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는 이방인 교회를 상징하는 룻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보아스와 연합하여 곡물을 추수할 때...
1
바닥 공사로 통제된 자전거 도로를 막 지나왔는데 그 막힌 도로로 한 떼의 자전거 부대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 길 막혔다"고 말할 틈도 안 준다. 세상사의 사이클에 빠져 자신의 인생길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달려만 간다. 그 인생길의 최후를 영상으로 미리 찍어 보여줄 수도 없고.
2
함께 있으면 아무 일 없어도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한다. 그렇게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고 위로와 회복을 주는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일 것 같다. 뭔가 좋은 걸 안 주셔도 주님은 내게 그런 친구이시다. 아무 일 없이 그냥 곁에 있기만 해도 좋은.
3
예수님의 달콤한 임재를 맛보며 사는 이들은 그 임재가 너무도 좋아서 거기에 방해되는 것들은 최대한 멀리하고 싶어진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고 주님도 이 상호간의 소통 여부에 아주 민감하시다. 신자의 영적 성숙은 주님이 각자에게 원하시는 만큼 주님과 함께하는 데서만 한 걸음씩 더 진전된다.
4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내 기억에 하나님은 내가 가까이 가고자 할 때 "네가 그 모양으로 어찌 내게 오려고 하냐?"는 식으로 거절하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일은 가장 쉽고도 어렵다. 왜 어려운지를 좀더 분명하게 알아갈수록 가까이 가는 게 더 쉽다.
5
신자들조차 하나님께 제대로 가까이 가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멀리만 계시다며 혼자 곧잘 토라지곤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안 가려는 데서 그분에 대한 온갖 의심과 잡설이 증가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지식을 얻는다.
6
사람들은 평소에는 죽음에 초연한 존재인 듯 한껏 교만을 부리며 하나님이 없는 듯 살아가다가 암 같은 질병에라도 걸리면 그때부터 부랴부랴 불평 많은 유신론자가 된다. 마치 정상아를 낳으면 당연하고 기형아를 낳으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제야 인생의 주인이 누군지 인식되어서일까.
7
요청의 간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의 기도와 다르다. 일상에서 주의 임재를 구하는 사귐의 기도와도 구분된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사귐의 기도의 목적은 주로 인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8
삶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영혼들에게는 주위의 따듯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냉소적인 말을 쉽게 내뱉는 이들은 주위를 정말 차갑게 만들고 일종의 심리적 억압을 행사한다. 그러나 실은 그들이야말로 삶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영혼들이다. 그들도 따듯하게 품어야 다 품는 것이다.
9
룻기는 이방인 교회를 상징하는 룻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보아스와 연합하여 곡물을 추수할 때 첫 열매로 들림받게 될 사건을 보여준다. 참된 교회의 구성원들이 들림받는 사건은 이 땅에 남게 될 수많은 영혼들에게 일종의 경고등이다. 아직 구원의 마지막 기회가 딱 한 번 더 남아 있다는 시그널이다.
10
노인들의 연명 치료나 안락사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새삼 모든 사람이 죽음을 최종 확정해놓고 산다는 데 눈이 고정된다. 청소년기부터 죽음에 눈뜨고 이땅의 모든 것이 너무 허무하다는 데 몸서리치며 살아온 내 삶의 모든 것이 실은 죽음에 대한 준비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11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가끔 무슨 일이 아주 중요하게 여겨져 꼴똘히 몰입하다가도 이런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난다. 그러고는 이것저것 다 내 마음에서 먼저 떠나보낸다. 세상에 정말 중요한 것이 주님이 되지 않으면, 이것저것 쓸데없이 집적거리다가 주님을 더 사랑할 기회만 자꾸 더 놓친다.
12
아직도 선관위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자신들이 쇼통 흉내를 내면 국민들이 멋모르고 따라올 줄 아는 모양이다. 4.15 총선 부정 의혹은 큰 선거 끝나면 으레 따라붙던 의혹과는 180도로 차원이 다르다. 조국 사태와 드루킹, 울산시장 선거 개입 등이 이미 꾸준히 군불을 때준 정권 불신의 정점이다.
