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교 신앙과 영성

종교개혁자들도 매주 성만찬식을 행하도록 권면했다

작성자기독네티즌|작성시간12.10.12|조회수87 목록 댓글 1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성찬식이 무엇인가?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성례편: 성찬식의 퇴색된 의미


"The Lord's Supper comes to us like a ring plucked off from Christ's finger, or a bracelet from His arm; or rather like His picture from His breast, delivered to us with such words as these, "As often as you look on this, remember me."
(주님의 최후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따낸 반지처럼 혹은 그분의 팔에 있는 팔지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또는 오히려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큼 자주 나를 기억하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우리에게 배달된 그의 가슴에서 나온 스케치처럼 전해진다.) -Rev. John Flavel (존 플라벨, 미국 장로회 신학자, 1630~1691)-


1.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

처음 3세기 동안,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다고 한다(롬16:5). 그 이유는 로마 안에서의 박해 때문이기도 하고, 가난한 자를 먹이고 선교사들을 후원하기 위해 집의 모든 재물을 서로 통용하던 시대였기에 교회는 외견상 건물을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IVP신약성경배경 주석: 사 18:6-7 참조)

고린도 부유한 후견인 집을 빌렸다고 하는데, 아홉 명 정도 들어가는 크기의 "트리클리니움 Triclinium" 또는 사십 명 정도를 수용할 가구 딸린 큰 방인 "아트리움 atrium"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의 유대인 사회는 비록 다른 이들보다 부유하고 교육도 많이 받은 엘리트 집단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 가난했다.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질책하는 편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편지에서 '분쟁'이라는 말로 질책하는데, 그 단어는 바로 "찢어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가난한 자" 그리고 "부유한 자"로서 나뉜 것을 질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같이 먹고 나누어야 하는데, 세상처럼 신분에 따르는 가치관을 보인다. 이승구 교수는 "이 구절은 교회와 거리상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일찍 와서 먼저 먹고 어떤 사람은 먼 거리에 있어 나중에 오는 상황을 말한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성찬을 준비할 때 각자 집에서 준비해 왔던 것을 보여 준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였고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11:22)라고 따끔하게 혼내면서 너희를 어떻게 그 일로 칭찬할 수 있겠느냐고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라고 축사하고, 떡과 피로 새 언약을 기념(회상)하는 것에 분명한 선을 그어 논하고 있다.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기념이자 회상인 성찬식을 하기 전 중요하게 여기듯 "우리는 성찬을 할 때 반드시 '자기 성찰' 혹은 '자기 점검'(self-examination)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여 나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는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칼빈 역시 "각 사람이 정신을 가다듬고서 자신이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인정하고 있는지에 진정 숙고해 보라는 것이다"라고 고전 11장 28절을 진단하며 우리가 입술로만 고백하고 있는지, 개인의 모습뿐 아니라 주위의 형제들을 돌아보고 있는지 살피는 것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성찬식을 초기 공동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치심'으로 생각하고, 그들처럼 날마다 고마워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을 회상하며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충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고 감사보다는 우리의 부족함과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죄를 지은 두려움이 앞서서는 안 된다. 또 '여호와의 증인'처럼 소수의 사람만이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떼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행동도 가히 기쁜 것인 아니다.

2. 현대인들에게 적용된 성만찬의 퇴색된 의미와 교훈

혹시 이러한 사례는 비단 사단의 전략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고 칼빈은 주장하기도 했다. 사단은 가급적이면 성찬의 진정성을 많이 떨어뜨려 성찬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천주교는 통회(contrition), 자백(Confession), 보속 혹은 만족(Satisfaction), 사죄선언(absolutio)을 시행하고 있지만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한다고 이해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사죄선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수용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로4:25).

우리는 바울의 징계와 훈계를 교훈 삼아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첫째, "매일 스스로 살피는 삶" 가운데 그 분의 사랑을 늘 간직해야 한다. 초기 공동체가 의례적 행사를 넘어 감사했던 마음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 둘째,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찬식을 자주 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피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기 위해 떡을 떼고 서로 사랑하며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정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승구 교수는 성찬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나아지도록 자아성찰하며 은혜의 방도가 되게 한다"고 말하며 또한 "성찬을 매주 정해준 것은 '우리 믿음의 게으름'을 피하려는 의도인데, 우리 모두는 이를 스스로 망각해 버린다"라고 주장한다. 이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칼빈 역시 세례는 평생 한 번으로 족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매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이라고 지적하며, 제네바 교회와 성찬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1년에 4번하던 성찬식을 나중에는 매월 1번씩 하게 한다.

과거 성찬을 자주 집행하라고 권고했던 아나클레투스(Anacletus)는 교회법 제정 전까지는 성만찬을 자주 행하였다. 그러나 교회법으로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을 참여해야 한다고 제정한 후 오히려 이를 악용하여 1년에 단 하루만 시행하는 관례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의지하여 자주 성찬에 참여하여 성도의 교재와 하나됨,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믿음을 강화하고, 감사와 자비를 나누며 단결과 유대를 증진시켜야 함에도, 성찬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믿음의 게으름과 방종"을 낳은 데 칼빈은 통탄했다.

이승구 교수는 "이는 개인이 주체가 되고, 교회는 이를 도와주고 가르쳐야 한다. 어떤 의미로 진정한 성찬식이 열리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예를 들고 있는데, "성찬을 위한 기도"를 자주하는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참고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의 책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선물, 성례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 제자회(Disciples of Christ), 주님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 성공회의 많은 교회들은 매주 성만찬을 한다고 한다. 또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개혁교회(Reformed), 감리교회, 그리고 루터 교회의 예배 전통은 매월 성찬을 1회 행하거나 매주 성만찬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청교도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목회자요, 선교사이자 동시에 신학자이고 철학가이다. 그는 1703년 10월 5일 East Windsor, Connecticut(뉴잉글랜드의 코네티컷 주 이스트 윈조) 에서 청교도 2세로 태어났다. 장인의 교회를 맡게 되었지만 훗날 성도들이 그를 교회에서 내몰았다. 성찬식 문제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행하고, 회심한 세례교인들만의 세례에 참여하게 하고, 성찬식을 자주 행하는 등의 사유로 사임해야 했다.

성찬식이 포함된 예배든 일반 예배든 간에 정상적이라면 예배 자체에 그 어떤 신비로운 효과를 두는 것에 그치지 말고 아니 그것을 바라지 말고, 오히려 개별적 참여보다 공동체적 참여를 더 선호해야 한다. 예배 혹은 성찬식이라는 성례의 진정한 의미와 예수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퇴색시키지 말아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If we show the Lord's death at Communion, we must show the Lord's life in the world. If it is a Eucharist on Sunday, it must prove on Monday that it was also a Sacrament."
(만약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죽음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에 주님의 생명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일요일에 행해지는 성만찬이라면 그것이 또한 성례전이었다는 것을 월요일에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Maltbie Davenport Babcock (몰비 데비포드 뱁컥, 미국 장로교 성직자 및 모럴리스트 작가, 1858~1901)-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기독네티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0.12 " 칼빈 역시 세례(침례)는 평생 한 번으로 족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매주(자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이라고 지적하며.."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