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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영성

홍민기, '최선을 다했는데 열매도 제자도 없는 사역지에서 어떻게 살아요?'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3.10.06|조회수54 목록 댓글 0

최선을 다했는데 열매도 제자도 없는 사역지에서 어떻게 살아요?

 

아프리카에 여러 번 갔다. 그중에 수도에서 차로 8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 간 적이 있다. 지붕과 벽은 있어도 창문이나 문이 있는 집은 거의 없는 가난한 동네였다. 그래도 벽돌 비슷한 것으로 지은 집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이 교회였다. 내가 가본 곳 중에는 아프리카에서도 열악한 편이었다.

 

주일이던 다음날, 선교사님과 교회에 들어갔다. 안은 깜깜하고 틈새로 들어오는 빛만 있었다. 사람들이 휘파람과 높은 소리로 우리를 환영하고 곧 예배가 시작되었다. 예배는 단순했다. 책이나 주보도 없었고 영상이나 음향도 물론 없었다. 북이 하나 있어서 이것을 치며 찬양을 했다.

 

성도 한 사람이 일어나 찬양하면 모두 일어나 그 찬양을 따라 부른다. 그 찬양이 끝나면 또 다른 성도가 일어나 찬양하고 다 같이 일어나 춤을 추며 찬양한다. 대부분 나는 처음 듣는 찬양이었지만 성도들은 다 아는 찬양인 듯 다 같이 잘 불렀다. 그리고 한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아마도 간증인 듯하다. 듣고 모두 환호한다.

 

그리고 나에게 설교를 해달라고 했다. 열심히 설교했다. 통역과 함께 하는 설교는 항상 쉽지 않다. 설교가 끝나고 또 한 분이 일어나 찬양하고 다 같이 찬양을 이어갔다. 그렇게 몇 곡을 부르더니 갑자기 나에게 두 번째 티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고 선교사님이 먼저 이야기도 안 해줬다. ‘뭐지? 잘 할 때까지 하라는 건가?’

 

애타게 다시 강단에 올라가라고 청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설교했다. 그 설교 후에도 또 찬양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어김없이 또 한 번의 티칭을 원했다. 그날 나는 설교를 네 번 했고, 10시쯤 시작한 예배는 5시가 넘어서 끝났다. 선교사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그들은 매일 한 끼밖에 못 먹는다. 옥수수 같은 것을 빻아서 구우면 까칠까칠한 하얀 떡같이 되는데, 이것을 하루에 한 번 먹는다. 그런데 주일에는 그 한 끼를 주님께 드리고 자신들은 그날 한 끼도 먹지 않고 온종일 예배를 드린다. 성도들은 그렇게 교회를 섬겼다. 정말 주님의 날답게 주를 높이며 예배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얼굴. 적어도 그 표정을 나는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의 성도들에게서 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너무 죄송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데, 형편 때문에 누구에게는 해주고 누구에게는 못 해줄 때가 있다. 그런데 더 해준 아이는 더 달라 하고, 덜 해준 아이는 고맙다고 하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나님 아버지는 마음이 어떠실까? 우리같이 많이 받은 사람들은 더 달라, 왜 안 주냐, 이런 식으로 하실 거냐 하나님께 따지는데, 내가 볼 때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 사람들이 감사하고 기뻐하며 “고맙습니다, 할렐루야!” 하고 찬양할 때.

 

그곳에 나를 데려간 선교사는 맨날 후줄근한 셔츠와 반바지 입고 슬리퍼 신고 다닌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사람을 통해서만 사역을 한다. 그런데도 그의 사역은 상상을 초월한다. 번쩍거리는 교회나 학교는 없지만 도시 도시마다 진짜 사역이 있다. 중동 선교사님들을 만났을 때 한 선교사님의 기도를 들으며 운 적이 있다. 그분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희 온 지 20년 됐어요. 열매가 하나도 없어요. 제자가 한 명도 없어요. 하나님, 그래도 저 여기서 하는 게 맞아요? 하나님이 부르셔서 왔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런데 저 어떻게 살아요?“

 

그 기도를 들으며 앞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내가 김과 라면을 들고 찾아간 선교사님들, 2박 3일 돼서 헤어질 때면 이렇게 얘기한다. ”감사합니다. 저도 열심히 할게요.“

 

순회하면서 많은 분을 만났다. 진짜 선교사들,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무도 그분들을 알아주지 않고 그 사역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누가 그 사역이 작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가는 사역자는 세상의 유명세보다 주님의 쉴 만한 물가를 경험한 사람이다. 경제가 어려위지고 지원이 끊기자 원주민들의 동네에 집을 지어 함께 생활하며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내려놓는 결정은 쉴 만한 물가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지역에서 만난 몇 명의 직분자들은 담임목사님이 필요 없는 건축에 집중하고 있다며 비난하며 자신들이 영적으로 메말라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주는 중직을 맡게 되자 태도가 달라졌고 그 교회에 잘 다녔다.

 

이런 모습이 어제오늘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가 규모가 있을수록 직분과 직책으로 사람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명예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성도들도 그 자리에 기뻐한다.

 

이것이 쉴 만한 물가를 경험한 사람들일까? 쉴 만한 물가를 경험하지 않고 그것을 원할 수가 없다. 그저 문맥상의 고백으로는 신앙의 구체적 고백이 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온갖 마음을 빼앗기고 현재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은 종교적 생활을 통해 지탱해온 교회 생활이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영적 삶이 아니다. 사역과 헌신도 예배를 대체할 수 없다. 예배의 임재를 벗어나 열심히 하는 모든 헌신과 사역은 의미 없다.

 

-홍민기,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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