13
총선과 같은 큰 선거에 제어용 컴퓨터가 부착된 전자개표기를 사용한 것은 공직선거법 부칙 제5조를 위반한 명백한 불법이다. 선관위는 개표 시연과 같은 여론 호도용 쇼를 기획할 시간에 그동안 제기된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의혹 하나하나에 대해 지금이라도 성실한 자세로 해명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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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에게 큰 감동과 기름 부으심을 느끼게 해주는 찬양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잉태되고 마침내 태어나는 과정을 거친다. 새로운 찬양이 그만한 영적인 무게를 가지려면 그만한 시간과 사연과 눈물이 필요하다. 오래 묵은 자신만의 찬양들은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데 없어선 안 될 무기고다.
15
"핍박을 겸하여 받고"(막 10:30). 진리로 인한 핍박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하면 반드시 세상에 마음을 내주게 된다. 전심으로 주를 따르는 길에 전념하기 어렵다. 사역자든 신자든 크고 작은 핍박을 피하려고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왕상 18:21)하면 할수록 참된 경건과는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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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 12:12). 출판과 공부를 금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만큼 더 경건해지는 열매 없이는 공부도 헛되다는 의미다. 공부할 거리만 더 많아지는 공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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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서 왜 또 순종과 행함의 열매를 요구하냐는 이들이 많다. 믿음은 특정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나 고백만이 아니다. 그것만의 믿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죄사함의 복음을 정말 믿는 자는 죄를 극히 미워하는 것까지 믿음이란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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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형식적, 율법적인 수행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관계의 종교다. 주께 대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 결정적인 출발점이 되는 이유는 그때부터 생명력을 공급받는 관계가 시작되어서다. 그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순종과 행함이기에 내 공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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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수록 하나님과 더 오래 같이 있고픈 마음이 들면 좋은 기도다. 기도는 천국에서나 온전해질 그 애틋한 마음을 여기서 잠깐 미리 맛보는 것이다. 기도할수록 일상에서 주의 임재와 동행을 더 많이 누린다면 일의 기도가 아닌 마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20
기도에도 욕심을 내는 이들이 있다. 기도는 잘 해야 하는 무슨 경쟁 도구도 아니고 나를 잘 모르는 하나님께 애써 나를 알리는 도구도 아니다. 기도는 내가 주 앞에 꾸밈없이 내가 되는 일이다. 내 죄와 염려와 아픔을 있는 그대로 죄다 보여드리는 일이다.
21
"정말 주님만을 증거하고 싶어요. 주님만을 자랑하고 싶어요.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이 고백이 내 마음에 숨은 모든 이기적인 동기를 다 솎아내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기도의 고백을 사용하신다. 그분이 사용하시기에 나는 나를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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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몸에 남자의 씨와 아기의 생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한 본체에 세 인격을 뜻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낸다."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말이다. 창조자를 추방한 진화론은 결코 이런 창조와 창조주의 신비를 담아내지 못하고 흉내조차 못 낸다.
23
6일 창조는 창세기 1장에만 있지 않다. 이후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도 거듭 언급된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출 31:17). 앞의 엿새가 여섯 시대가 아니기에 일곱째 날도 그저 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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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원숭이로부터 창조되는 데 한 시대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면 현재 10개월의 잉태기만 거쳐 태어나는 아기들은 어떻게 된 걸까.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명령은 처음부터 완성된 생물체에만 적용된다. 처음부터 창조는 창조고 진화는 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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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고도의 지성적 설계로 완벽하게 고안되지 않았다면 엄마의 섬세한 자궁이나 아기의 태는 수천억 년이 지나도 절대 생성 불가다. 무생물에서 저절로 진화되어오던 인간이 언제 엄마 뱃속으로 껑충 뛰어들어간 걸까. 진화론은 생각보다 딜레마가 꽤 크다.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 년 전 어제 나눈 단상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