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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멈추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오류?... 성경은 오류가 하나도 없는 책인가?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4.06.10|조회수80 목록 댓글 0

태양이 멈추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오류?... 성경은 오류가 하나도 없는 책인가?

-<성경 무오성 논쟁>(알버트 몰러 외/ 새물결플러스)

성경은 과학 현상을 논술이 아닌 이야기체로 선포한다. 지구가 자전한다고 서술하기보다 사람 입장에서 그냥 해가 뜬다고 표현한다. 그런다 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여러 과학적 현상들에 대한 성경 기록의 신성한 권위가 폄하될 순 없다. 성경이 문자적으로도 분명한 과학적 현상을 언명하는 경우에는 과학주의보다 성경이 우선이다.

1960년대에 나사(NASA)의 과학자들이 행성의 궤도를 연구하다가 하루가 없어진 걸 발견했는데, 그 시점은 BC 1400년 경 여호수아 시대였다는 이야기가 한때 널리 회자되었다. 교회 안팎으로 큰 화제가 되자 나중에 NASA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특정한 때의 시간이 비었다는 것을 계산하기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해명했다. 결국 실종된 하루에 대한 이야기는 뜬소문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알려져 지금은 터무니없는 낭설로 취급받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된 이 사건(수 10:12-14)의 역사성마저 낭설로 취급받아도 좋은가 하는 것이다.

지금은 복음주의 신학자들 중에도 “여호수아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이런 기적 이야기의 역사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알 수도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다. “태양이 중천에 머물렀다”(수 10:13)는 표현부터가 지구의 자전에 무지한 천동설의 고대 세계관이 반영된 시적 표현일 뿐이라고 본다.

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려는 성경 무오성 논쟁도 결국 이런 난제를 비껴갈 수 없다. 복음주의 안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무오성’(inerrancy)과 ‘무류성’(infallibility)의 입장이 대립해왔다. 무오성은 성경에는 신자들의 믿음과 실천뿐만 아니라 역사나 과학 등과 관련된 내용에서도 오류가 없다고 믿는 입장이고, 무류성은 성경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신자들의 믿음과 실천의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입장이다. 창세기 1-2장의 해석을 놓고 벌어지는 최근의 유신진화론 논쟁도 결국 성경 무오성과 무류성 간의 싸움이다.

성경 무오성 논란의 중심, 시카고 성경 무오 선언서

1978년에 북미의 복음주의자들이 시카고에 모여 발표한 ‘시카고 성경 무오 선언서’는 성경 무류성이 아닌 무오성의 입장을 확고하게 천명한 기념비적 문서로 잘 알려져 있다. “전적으로, 그리고 축어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성경은 모든 가르침에서 오류나 실수가 없으며, 개인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서도 오류나 실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행위, 세계사의 사건들, 무엇보다 성경 자체의 문학적 기원에 관해 성경이 진술하는 것에서도 오류나 실수가 없다.”

모두 25항으로 구성된 이 선언서에는 프란시스 쉐퍼, 제임스 패커, 노먼 가이슬러, 제임스 보이스, R. C. 스프라울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서명에 참여했고, 그런 만큼 복음주의 역사에 오랫동안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이 선언서의 내용에 동의하느냐 않느냐로 복음주의자와 비복음주의자, 때로 파당적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짓는 정치적 무기로도 이용되면서 지금까지 성경 무오성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선언서를 공통된 텍스트로 삼아 5명의 현역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성경 무오성 교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서로 논평해준 내용들을 한데 모아 현재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성경 무오성 논쟁의 진상을 그대로 담아냈다.

각 기고자들의 지론을 토대로 신구약 성경에서 대표적인 오류처럼 보이는 난제들, 곧 여리고성의 기적적인 붕괴(수 6:1-21),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 회심 체험과 연관된 주변 사람들의 불일치한 경험(행 9:7, 22:9), 그리고 가나안 족속 진멸을 명령하신 구약의 하나님(신 20:16-17)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마 5:43-48)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을 놓고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하는 접근도 무척 흥미롭다.

성경 무오성에 대한 다섯 가지 복음주의 입장

이 책의 기고자들이 성경의 무오성 문제를 놓고 각각 내세우는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 가운데 무오성과 무류성의 특징을 구분짓게 해주는 내용을 중심으로 인상적인 대목만 먼저 짚어본다.

첫째, 알버트 몰러(남침례 신학교 총장)는 성경 무오성의 근거로 내적 증거(벧후 1:21),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호해왔던 역사, 그리고 성경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 교회의 실질적인 필요를 든다.

그에게 성경의 무오성은 축자영감, 즉 하나님이 성경 원본에 사용된 모든 단어를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요구하고 정의한다. 이러한 무오성에 바탕을 둔 계시 교리야말로 해석학적 허무주의와 형이상학적 반실재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롬 9:17)라는 말씀이 보여주듯 성경이 말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예수님도 친히 성경은 폐할 수 없고(요 10:35),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신다(마 5:18).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기록된 언어 계시이고, 그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며, 그에 대해 증언한다(p.44-63).

