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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변증-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해로운가?/ 박아론

작성자기독네티즌|작성시간12.12.11|조회수225 목록 댓글 5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해로운가?

 

서론: 한국교회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아래의 글은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님의 동국대 강연 내용의 일부를 발췌했다.

“저는 한 박사님의 초청을 받고 대단히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전문경영인도 아니고, 학자도 아 니고 평범한 목사로서 제가 고명하신 여러분을 모시고 무슨 말씀을 드릴까 굉장한 마음의 주저 함을 가졌습니다만 그러나 종교간 대화라는 위치에 서서 볼 때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토론이라는 것은 정반합을 이루는 것이지만 대화라는 것은 서로 상호 간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서로 이해를 돕고 화해하고 협력을 증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기독교와 불교 혹은 가톨릭교, 이슬람교라도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 를 더 깊이 이해하고 화해하고 협동하고 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4년 동국대 강연내용 중 서론부분)

이 강연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다. (1)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삶에 대한 또 다른 불행이었다.” (2) “그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내었다.” (3)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할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우상숭배라고 믿는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최근에 문제가 된 서울 삼성동 봉은사 대웅전에서 기독교식 예배를 보고 불교를 폄훼하는 장면 등을 담은 충격적인 동영상이 단면적인 예다. 이 동영상은 ‘봉은사 땅밟기’라는 제목으로 약 6분 정도의 분량이다. 이 내용에서 20~30대로 보이는 남녀들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봉은사 경내 곳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들어 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라는 성경 구절로 시작하는 동영상은 불상, 사천왕상, 돌계단, 탱화 등을 보여주며 이를 ‘사람들이 만든 우상들…헛되고 헛된 것들’이라고 지적한다. ‘찬양인도자학교 주님의향기 6조’라고 소속을 밝힌 이들은 동영상에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는 자막과 함께 봉은사 대웅전, 불탑, 대웅전 입구 계단 등에서 두 손을 하늘로 뻗은 채 기도를 하고 요사체 기둥이나 불경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진을 담았다. 동영상은 ‘주님! 우상은 무너지고 주의 나라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으로 끝이 난다. 이들은 이어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밝히며 소감까지 찍어 올렸다. 동영상 첫 부분에 등장하는 한 여성은 “이 땅이 하나님의 땅이라는 것을 선포했다”며 “분명히 이 땅은 (하나님에 의해)파괴될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회복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한 남성은 “쓸데없는 우상이 많아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고 다른 여성은 “주님을 믿어야할 자리에 너무나 크고 웅장하게 절이 들어와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겨레, 2010. 10.26).

이 동영상이 공개된 뒤 누리집은 이들의 도를 넘는 행태에 대한 비난의 글들이 쏟아졌다. 한 누리꾼은 “사이비 종교라도 다른 종교 건물 안에서는 그런 짓은 못할 듯”이라고 비판했고 “타종교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없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독선”이라는 글도 달렸다. “광신도는 못 말린다”는 비아냥도 있었다. 기독교인들조차 대부분 이들의 행동을 나무랐다.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진짜 이것 아닌 듯”“같은 크리스천으로써 안타깝기 그지없다”“기독교인으로서 봐도 정말 씁쓸하다” 등의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그대들은 믿음이라 칭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예수를 욕되게 하였다”는 준엄한 꾸짖음도 있었다. 드물지만 “자랑스럽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 누리꾼은 “강남 한복판에 절이 있으니까 강남이 환락가가 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다 거룩해집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동영상에 등장하는 이들이 자신의 소속을 밝힌 ‘찬양인도자 학교’쪽에서 공식 사과를 하고 진화에 나섰고, 결국에는 “다른 종교 시설에 가서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는데 우리도 당황스럽다”라며 “이미 봉은사에 연락해서 사과를 했고, 봉은사 땅밟기를 했던 분들도 함께 봉은사를 직접 찾아 사과했다.”

이제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들에 대한 입장을 표현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모든 종교를 무시해야 하고, 우상숭배에 대한 호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의 문제에 진실하게 답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1.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논의는 쉬운 질문 그러나 쉽지 않은 대답이다. (1) 사회 공동체는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 문화가 종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2.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이 있다. (1) 첫 번째 입장은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고, 따라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거나 위대하지 않다고 믿는다. (2) 두 번째 입장은 모든 종교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입장이다. 그들의 관점, 진리에 대한 그들의 주장, 그들이 믿는 교리들과 이야기들은 서로 공통된 것이다. 종교의 본질을 주장하는 사람은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이다. 그는 알곡에서 가라지를 털어내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3)세 번째 입장은 자기 종교만이 절대적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경향은 보수주의적 신앙 전통의 종교인들 속에 나타난 유형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며, 기독교만이 혹은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 외에 다른 종교는 비진리다.

