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반대와 때로 조롱마저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난 전 휴거를 강력히 주장하게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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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하나님의 진짜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질수록 자기 나름의 한 세상을 더 견고하게 이루며 산다. 그럭저럭 돈도 모으고 별 근심이 없고, 신자라면 고난이 없거나 예수님을 여느 종교의 창시자들 중 한 사람쯤으로 여기며 산다. 그렇게 살아도 별 제지가 없어 감쪽같이 그런 줄로만 알고 잘 산다.
2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이나 그분이 중시하시는 것, 일하시는 방법 등을 알게 되었는데, 한 사람을 키우시는 데 관심이 많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사람이 여럿이다 보면 사람은 사람을 지나치기 쉽지만,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이 전부인 듯, 그 사람만 보시듯 집중적으로 집요하게 훈련시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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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신은 몰라도 그의 영이 천국 보좌 앞에 가 있는 경우도 있다고들 한다. 처음에는 왠지 미심쩍어서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내 마음을 쏟아놓을 때 영적인 시공간이 어딘가에서 따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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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 마침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멀리 나가서 늦게 들어왔다. "빨리 오라"는 내 문자에 "그동안 내가 기다렸으니까 오늘만 봐줘요"라는 답이 왔다. 순간 왠지 찡하고 짠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남편인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아내가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스럽다.
5
"목사님, 좋아요." 엄마가 하란 대로 이렇게 말하는 두 살배기 아기 제나는 내가 섬기는 교회의 유아세례 1호다. 감기로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기도하는 나를 덩달아 심각하게 쳐다보는 사진이 재미있다. 목회자는 남녀노소 없이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 무조건 가장 힘이 난다.
6
구원관에서 개혁주의 장로교와 루터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인간의 책임도 좀더 강조하는 웨슬리주의에 감리, 성결, 오순절교회와 구세군이 속하고, 침례교와 성공회는 양쪽을 다 수용한다. 개혁주의에만 성경적 구원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칼빈주의는 이들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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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신자는 모두 이 땅에서 이미 면류관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정해진다. 이제까지의 헌신으로 면류관을 받게 될 자는 중도에 곁길로 나가 이 땅에서부터 그 면류관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끝까지 순전해야 한다.
8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상이 눈에 보인다면 그야말로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살게 해줄 가장 견고한 동기 부여가 된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신자들이 천국에서 받는 상에 차등이 없을 거라고 주장하면서 이 기초마저 무너뜨리려 한다. 이 땅의 차별화된 영광이 더 좋아 보인다는 건지.
9
시체를 세는 단위는 사람처럼 '몇 명'이 아니라 물건처럼 '몇 구'라는 게 얼마나 황당한가. 사람이던 동안 하나님을 못 만나면 모든 사람의 삶의 목적은 죽고 나서 물건처럼 취급받고 실제로 한 줌도 안 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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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반대와 때로 조롱마저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난 전 휴거를 강력히 주장하게 된 것은 이 종말론을 견지할 때 정말 진정한 종말의식다운 일깨움을 받을 수 있어서다. 실제적인 긴박성이 없는 재림이나 종말에 대한 말은 설교의 결론을 멋지게 장식하는 수사적 휘날레 이상으로 구체화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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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조차도 그리스도인의 우상이 될 순 없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목적도 올바라야 하지만 동기와 과정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과정에 편법을 써서 이룬 어떤 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압한 상대방에게 비슷하게 꼬투리잡힐 일만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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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가 사회주의 지향이나 종북이란 말을 안 들으려면 보수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아예 빌미를 안 줘야 하는데 현실은 다르다. 꼭 티를 내고도 그 티에 대해 문제삼으면 굳이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도 안 한다. 많은 부분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국민을 우습게 보며 그냥 뭉개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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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의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꽤 경직된 데가 있다.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뿐 아니라 정통 보수 언론들까지 지금 한국 사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보는 염려를 마냥 일축해버린다. 그들의 염려는 단순한 수구세력의 기득권 지키기로 치부하고 자신들의 입장은 절대선의 편에 서 있는 듯 당연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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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집에 일찍 들어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아빠가 일찍 오면 기운나요" 하던 딸은 제 방에서 뭘 하는지 꼼지락대며 혼자 바쁘다. 