둘째, 피터 엔즈(이스턴 대학교)는 이 책에서 성경 무오성 교리에 가장 분명하게 반대하는 해체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그에게 무오성은 어떻게 정의되든지 성경이 행하는 바를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들에 대해 말하지만, 발생하지 않았거나 수 세기에 걸친 전승 과정을 통해 상당 부분 수정되고 변형되었을 수도 있는 사건들도 전달한다. 성경의 행위는 고대 문명 가운데서 발생한 텍스트로서의 시대적 제약을 갖는다. 건전한 지적 추구에 필수적인 비평을 무효화하는 시카고 선언서와 같은 문자주의적 해석학은 창조와 홍수 기사의 역사성을 고찰하기 위해 고대 역사 연구나 과학적 발견, 곧 우주와 지구의 장구한 나이와 태고에 관한 인류의 과학 지식에 호소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p.115-157).

셋째, 호주 신학자인 마이클 버드(퀸즈랜드 대학교)는 미국의 무오성 교리가 미국 바깥의 복음주의를 위해서는 불필요하며 규범적인 교리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는 시카고 성경 무오 선언서로 대변되는 미국의 무오성 교리가 텍스트의 무오성을 설파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해석의 무오성을 답습하는 입장에 불과하다고 본다. 전형적인 성경 무류주의자로서 무오성보다 ‘진실성’ 또는 ‘신적 진실성’이 더 적합한 용어라고 보는 그는 성경의 진실성은 표면상의 불일치나 모순들의 조화에 달려 있지 않은 만큼 무엇보다 기독론이 성경의 통일성과 일관성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신자들의 삶을 구성하고 주된 교리를 제공하는 면에서 성경은 조금도 오류나 모순이 없다고 강조한다(p.206-219).

넷째, 케빈 벤후저(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게 무오성은 성경의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다만 ‘진리는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믿음의 확신을 표현한다.

그래서 무오성의 목적은 성경의 난제들에 직면한 독자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에게 성경이 무오하다는 말은 성경 저자들이 그들이 확언하는 모든 것에서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올바른 독자들이 제대로 읽을 때) 결국 그들이 참되게 말했다는 것이 드러나리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저자가 제안하는 명제가 무엇인지(문자적 의미), 그 명제에 어떤 종류의 관심이 요구되는지(문학적 감수성)를 제대로 이해하는 문해에 정통한 해석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각각의 의사전달 행위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바른 마음과 심장(성령으로부터 주어진 문해력)을 지닌 독자가 되어야 한다(p.282-328).

다섯째, 존 프랭키(옐로스톤 신학교)는 성경의 영감과 증거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말과 언어라는 피조된 통로를 사용하셨다고 해서 성경이 신성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인성처럼 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로서 그것의 적절성을 위태롭게 하는 일 없이, 피조물의 속성에 내재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제약과 상황에 여전히 영향을 받는다. 무오성은 성경에 적용되는 신학적 범주이지만, 그 성경은 텍스트가 발생한 특정한 문맥적 어휘들의 유한한 한계 안에 있다. 교회의 궁극적 권위는 성경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 현재의 다양한 환경 속에 사는 독자에게 말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는 사건 자체, 즉 하나님의 임재다. 신적 경륜 안에서 성경은 언제나 목적이 아니라 사건의 과정에서 수단이다(p.373-398).

태양이 멈춘 이야기, 얼마나 신빙성 있나?

각 기고자의 주장들이 워낙 치밀하고 함축적이어서 약간 난삽한 듯한 느낌마저 주는 이 책에서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는 최대 쟁점은 결국 무오성이냐, 무류성이냐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서두에 소개한 여호수아 10장의 기적 이야기에 담긴 성경 무오성에 대한 함의가 이 쟁점을 풀어나가는 데 일말의 유의미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본다.

무류주의자들은 이 기적 사건의 역사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천체의 운행 질서에 묶인 지구가 어떻게 저 홀로 멈출 수 있는가에 대한 과학적, 합리적 의심 탓이다. 이런 태도는 이 책에서 창세기 6장에 있는 노아 홍수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브라이언 맥라렌에게 이르러서는 심각하게도 왜곡된 신론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유례 없는 대량 학살로 이끈 의도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재앙을 명하신 하나님은 믿을 가치가 없으며 경배할 가치는 더더욱 없다”(p.78).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거짓 없는 역사성이 기본적인 배경이어서다. 역사라는 시공간에 펼쳐진 사건들에는 과학적 검증이 따르기 마련이다.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과학적 검증이 어려운 경우 기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가 인정될 경우 그가 허용하시는 기적은 과학보다 항상 더 크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속 1600킬로미터, 공전 속도는 시속 10만 7천킬로미터다.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가 갑자기 멈추게 될 경우 원심력과 중력의 변화로 땅 위의 사람들이 공중에 붕 떠버리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태양이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게 아니다.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수 10:13)고 말한다. 지구가 아주 천천히 돌아가게 하면서 운동하던 물체가 급정거할 때 생길 만한 관성의 법칙에 따른 충격을 최대한 완화시키셨을 것이다.