3.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견해들을 살펴보자. (1) 파니카의 종교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첫째, 종교 간의 대화의 조건으로서 변증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이라고 못 박고 그것을 변호한다면 대화에 이르지 못하고 싸움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 간의 대화는 개종이라는 도전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신앙은 열광주의도 아니고 이미 모든 해답을 다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에 겸허하고 그것에 따라서 개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셋째, 종교 간의 만남은 세계를 향한 사랑에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종교 간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어야 한다.

(2)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의 견해는 첫째로, 그리스도 중심에서 출발하지 말고, 신 중심에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 라너가 표현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비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둘째, 힉은 예수를 배타적 계시(totum Dei)가 아니라 신성의 최고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도록 요청한다. 말하자면, 모든 종교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이 그리스도는 신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많은 이름들(예수, 모하멧 부다,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힉의 다원주의는 자아 중심에서 실재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은 이미 정의된 신이고, 따라서 제한 신 실재를 가지고 있다. 힉이 추구하는 것은 아직 창조되지 않은 신을 향해 가야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힉은 틸리히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넘어선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3) 폴 니터도 다원주의의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첫째, 종교 간의 대화의 조건으로서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종교의 궁극적 실천은 사랑이다. 선한 행위가 사랑인데, 기독교는 사랑, 불교는 자비, 힌두교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둘째, 니터의 다원주의에서 종교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화가 서로 필요하다고 보는데, (a) 대화는 인격적인 종교경험과 확고한 진리주장에 기초해야 한다. (b) 대화는 모든 종교 안에 가능한 진리 인식에 기초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생각에 경청해야 한다. (c) 대화는 참된 변화, 즉 전환의 가능성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셋째, 나터의 다원주의는 지구신학의 필요성을 궁극적으로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종교의 책임은 지금의 지구를 보존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관심을 갖는 지구신학의 과제는 (a) 신체적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에 있고, (b) 사회-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c) 핵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으며, 그리고 (d) 생태계적 재난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종교는 이 지구라는 공동체를 보호할 막중한 책무를 가지고 있고, 종교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바로 이런 실천적인 문제에서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존 B. 캅의 다원주의는 과정 철학적 구조에서 논의의 출발점을 삼는다.

첫째, 그의 다원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에서 출발한다. 캅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의 문제에서 다른 전통들을 만나는 것이 생산적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종교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이것은 그가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이유다. 예수는 역사적이고, 그리스도는 초대교회의 예배의 대상이다. 불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처는 역사적이고, 아미타는 그리스도와 같은 예배의 대상으로 구분한다.

둘째, 그의 다원주의는 진리의 절대성보다는 경험의 다양한 구조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의 다원주의는 대화를 개방하는데 있다. 대화란 상대방을 강압적으로 설득하거나 포기하게 하는 선교의 열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전통들을 이해하고 또한 그것을 넘어서 그들로부터 베우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화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대화의 방식을 그는 유월의 방식(pass over)이라고 부른다.

유월의 방식은 “다른 문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교에로 넘어가는 방식”을 말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문화, 삶의 방식 및 종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지고 돌아오는 일종의 회향의 과정이다.” 넷째, 캅의 다원주의 방식에서 확고한 진리에 근거된 사람만이 대화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종교 간의 대화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진리에 경험을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 실재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종교 간의 대화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점에서 캅은 기독교 본질로서의 그리스도의 궁극성이 없는 기독교를 상상할 수 없으며, 따라서 기독교 전통의 독특성을 배제함이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캅이 적절히 지적하듯이, “대화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성육신의 신앙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장기를 떼 내어 상대편에 내어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신념 없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신념”에 근거될 때에 대화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캅의 다원주의는 궁극적인 목적이 배움을 위해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추구하는 다원주의 그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대화를 넘어선 목적은 바로 각 종교 간의 창조적 변혁(creative transformation)에 있는 것이다. 과정 사상은 다원주의 상황에서 변화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종교 전통이나 교리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한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종교로부터 더 풍성해 지는 정체성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캅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문을 여는 데서 오는 상처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고, 동시에 변화된 대화에서부터 떠나올 때에 참된 대화에 임할 수 있게 된다.” 4. 종교다원주의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의 이웃의 범주 속에 다른 종교인들도 포함하여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종교인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둘째, 대화의 내용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문제가 있다. 우리 주변의 환경에서 대화의 필요를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생태계 문제, 핵의 문제, 등 지구 환경의 필요에 의해서 대화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셋째,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는 자신의 종교의 절대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누구나 수긍이 가는 대안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와 미래의 세계를 위한 협력적 관계는 아닐까 싶다.