몇 시에 오냐던 아내는 요즘 어디 책 만들어주는 일로 집에서 야근한다. 이래저래 가족조차 내 맘대로 안 되는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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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것 같은데...' 이런 마음이 들면 말씀사역자의 은사가 있는 거란다. 돌아보면 나도 이런 마음을 조금씩 키워왔던 것 같다. 누가 시켜서거나 배워서가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심으신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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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 27:5). 성경은 긍정적으로 칭찬만 하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악을 옳다 하지 않는 건 교만이 아니다. 인격적인 비난이 아닌 정당한 비판은 정당한 사랑이다. 사람에게는 미움받아도 하나님께는 인정받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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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말하는 꼴통 보수나 꼴통 진보가 정말 있는 듯싶다. 자기 라인에 함께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이 죄다 적으로 보이면 꼴통에 속한다. 합리적 근거보다 감정적인 톤에 무게를 실어 싸움닭처럼 선동하거나 차분치 못하고 곧잘 들뜨는 스타일도 꼴통 체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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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해 작곡을 전공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물론 여건상 어렵다는 걸 알고 일찌감치 포기했었다. 여전히 음악이론에 문외한이지만 요즘은 작곡을 독학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영감있는 찬양은 늘 새롭게 내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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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수 복음주의자 중 79퍼센트가 현재의 중동 상황을 종말의 큰 징조로 믿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예전에 시카고 무디신학교 서점에 들렀을 때 종말에 대한 신학연구서가 많은 걸 보고 부럽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한국은 종말에 관한 한 무감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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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8). 노아와 롯의 때에도 종말에 대한 경고가 일상주의자들의 무시와 비웃음을 받았다. 이제도 똑같은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지금이 종말의 때라는 명백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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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혐오하거나 세계화합에 걸림돌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조금씩 자라가고 있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왜 이런 기류가 흐르는지 안다. 지금 불편하면 앞으로 다가올 시험의 때에도 불편하다. 이제부터라도 일상에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연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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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이 대전제를 잊어버리고 창조주보다 더 똑똑해지려는 인간의 교만이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신이 없으면 가질 수조차 없는 생각을 스스로 가졌노라고 우긴다. 자기 존재의 뿌리는 잘라내려고 애쓸수록 더 집요하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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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다. 구원의 진리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어렵게 계시되었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서울 지리를 다 몰라도 약도만 알면 집을 찾는다. 성경을 다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 진리는 가난한 마음에 알려지는 단순한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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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덧없고 허무하다. 이것을 빨리 알수록 시간을 벌고 영혼을 번다. 무엇을 하든 주님께만 마음을 드리고 시간과 에너지를 드릴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다. 불충한 종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엉뚱한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기독교 역사에서 두고두고 악명 높은 이중예정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의심케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킨 그 이중예정론의 대표적인 근거 구절이어서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이 말씀에 시야가 고정되어버린다.
찬찬히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교회다. 성경에 보면 예레미야나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렘 1:5, 갈 1:15-16) 구원이 아닌 특별한 사명자로 택하는 것과 관련되어서만 무조건적인 개인 예정이 나올 뿐 구원 예정의 대상은 공동체로 나온다. 개인 예정의 맥락에서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미리 아심'(벧전 1:2)에 따른 조건적 예정이다.
그러니까 우선 이 구절을 갖고 창세 전 이중예정, 곧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내려고 작심을 하고 사람들을 만들었다는 그런 교리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
이 구절을 놓고 볼 때 '창세 전 예정'이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교회 공동체에 소속시키기로 계획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성경적으로 더 타당하다.
