의 접촉점을 찾으려면 그들의 고민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일방향 신문만으론 부족하다. 중요한 포털 뉴스의 댓글들을 추천순 20개 정도 보면 도움이 된다. 그들의 속을 살아 있는 그들만의 언어로 만난다.

25
힘든 일은 인상쓰고 하면 더 힘들다. 뭐든 이왕 섬길 거면 기쁨으로 섬기는 게 백번 낫다. 섬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떤 마음으로 섬기느냐다. 일의 종류는 제한되어 있어도 마음씨는 천태만상이다. 같은 일 하고도 상급이 천태만상인 이유다.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시 119:155).

예전에는 성경에서 악인이란 말이 나오면 무조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만 들었다. 지금은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일 수 있겠구나 싶다. 행함 있는 믿음의 진리에 눈뜬 게 얼마나 감사한지. 성경은 나의 구원을 늘상 현재 진행형으로 제시하는데, 나는 일찌감치 천국 티켓을 끊어 두었으니 이제 천천히 유람이나 하자 하고 살아갈 뻔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초반에는 사도보다 못하지 않은 존재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지극히 작은 사도보다 더 작은 자로 여기다가 말년에 가서는 죄인 중의 괴수로 여겼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주님을 더 알아갈수록 자기 죄가 더 많이 보여서 주님 앞에 더 많이 부끄러워진다고 고백했다.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진다는 말은 가까워지기도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 기준은 주의 율례들을 구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다. 주의 말씀이 거기에 있는 것으로는 구원이 아니다. 거기에 내가 가까이 가야 구원이다. 구원은 이론만이 아니다. 구원은 가까이 가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이다. 멀어져도 구원이 움직여 굳이 나를 잡지 않는다. 예전에는 무슨 보험에라도 든 것처럼 그렇게 믿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주의 율례를 멀리하면 나는 얼마든 언제든 악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믿는 게 더 든든한 보험 같다.

새벽녘에 잠이 깨어 베갯머리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부족한 나를 주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에 불러주시고 쓰임받게 해주신 데 대한 감사가 터져나와 숨 죽여 통곡했다. 주님 앞에서 내가 너무도 작다는 게 내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주의 임재 가운데 다시금 깊이 깨달아졌다.

나는 여전히 틈만 나면 내 좋은 대로만 하려는 악인이고 영적 철부지다. 주의 말씀이 나를 붙들어주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 멀리 도망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사역으로 아예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종으로 삼아주신 은혜가 오늘은 더 특별히 감사하다. 이 감사 말고는 오늘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나를 가까이 하신다"(약 4:8). 그리고 정말 그게 구원의 전부다.

주여, 주를 가까이 하는 자를 주께서도 친근히 여겨 가까이 하신다는 약속을 다시금 굳게 붙들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구원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늘 인격적인데 나는 구원을 비인격적인 보장처럼 여겨 그 안에서 구원을 나의 특권이나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주장했고, 주의 율례는 그 권리나 보장의 보조 증명서쯤 되는 것으로 여기며 살면서도 그것이 악인의 삶인 줄 몰랐습니다. 이제라도 주의 율례가 항상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게 해주시고, 그 율례를 기준으로 주께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것이 나의 구원인 줄로 알고 날마다 주의 자비로운 임재 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게 하소서!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 년 전 오늘 나눈 단상과 묵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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