문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타종교인들도 우리의 이웃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웃의 범주에 대한 고민이 강의 시간에 활발한 논의를 했으면 합니다...


나가면서: 기독교 변증학의 미래

기독교 밖의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오류들에 대한 비판들로서 신의 존재, 기독교 신앙에서 이성이 억압된 상황, 악과 고통의 현실성, 과학의 사유는 신앙을 배제하는 문제, 기적의 문제, 종교의 다원성 등을 언급했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그들의 주장에서 갖는 문제점들을 지적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이 과목을 마치면서 우리는 몇 가지 물음들과 마주한다.

첫째, 변론이 최상의 공격이 될 수 있는가.

둘째, 첫 번째 물음과 연관하여 그 같은 변론이 그들을 설득하는 최상의 방식인가.

셋째, 기독교 변증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에 맞서는 것을 전략으로 설정해야 하는가.

넷째, 기독교 변증이란 기독교의 내적 공동체를 보호하는 전략이 아닌가.

다섯째,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여야 하는가.

여섯째, 기독교 변증은 합리적인 신앙의 가능성을 제공하는가.

일곱째,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얼 말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1. 끝나지 않은 논쟁: 변증적 방식과 비변증적 방식

여전히 기독교 전통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위한 방식으로서 두 가지 방식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체계-내-진리'로서 공동체 안에서의 진리성을 그대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방식이다. 전자는 복음주의적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의 방식이고, 반면에 후자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자들(postliberal theologians)의 방식이다. 윌리엄 플레이커(William Placher)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너티는 진리의 토대를 보편성의 원리에 따라서 해석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meta-narrative)이 아니라 지엽적 이야기에 의해서 특징짓는다는 것이다. 보편타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이유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는 비변증적 시대로 규정된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왔다. 그것은 진리의 토대와 근거였다. 하지만 플레이커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도전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포스트모더너티는 어떤 토대(foundation)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말해야 하고, 그들의 주장들을 위한 철학적 토대를 찾고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티는 보편적 이론을 가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우리의 주장들은 반드시 다른 철학적 근거에 의존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자신들의 세계관에 충실해야만 하며, 만일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지적인 고립을 의미한다고 해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장들이 반드시 지적고립으로 인도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한스 프라이와 조지 린드벡의 예일학파의 이야기 신학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참고: 신학을 계속 공부하려고 하는 학생들은 수정주의 신학과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William Placher, ������비변증론적 신학������, 정승태 옮김 (서울: 은성출판사, 2003), 1장을 참조하라).

비변증론적 방식은 (1) 계몽주의 기획이 실패했다는 가정: (2) 학문이나 이론의 토대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불신: (3) 포스트모던 문화의 차이성과 다양성의 수용: (4) 문화와 세계관의 해석적 상황: (5) 성경의 텍스트내재성. 간단히 요약하자면, 진리는 단지 진리라는 이유만으로 거짓을 부정하는 힘을 갖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상황은 이러한 생각을 뒤집는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비변증론적 방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근거 없는 감상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이다.

2. 기독교 변증학의 미래

기독교 변증학의 미래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아마도 추측하기에는 기독교 변증학은 증명의 부담에서 삶의 질적 가치를 증대하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이성적 논의, 합리적 신앙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주제들이다. 그들의 논의와 우리의 삶과 분리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힘이 상실될지 모른다. 만일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오래 동안 증명의 부담에서 과학적 방식에 근거된 입증과 증명을 원칙으로 하는 것에만 메이지 말고, 보다 넓은 삶의 테두리에서 생활하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 변증은 어쩌면 나를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변증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위함이다. 외부의 어떠한 것에 내 자신을 보호하고 확고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는 행복하고 삶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진리로 승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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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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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스더 | 작성시간 12.12.11 기독네티즌님, 이 글을 어떤 의도로 올리신 건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글이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서요^^
  • 답댓글 작성자기독네티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11 에스더님~ 본 게시판 이름이 [예수님과 종교다원주의] 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록한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에스더 | 작성시간 12.12.11 네~ 어쨌거나 이 글에서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해로운가"에 대한 답은 Yes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런 식의 접근(질문) 자체가 기독교의 핵심적인 문제 등과 관련해 답을 얻기에는 한참 비껴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2.12.11 예수님을 부처나 , 마호멧과 동일한 위치에 두고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인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믿는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나 기독인 행세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기독네티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12 그렇습니다. 그래서 헛되이 믿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믿고, 믿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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