그렇지 않고 창세 전에 구원할 자와 멸망할 자를 미리 다 정해두시고 창조를 행하셨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군의 사람들은 멸망시키기 위해 창조하셨다는 게 된다. 그들이 창조된 목적은 다른 게 없다. 오직 멸망당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이것이 과연 완전히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창조 행위이겠는가. 더구나 그러한 창조 행위의 결과물을 보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실 수 있었을까.
문제는 '창세 전'이라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 '창세 전'은 시간적인 과거의 개념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에 계신다. 그럼에도 여기서 '창세 전'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임의로 일하시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하시는데, 그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해나가기로 '미리' 결정하셨다는 게 창세 전 예정의 전모라고 봐야 한다.
물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의 타락을 예지하셨다, 곧 미리 아셨다는 사실은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드러낼 뿐 그분의 공평하심을 훼손시키진 않는다. 중요한 건 전반적으로 이렇게 봐야 하나님의 주권과 공평하심과 공의도 보존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도 보존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정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가 예정되고 그 안에서 구원받는 교회 공동체가 예정된 것이다. 각 개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그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가 예정되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예정의 진짜 본질이다. 창세 전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서 멸망할 자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자로 예정된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각 개인을 일일이 멸망으로나 구원으로 그렇게 이중적으로 예정하신 게 아니다.
더구나 구원받는 경우도 그리스도 안에서 만약 문자 그대로 미리 각 개인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이중적으로 예정해놓았다면 예수님이 굳이 필요없고, 실제로 그를 믿는 것의 중요성도 심각하게 폄하된다.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라고 하기에도 무색할 만큼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정하셨다고 보기보다 '우리' 곧 교회 공동체를 예정하셨다고 보는 것으로 예정의 대상에 대한 이해의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면 이중예정론에 대한 주된 오해가 풀린다.
안티기독교 사이트들을 부지런히 기웃거리던 변증전도 사역 초기에 이중예정론 때문에 기독교를 비난하고 하나님의 불공평함을 심각하게 성토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안티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 출신인데,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떠난 이유들 중 하나가 이 이중예정론 탓이구나 하고 느껴질 때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이 이중예정론만 생각하면 하나님이 무지막지하고 비인격적인 데다 무조건 자기 맘대로 하는 데 과도한 열성을 쏟는 폭군이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이런 식의 오해에 빠져 있을 때조차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싫어할 자유 자체를 허용해주신 분이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나의 선입견을 풀어주시기도 했다.
무엇보다 교인들에게 이 이중예정론이 갖는 큰 폐해는 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아예 묵살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다 작정해두셨다는데 무슨 중도 탈락 같은 걸 염려하나?' 하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러나 이중예정론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 자체가 각 개인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가 될 순 없다. 이런 식의 특정 공식만 달달 외우고 있다가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하나님의 이중예정에서 정말 멸망이 아닌 구원으로 예정된 존재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창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중예정 기록 대장을 한 페이지씩 들춰가며 일일이 확인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인격적인 예정이 아니라 신비한 운명적 예정처럼 여겨져 운명의 신에게 그냥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의탁한다는 정도의 막연한 확신 외에는 사람 편에서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게 구원의 주로 예정되었고 나는 그 그리스도를 주의 도우시는 은혜 가운데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교회 공동체의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 건 얼마나 건전하고 합리적이고 인격적인 예정인가.
주여, 오늘 사도 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내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믿어 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것이 얼마나 크고 영원한 축복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주로 예정해두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지금 이 땅에서 유일한 천국의 문으로 열어두신 교회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었겠는지요!
지금이야말로 이중예정론의 미망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두신 은혜의 때인 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하시고, 주의 거룩하시고 공평하신 성품을 더욱 사모하며 닮아가고자 하는 주의 백성들을 이 땅에 더 많이 일으키시어 주의 나라가 날로 더욱 힘 있게 확장되어가게 하소서!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년 전 엊그제 나눈 묵상과 단상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