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은 무조건 나쁜 거니까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거나 일체 비판하지 말아야 하나?... '균형 잡힌 방법으로 비판하려면...'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3.06.09조회수50 목록 댓글 0비판은 무조건 나쁜 거니까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거나 일체 비판하지 말아야 하나?... '균형 잡힌 방법으로 비판하려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속담이 있다. 내 몸에서 눈은 아주 중요하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주로 눈을 쳐다본다. 눈에 상대방의 마음 상태가 그대로 담겨 있어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다. 사실 눈에 내 영혼이 담겨 있다. 신학적으로도 내 몸은 내 영혼과 똑같이 생겼다. 내 몸짓이나 눈짓이 곧 내 영혼의 모양 그대로다.
예수님이 비판의 문제를 다루시며 이웃의 코나 입이나 다른 부위가 아니라 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예로 드신 건 왜일까(눅 6:41). 비판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존중하는 문제와 직접 연결되고, 그래서 눈이 예민한 만큼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이 사실만 늘 의식해도 비판으로 생기는 문제의 대부분은 사라질 듯싶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인적인 관계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 비판의 문제로 민감한 갈등이 많다. 그래서 특히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비판을 아예 금지시키는 논리가 우세하다. “비판은 무조건 나쁜 것이니 일체 비판하지 말라. 비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걸로 족하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온전히 성경적인 건 아니다. 건전한 비판이나 판단은 성경도 용인한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면 알고도 모른 체하며 그를 위해 기도만 해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에게 가서 먼저 개인적으로 권고하고, 두세 증인과 공동체 순으로 접촉해 적절하게 비판받고 바로잡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권면하셨다(마 18:15-17). 사도 바울도 자신들의 배만 섬기며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신자들을 미혹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했다(롬 16:17-18). 특정인을 이미 판단했다는 표현도 사용하며(고전 5:3), 바른 복음에 충실치 못한 사람들을 저주했고(갈 1:8), 심지어 어떤 이들을 ‘개들’로 지칭하기도 했다(빌 3:2). 또한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마땅한 비판을 통해 멀리해야 한다고도 권면했다(딛 3:10-11).
비판을 무조건 금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이 세상에 정당한 비판이 없다면, 죄에 대한 깨달음이나 원칙, 윤리적 문제도 사라지고, 도덕적 무관심 속에 선한 삶이라는 개념 자체도 설 자리가 없다. 진리와 오류, 선과 악을 분별하지 않고,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런 의견이나 분별도 없는 맹목적인 숙맥 같은 존재로 살아갈 순 없다. 따라서 중요한 건 비판을 하되 얼마나 신중하게,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비판을 하는가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명령대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그것을 먼저 빼내야 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보다’라는 동사와 ‘깨닫다’라는 동사를 대비시키신다.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눈에 보일 만큼 외형적인 반면 깊이 깨달아야 할 내 눈 속의 들보는 내면적인 것이다. 티는 일시적으로 단시간에 자리한 것이지만 내 눈 속의 들보는 꽤 오래 묵은 것이다.
그래서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백 데나리온, 내 눈 속의 들보는 만 달란트짜리다(마 18:21-35). 이 들보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빼낼 수 있다. 세상의 수많은 지혜자들은 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온갖 티를 갖고 이러쿵저러쿵 현란한 가르침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들보는 오직 하나님만 알려주시고, 친히 빼내주실 수 있다. 그 들보는 내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제거되었다. 예수님은 나의 원죄와 미래에 지을 자범죄까지 이미 다 짊어지셨다.
그렇다고 해서 자범죄에 대한 회개가 더 이상 필요없는 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거라면서 매번 진실한 자백과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요일 1:8-9). 회개는 지(깨달음), 정(후회), 의(결단)의 전인격적인 순종을 통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돌이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해도 이러한 전인적인 회개가 신앙생활 중에도 계속 따르지 않을 경우 나중에는 내 눈 속에 큰 들보가 자리잡는다. 결국 어둠이 내 눈을 멀게 해서 형제를 미워하고 비판하는 삶을 살아도 못 알아차린다(요일 2:11).
