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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고통의 문제

앨리스터 맥그래스, '잔인해보이는 하나님, 철학자들이 만들었나?'

작성자Stephan|작성시간13.07.26|조회수558 목록 댓글 2

 

 

철학자의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세상에 고통과 고난과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왔다. 기독교 신학은 고통과 악의 실상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왔다. 쉬쉬하며 지켜오던 비밀처럼,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열렬히 믿던 세상에 고난의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고난이 뭔가 새로운 것이라고 믿게 되기도 한다. 지난 일백 년 동안 우리는 전례 없이 파괴적이고 악한 전쟁들을 통해, 의도적으로 기근을 일으킨 사건(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서 한 것과 같이)을 통해, 그리고 환경과 소수 민족을 가차 없이 착취한 일을 통해 고난이 주는 새로운 공포를 보아왔다. 이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 우리가 이렇게 무모한 주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의 죄성은 막대한 고통을 야기했다.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도덕적 진보를 이루겠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위대한 환상은 무너졌다. 고난을 경감시키려던 과학기술은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데 사용되었다. 과학은 원치 않는 인간을 제거하는 새롭고 보다 효율적인 방식을 개발하는 데 사정없이 이용되었다. 현 시대의 고난에 의해 손상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공리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배우기 힘든 교훈이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교훈이다.

 

 

고난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대체로 인간의 활동에 의해 고통과 잔인함의 강도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대한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7세기 이전에 기독교 저자들은 고난이 기독교 신앙에 어떤 중대한 위협도 제기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저작된 기독교 신학에 대한 여러 주요 저술들을 오랫동안 연구했는데, 그중 어느 것도 고난의 존재를 기독교 믿음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왜 그럴까? 왜 전에는 전혀 그런 적이 없는데 지금은 고난을 믿음에 대한 도전으로 보게 되었는가? 많은 학자들은, 17세기에 일어난 현대 무신론의 극적인 발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레오나드 레시우스와 마린 머젠 같은 수많은 저자들은 기독교를 지적으로 존경할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안달한 나머지, 복음을 가장 잘 변호하는 사람은 철학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던 방식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철학의 지혜에 의지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그리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대신 오로지 이성에만 직접 호소하게 되었다.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호소하는 대신, 자연에 호소하게 된 것이다. 이성과 자연은 이처럼 기독교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시험 근거였다. 그 결과는 불가피했다. 좋은 의도이긴 했으나 이것은 사람들을 잘못 이끌어, 뚜렷하거나 명백하게 기독교적인 요소들에 호소하지 않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세기 동안 복음에 도움을 주었던 자원들은 과거의 유산으로 낭비되고 폐기되었다.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매끄럽고 빈틈없이 정연하게 변호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변호는 엄청나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완벽한 존재라고 주장했으며, 이런 가정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흥미로운 철학적 논증을 개발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를 지적으로 새롭게 높은 지위로 끌어올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상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이 온전하시다는 것을 엄청나게 강조했으나 그런 강조는 악과 고난의 존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인해 완전히 손상되었다. 어떻게 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함이 존재하도록 허용할 수 있단 말인가? 데카르트가 말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철학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는 실제로 기독교를 변호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우연히 개발한 하나님의 개념을 변론했을 뿐이다.

 

 

한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랑스에서는 많은 탁월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블레어 파스칼은 그중에서도 단연 위대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사고방식의 한계들 역시 매우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대단히 인격적인 분이셨다. 파스칼은 철학이 이런 통찰을 내버렸다고 열렬히 믿었다.

 

 

그가 죽은 후 동료들은 그의 셔츠 안쪽에 꼬깃꼬깃 뭉쳐진 종이 한 장이 꿰매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어디를 가든지 가슴에 꼭 붙여 다니고자 했던 것이다. 그 종이 위에 쓰인 말은 전설적인 것이 되었다. 그 말은 우리의 주제와도 매우 관련이 깊다.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것은 직관적이고도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의 개념에 불과한 것은 단호히 거부하고 사람들의 삶에 나타난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철학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다. 철학은 우리가 어떻게 어떤 것을 알게 되는지 어려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말과 사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며, 그 말과 사상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해준다. 문제는 일부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 자체가 하나님이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생기기 시작한다. ‘철학자들의 신’은,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애써 우리에게 말해주셨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자들의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비심에서 추출된 요소들로 구성된, 완벽하고 이상적이며 추상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 신의 특징은 주로 전능함, 전지함, 선함이다. 그 신뢰성-하지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벧전 1:3)의 신뢰성은 아니다-은 고난에 의해 즉시 손상된다. 가장 통찰력 있는 현대 철학자 중 한 명인 앨러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말한다. “19세기와 20세기가 믿지 않는 하나님은 17세기에 만들어진 하나님일 뿐이다.” 철학적 신학의 신은 인간의 발명품,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살아있고 사랑이 많으신 분, 그리스도와 성경과 개인의 경험-앞으로 보겠지만, 고난을 포함하여-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시다.

 

 

파스칼이 매우 분명하게 보았듯이,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왠지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개념은 그 자체로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즐거운 경험과 비교해보나, 어둡고 쓸쓸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에드워드가 새뮤얼 존슨에게 고백한 유명한 말을 상기시킨다. “존슨 박사님, 당신은 철학자입니다. 나 역시 평생 철학자가 되려고 애써왔지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쾌함이 언제나 끼어들곤 했습니다.” 신학자들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아는 지식에 몰두한 나머지, 고난의 문제에선 어느 정도 즐거운 느낌을 가진다. 그 기쁨은 확실히 그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는 볼 수 없는 요소다.

 

 

그렇다면 도덕적 측면은 어떤가? 데카르트의 신은 아리스도텔레스가 말하는 ‘제1운동자’처럼 세상의 슬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이 고난을 받는 동안 한쪽에 냉담하게 있으면서도 관여도 않고 초연하다. 빅토리아 시대 장원의 영주들이 하층민들의 궁핍함과 빈곤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화려한 생활을 누렸던 것처럼, 데카르트의 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다. 그 신은 자기 백성의 고통과 빈곤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런 신은 없애버리자고 외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는 매우 다르다. 여기에서 제1운동자는 없다. 여기에는 세상의 창조주, 타락한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해 그 세상의 고통과 슬픔과 비탄으로 들어오기로 하신 분이 계시다. 여기에는 고통을 직접 경험하신 하나님, 자기 백성의 재앙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는 더 이상 홀로 고난을 받으면서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직접 고난을 경험하셨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으며, 앞으로 더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주요 논지는 분명하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데카르트의 하나님은 다르다. 후자(우리가 강조했듯이, 그것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 낸 것이다)의 죽음에 대해 애도할 이유는 별로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돌보심과 자비하심을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한다.

하나님의 고난에 관한 점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서 더 살펴보아야 한다.

 

 

-앨리스터 맥그래스,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국제제자훈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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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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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26 성경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만든 이론적으로 완벽한 신과는 다르다는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면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열립니다.
  • 작성자씨익웃기 | 작성시간 14.08.06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지목매한,, 무지하여 스스로 목을 매는 형국에서 벗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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