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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무신론

무신론자의 유명한 거짓말,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13.08.16|조회수703 목록 댓글 1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주저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 1841)에서 “하나님이란 개념은 인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경험에서 나온 오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는 초월적 존재를 상상해서 현실에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엉터리로 객관화시켰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실제로 그 경험 이상의 실체를 찾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 정신의 희망사항을 인격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꿈과 욕망을 채워줄 대상을 찾고 만들어 낸다. 포이에르바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는 영생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야말로 종교의 기원이자 핵심이며 결론이다.”

 

인간의 희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은 우리의 착각 속에 사는 존재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실제로 깊이 자리한 자신의 희망과 공포감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이들에게 숨을 곳을 제공하는 환상의 세계 같은 곳이다.

 

이러한 접근은 마르크스의 글을 통해 보다 반기독교적으로 발전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사상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주의할 내용 몇 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포이에르바하가 저작 활동을 하던 시기는 바로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36-1834)의 최전성기와 겹친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인간의 경험에 대한 분석, 주로 ‘의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신자의 경건한 종교적 체험만이 하나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를 통해 신학은 인류학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말았다.

 

포이에르바하의 분석은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 중에 하나였으며, 이후 서구 자유주의적 기독교에 계속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이러한 생각의 실제 결과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서 나온 결과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경험이 우리의 본질적 문제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포이에르바하의 비판은 인간 중심적 기독교 이해에는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보다 진짜에 가까운 복음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인간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의 관점은 기독교가 우리의 경험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성경적 인식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기독교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구원케 하는 심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20세기에 들어와 기독교가 우리 안의 종교적 경험보다 우리 밖의 하나님 말씀에 대해 다시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환영할 만한 진전이다. 이러한 진전의 대표적인 예는 서양 신학 전통 안에서 슐라이어마허를 가장 강도 높게 비판했던 바르트의 글에서 나타난다.

 

바르트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실재란 인간의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존재였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다루는 것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 기독교를 경험한다. 이 점에서 포이에르바하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정체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은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그는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는 단순히 인간의 희망을 격려해주는 환상 속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통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내용은 이것과 다르다. 전통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연적 욕구와 기대에 도전하신 분이라고 가르치며,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죄의 실상을 깨닫고 회개할 때만이 구속의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죄의 실상은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소홀히 다루어졌던 내용이다).

 

포이에르바하가 가진 두 번째 문제는 종교를 너무 ‘평준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세계의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는 같기 때문에 ‘무신론적 투영 이론’은 어디나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나 자세한 학문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신과 종교가 인간 욕심의 단순한 투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신과 상관없는 종교, 신을 분명히 부정하는 불교 같은 종교는 어디다 놓고 설명할 수 있을까?

 

셋째로, 포이에르바하의 가정은 단순히 가정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에 대한 치밀한 연구 없이 내려진 실증적 바탕이 부족한 독단에 불과하다. 그의 이론은 증명된 적도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희망은 사상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는 이 욕구의 투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님’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원하는가?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중 학살 수용소의 책임자를 생각해 보자.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이유가 많이 있지 않을까? 무신론이야말로 그의 욕구를 총족시키는 희망의 내용이 아닐까? 포이에르바하의 분석에 따르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무신론도 인간 희망의 투영으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포이에르바하의 분석 논리에 있는 것 같다.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의 핵심에는 하나님은 투영된 갈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말대로라면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희망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포이에르바하의 분석 논리다.

 

이미 한 세기 전에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은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대상이 꼭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항상 맞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존재할 리 없다는 생각은 분명히 틀리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 비판과 무신론의 증거는 불행히도 이런 단순한 논리 – 논리적인 오류 – 에서 나온다.”

 

포이에르바하가 기를 쓰고 무시했던 기독교의 창조론은 문제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면(창 1:26-27) 하나님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 아닐까? 인간이 하나님을 원하는 현상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으며 이를 통해 그와 교통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앨리스터 맥그래스,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리」(서로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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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8.16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적 사상은 마르크스와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잘 알려진 사상들이 자세히 보면 터무니없이 허구적인 논리 위에 세워진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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