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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심과 구원

영접기도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성경적인가?

작성자Stephan|작성시간13.03.25|조회수1,413 목록 댓글 1

 

 

“믿음을 가리켜, 우리를 향하신 선하심을 아는 확고하고도 분명한 지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 쳐진 것이라 부른다면,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정의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Ⅲ, ⅱ, 7).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할 때의 그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중생 교리를 서재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과연 어떤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는지 알기 위해 R. C. 스프로울이 해설한 루터의 가르침에서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살아 있는 믿음의 세 가지 요소

 

“루터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 또는 참 믿음은 생기 넘치는 또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주장했ek. 그러한 믿음은 세 가지 별개의, 그러나 연결된 측면 또는 요소들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삼중적 정의는 notitia, assensus, 그리고 fiducia로 불리는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신약 성경에서 믿음을 말하는 주요 방식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1. Notitia. 믿음의 측면 중 notitia(또는 notae)는 마음에 의해 파악되는 믿음의 내용물(지식)을 의미한다. 비록 믿음은 지식과 동일하지 않지만, 믿음은 결코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다’라고 할 때, 우리는 믿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구원되기 위해서는 사람은 무언가 기초적인 정보를 믿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 이상을 포함하지 결코 그 이하는 아니다. 복음에는 기본적인 내용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정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는지와 같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식해야 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2. Assensus. 믿음의 측면 중 assensus는 데이터의 진실성 혹은 복음의 내용물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말한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음을 믿는 것은 우리가 그 진술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복음이 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믿음에 있어서 assensus의 단계가 결단의 문제가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내 마음이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언가를 믿기로 ‘결정’할 수 없다. 무언가 의문시되는 것을 참이라고 ‘희망’할 수 있고, 그 희망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다. ... 그러나 단순한 결단에 의해 진리를 실제적으로 확신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진정한 동의가 없는 ‘믿음’은 경솔한 믿음이거나 미신이다.

 

3. Fiducia. 구원에 이르는 셋째 요소는 개인적인 신뢰와 연관된다. 이것은 보통 인식적 또는 순수한 지적 요소에 부가되는 무언가에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인간의 반응에 있어서 의지적, 그리고 감정적 요소들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달콤함과 특출함에 대한 지적이고 인식적인 자각을 포함한다.

 

이것은 중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우리 안의 변화와 관련된다. 이 변화는 감정, 기질, 기호, 그리고 의지의 변화를 포함한다. 이제야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는다. 우리는 기쁘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진실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달려간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특별히 오직 은혜의 신학, sola gratia) 죄인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중생이 믿음에 앞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세 용소 – notitia, assensus, 그리고 fiducia –는 분리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는 칭의를 위한 충분한 조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함께 더해지면, 그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본질을 구성하게 되고 하나님의 칭의의 선포가 믿는 사람에게 적용되도록 하는 유일한 충분조건이 된다.”

 

 

지적 동의만으로 구원 얻기에 충분하다고 가르치는 샌디맨주의

 

오늘날의 대중전도에서 영접기도로 이끄는 과정을 보면, assensus의 차원에서, 대개 전달한 내용을 지적으로 인식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까지는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생략하고 영접기도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모 단체에서는 모 방법으로 몇 천 명이 기도하고 결신했다는 전도 사역 보고를 자랑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중생을 통한 믿음은 현대 교회에서는 매우 생소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영접기도가 차지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것은 지적인 동의만으로 구원 얻기에 충분하다는 샌디맨주의(sandemanianism)에서 주장하는 믿음에 그 맥이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하는 사람이 전도를 받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있지만 믿음이 생기게 할 수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영접기도를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면 곧 영접기도를 통해 믿음이 생기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성경은 오직 은혜로 중생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어떤 메시지를 전한 즉시 “의지의 행위인 믿음으로 영접합니다”라고 하면서 영접기도를 할 것을 널리 권장해 왔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오직 은혜’ 교리는 박살이 나고 말았으며, 지금도 박살이 난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접기도라는 것이 왜 비성경적인 것일까요? 대표적인 영접기도의 예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죗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처음 시작은 ‘믿고 싶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내용은 이미 믿음을 표현하는 고백들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자가 어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중생의 체험도 없으며 죄의 각성도 일어나지 않았고 철저한 회개도 하지 않았으며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받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런 기도를 따라 하게 하고, 이런 기도를 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그것은 죄의 각성이 없는 믿음, 회개가 없는 믿음이며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생긴 믿음이 아니므로 믿음의 교리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의의 교리도 역시 무시되는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서 이 믿음은 다름 아닌 중생에 수반되어 성령님이 은혜로 주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중생 없으면 행함 없는 열광주의,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다

 

영접기도를 하면 믿음이 있는 자로 인정하여 구원받았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의 교리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중생과 칭의에 대한 비성경적인 이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실제적인 전도와 설교에서 이런 비성경적인 새로운 이론을 열정적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리들을 무시하여 교회 중심에서 몰아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몰입하고, 행위로 말미암아 생기는 자기의에 빠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분노하심, 인간의 전적 타락, 회개, 성령으로 말미암는 거듭남과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 이 은혜를 받고 지속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 심판과 종말이 실재할 것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건조하고 메마른 신앙으로 떨어지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열광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빌헬무스 스코팅하우스는 자신의 교리문답서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24장 질문 1: 중생으로부터 무엇이 생깁니까? 답: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가 심령 속에 거하시도록 하는 참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요일 5:1; 엡 3:17)이 생기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갖가지 방법을 통해 분명히 진술되어 있습니다(요 3:12; 마 11:28; 마 5:6).”

 

종교개혁의 핵심인 ‘오직 믿음’(sola fide)에서 말하는 ‘믿음’(fide)은 영접기도를 한 사람에게 전도자가 부여하고 확증하는 믿음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시는 중생에 수반하는 은혜의 선물로서의 믿음을 말합니다. 단지 우리는 이 믿음을 얻기 위해 말씀을 듣고 은혜를 구하도록 촉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saving faith)인 참 믿음은 단 한 번의 영접기도를 통해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수여되는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중생자 자신의 영적 체험(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증거)과 삶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에서 ‘오직’(sola)에 초점을 두었는데, 그것은 의롭게 되는 수단으로써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추가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롭게 되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수반되는 믿음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비록 그 행위는 의롭게 되는 일에 아무 공로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하는 믿음은 단순한 고백만이 아니라 행위가 따르는 믿음으로서 ‘살아 있는 믿음’(living faith)이라고 불렸습니다. 오늘날 21세기 종교개혁의 핵심은 이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본질이 ‘중생교리’의 회복과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데반, ‘중생이란 무엇인가’(부흥과 개혁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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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기독네티즌 | 작성시간 13.03.25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지,정,의를 동반하는 믿음입니다. 종교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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