신학적으로 보면 이 들보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이 가진 죄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곧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다. 신앙생활 중에도 때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를 통해 이런 이기심의 죄악된 성향을 부지런히 제거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웃과의 관계에서 비판의 문제로 적용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좁히면, 이 들보는 좀더 복잡미묘한 심리적 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기애, 곧 나르시시즘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성향을 말한다. 타인을 비판할 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 나르시시즘의 성향을 발동시킨다.
나르시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영어식 이름인데, ‘나르케’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나르케는 그리스어로 ‘잠’ 또는 ‘무감각’을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자신을 짝사랑한 요정을 자살에 이르게 한 미소년 나르키소스에게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었다고 본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을 ‘자기애성 인격장애’ 또는 ‘공감능력 결핍 인격장애’라고 한다.
근거 없는 비합리적 우월감이 나르시시즘의 가장 큰 특성이다.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봐 늘 불안해한다. 그래서 타인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우월하다는 존재감을 과시하고 확인받으려고 한다. 늘상 칭찬을 구하거나, 타인을 계속 깎아내리고 비판해서 자신을 상대적으로 커보이게 만들려고 애쓴다. 공동체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타인의 처지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타인을 재단하려는 경향이 많다. 자기가 이상한 건데 남들 보고 이상하다는 사람들 중에 나르시시스트가 많다.
나르시시즘은 유전적이라기보다 자랄 때 애정 결핍 등의 환경 요인으로 생긴 수치심과 열등감, 낮은 자존감을 남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적 성향이다. 주위에 보면 비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일수록 실제로 불안감과 염려가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부적합하고 공허하며 불완전하다는 느낌과 열등감에서 자기 의, 교만, 다른 사람에 대한 경멸, 허영, 우월감이라는 보상 심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자존감이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는 과거에 나르시시즘적인 상처가 존재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인 성향으로 얼룩진 마음의 상처, 곧 들보를 빼내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의 겉모습과 과시주의의 배후에는 거절감에 대한 깊은 상처가 있다.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은혜, 즉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우리 각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어느 정도는 다 품고 사는 자아도취적인 나르시시즘이라는 들보를 빼낼 수 있는 유일한 치유의 통로다. 이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진실한 회개의 삶이 필수적이다. 물론 그와 동시에 나에게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그런 성향대로 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외부에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하진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이웃의 눈에 있는 티를 밝히 보고 건강한 방법으로 빼내줄 수 있다(눅 6:42). 건전한 비판과 불건전한 비판주의를 구분해서 균형 잡힌 비판적 분별력도 발휘하게 된다. 예수님은 타인들의 연약함과 죄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식의 자기 의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비판, 그래서 사람을 세우고 회복시키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지 않는 파괴적인 비판을 금하신다.
남의 문제가 보이면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걸 깊이 깨닫고, 내가 비판하는 만큼 나도 동일한 잣대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각오로 비판해야 한다(눅 6:37-38). 남에게 요구하는 것을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내 경험이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비판해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타인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할 때에도 그의 인격이나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끝까지 존중할 줄 안다. 비판에 사용하는 자신의 관점이 오류가 없고 절대적이라고 섣불리 확신하기보다 객관적 확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한 다른 견해에도 계속 열려 있다. 그래서 감정적인 접근이나 성급한 추론을 피하고, 여러 증거들을 균형있게 평가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중시한다.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남의 인정을 바라는 은밀한 욕구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남의 인정을 받으려는 그 마음 자체가 큰 우상일 수 있다. 이를 빨리 알수록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기 용납 가운데서 참된 자유를 누린다.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은 타인에게 권위를 두고 사는 종과 같다. 하나님이 지금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은혜는 제쳐두고 맨날 더 엄한 주인을 모시려고 안달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기 위해 그분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깨뜨리는 죄를 멀리하고 때마다 회개하며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예배자의 삶이 건강하지 못한 온갖 비판의 죄로부터도 나를 확실하게 보호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 안환균, <주만나>(꿈이 있는 미래) 2020년 4월호 바이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