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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영성

원유경, '예배와 기도는 언제나 한 쌍이다... 한 쪽 심장이 뛰지 않으면 다른 하나도 금세 멈춰버린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3.11.10|조회수44 목록 댓글 0

원유경, '예배와 기도는 언제나 한 쌍이다... 한 쪽 심장이 뛰지 않으면 다른 하나도 금세 멈춰버린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렘 5:14).

이 말씀을 통해 미처 꿈꾸지 못했던 부르심이 열리기 시작했다. 삶의 지평이 새롭게 펼쳐지는 듯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과 함께 강력한 내적 음성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궁극적인 부르심이 교회로 향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대안이 교회 위에 있으며, 그분은 교회를 통해 일하시고, 선교 단체는 교회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셨다.

나의 이십 대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실히 알고자 하는 갈망과 몸부림으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청년들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거다. 청년의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여쭈어야 한다. 전능하신 분께 엎드려 있다 보면 인생을 배운다. 그분의 보좌 위에서 우리 삶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 엎드림으로 인생의 내력을 키우고 약속에 대한 응답과 확신으로 내공을 쌓는다.

어느 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바이올린 명강사에게 음악 영재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가 의외의 답을 들었다. 그것은 ‘적기 교육‘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이나 끈질긴 노력 등의 이상적인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적기 교육이야말로 영재에게 필요한 재능과 노력을 현실적으로 앞지를 수 있는 열쇠라는 게 놀라웠다. 그뿐 아니라 아무리 탁월한 재능이 있고 노력을 쏟아도 적절한 시기의 교육을 놓치면 결코 이르기 힘든 단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영혼의 적기 교육‘은 언제 해야 할까? 늦어도 청년의 때에 완성돼야 한다. 이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이는 딱 한 가지 본질만 인식하면 자동으로 갖춰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믿음."

바로 이것이 믿음의 영점 조준이다. 단순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청년은 드물다. 이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께 ‘올인‘(All In)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부를 걸면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어주신다.

계획과 전망이 무효가 되는 순간을 인생에서 얼마나 많이 마주하는지…. 하나님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불현듯 멈춰 서게 하신다. 그리고 나로서는 정말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맡기시곤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 안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몫이다.

그분은 최상의 ‘조건‘을 허락하시는 게 아니라 ‘변화‘를 약속하신다. 우리가 준비된 사람으로 서서 그분이 이루실 무한한 변화를 꿈꾸길 바라신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역이 바로 우리 자신이길 원하신다.

또한 우리를 단지 가능성의 땅에 세우기보다 우리 자체가 그분의 가능성이길 원하신다. 척박하고 황폐하며 무너진 곳을 보수하여 기필코 길을 내고 그곳을 끝내 영적 거주지로 일궈내는 믿음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 가능성의 사람이다.

기도만이 모든 사역의 엔진이다. 그러나 기도했기에 반드시 성공이나 부흥이 따라오길 기대하는 건 신앙의 심각한 함정이다. 기도의 헌신과 부흥의 상관관계는 늘 필연적이지만, 부흥이 기도에 뒤따른다는 기대는 매우 위험하다. 기도는 그저 하나님 앞에 선 영혼의 마땅한 태도이고, 가장 건강한 존재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사역 원칙과 전략을 가르쳐주셨다. 정체기에 느끼는 불안을 다른 사역이나 대체 활동으로 해소하려 하지 말고, 본질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오로지 기도에 집중해라. 대안을 찾지 마라. 대체 활동을 늘리지 마라. 요란한 행사로 시선을 끌지 마라. 얄팍한 전략을 끌어들이지 마라."

눈송이가 하나하나 쌓일 때, 그 하얗고 솜털 같은 것들에서는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수북하게 쌓여 임계점을 넘는 순간, 그 무게를 지탱하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곤 한다.

간절히 기도해도 현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의심과 회의감이 밀려들지만, 그럼에도 기도 쌓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마치 수북이 쌓인 눈이 견고한 무언가를 한순간 무너뜨리듯이 기도도 불가능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숱하게 만난다. 그럴 때 답을 쉽게 쓰지 못하거나 문제 풀이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에 머리가 아프듯이 답이 보이지 않는 삶의 문제 앞에서 영혼은 진통을 겪는다.

하지만 미지의 수학 문제를 풀 때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뉴런이 왕성하게 생성되고 지적 능력이 계발되듯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영혼의 신음을 통해 영적 세포도 활발히 생성되고 영성도 계발된다. 이 문제 풀이 과정은 바로 기도의 씨름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시는 객관식 답안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엎드려 머물러야 한다. 그만큼 하늘이 열리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드러낸다. 어떻게 예배하는지를 보면 어떻게 사는지가 보인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갈망, 사랑의 온도, 집중력, 관계적 친밀함, 전부를 쏟는 충분한 몰입, 이 모든 것이 예배 안에 여실히 드러난다. 적당히 예배하면서 최상의 삶을 기대하지 마라. 예배에 소홀하면서 삶을 자신하지 마라. 그 삶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예배와 기도는 언제나 한 쌍이다. 한 쪽 심장이 뛰지 않으면 다른 하나도 금세 멈춰버린다. 하나의 불꽃이 꺼지면 다른 하나도 금세 사그라든다.

그분을 사랑하고 끝없이 그리워하고 그래서 노래했을 뿐인데, 이 사랑이 위대한 꿈이 되고 마침내 교회가 되었다. 하나님을 위해 꿈꾸는 것은 무력하지 않았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내가 살아가는 일이 되었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임을 느낀다. 나의 사랑하는 교회가 이 시대의 나팔이 되기를 원한다. 이 시대의 등불이 되기를 원한다.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을 임재의 밀도와 기쁨으로 채우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반복된 일상의 한 걸음이라도 이것이 믿음 안에 있으면, 그 시간은 기름부으심 안에서 약속의 성취로 당신을 이끌어갈 것이다. 우리 인생은 현재의 위치가 아닌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로 판가름난다.

훌륭한 농부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정확한 타이밍에 믿음의 결실을 보신다. 그분은 적절한 수확기를 놓치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으시다. 그 결실을 위해선 오직 온전한 신뢰가 무르익어야 했다.

결국 우리의 약함은 자신의 강함을 자신하는 교만에서 오고,
강함은 자신의 약함을 인식하는 겸손에서 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가시는 방법, 누구도 그분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오직 겸손히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만이 인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는 삶은 극단적인 자기 포기와 내려놓음을 강요받는 삶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하나님을 알면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는 삶이다.

- 원유경, <여섯 걸음>(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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