하나님께는 큰 기적은 어렵고 작은 기적은 쉽다는 경우가 따로 없다. 하나님은 정교한 과학의 법칙들을 친히 다 만든 분이셔서 그 과학 아래 있지 않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존재하시며 임의로 행하실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현재까지 발달해온 과학이라면 그 기준 자체가 이미 완전하지 않다.

이 책의 기고자들도 여리고성 붕괴 사건을 놓고, 고고학 자료와 성경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말하는 부분이 서로 상충하는 경우 성경의 무오성을 어떻게 고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성경의 우선성을 중시한다. “신앙이나 심지어 불신앙을 고고학 기록과 서로 연결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기록들은 계속해서 학문적 수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마이클 버드, p.232). “고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지의 여부를 단언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발굴한 증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하기도 한다. 요약하면 증거는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케빈 벤후저, p.315).

무오성과 무류성, 어떤 관계인가?

과학적으로 불충분한 증거를 가졌다는 것이 반드시 증거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하진 않는다. 성경은 태양이 멈춘 기적 사건의 특별한 역사성을 강조하려고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수 10:13)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은 이사야서(사 28:21)와 하박국서에 다시 언급된다. “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합 3:11).

성경이 믿음과 실천에 있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할 만한 내용을 가진 책이라면, 그 역사적 배경이 되는 여러 기적적인 사건들을 포함하는 역사나 과학의 문제에서도 신뢰할 만해야 한다.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세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경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노아 홍수의 역사성을 전제한다(마 24:37-39).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안겨주시면서 가나안 족속이 신으로 섬긴 해와 달에 대한 우상숭배의 죄를 드러내신 영적 교훈에는 해와 달을 멈추신 기적 사건의 역사성이 전제된다.

하나님은 안식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주시려고 친히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 20:11)고 말씀하셨다. 6일 창조든 출애굽의 홍해 기적이든 여리고성 붕괴든 과학적인 근거가 아무리 미심쩍어 보이는 사건이라 해도 그 모든 역사는 기독교적 믿음과 실천의 문제와 곧바로 연결된다. 무오성이 전제되지 않고는 실은 무류성도 설 자리가 없다.

“만일 성경에서 진리와 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가 당혹스러워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본에 오류가 있거나, 번역자가 그 의미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거나 혹은 나 자신이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어거스틴, p.329). “무오성이란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에 관한 그리스도와 사도의 가르침에 수반되는 믿음의 항목으로서 유지되어야 한다”(제임스 패커, p.284).


-더 깊은 탐구를 위한 연관 질문

1. 성경은 신자들의 믿음과 실천뿐만 아니라 역사나 과학 등과 관련된 내용에서도 오류가 없다고 믿는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제약이 성경의 무오성 교리에 부정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2. 신자들의 믿음과 실천에 관한 성경의 진실한 교훈은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 또한 진실하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한가? 역사적 사건의 사실성이 미비하다고 해도 신자들의 삶에 대한 영적 교훈을 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을까?

-더 깊은 탐구를 위한 관련 도서

<IVP 성경난제 주석>(월터 카이저 외, IVP)

성경은 고대의 특정 문화 속에서 특정한 언어로 기록되어 사상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해하기 쉬운 구절들이 있는데, 이러한 난해 구절들에 대해 원어의 의미와 본문의 문맥, 사회적 · 역사적 배경 등을 고려하여 성경 전체의 의미와 조화를 이루도록 이해하기 쉽게 해설해놓은 책.

“점술과 신탁, 초연한 예언 등의 이야기가 이교 나라들의 역사에 풍성하지만,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 경전의 예언은 세계사와 구속을 아우르는 지속적인 신의 계획에서 거의 아무 부분도 차지하지 못한다. 단지 특별한 궁금증을 만족시키는 호기심거리나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곤경에 처한 군대 혹은 정치 지도자의 모의를 돕는 정도다. 전지구적이고 우주적이며 구원사적인 연결은 전무하다”(p.60).

<하나님에 관한 불변의 진리>(조쉬 맥도웰 · 션 맥도웰, 두란노)

절대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의 창조와 성육신, 재창조에 대한 기독교의 12가지 불변의 진리로 변증해낸 책.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 원죄, 성육신, 대속, 이신칭의, 변화된 삶, 부활, 삼위일체, 하나님 나라와 교회, 재림에 대해 다루었다.

“역사적 문서의 신빙성을 평가하기 위한 흔한 기준 중 하나는 다른 문서들이 해당 문서의 내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느냐 부인하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성경은 가장 널리 참조되고 인용된 책이다. 예를 들어, 신약만 해도 다른 고대 문서들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인용되었는지 그 문서들만으로도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27권 전체를 다시 짜깁기할 수 있을 정도다”(p.121).

- 안환균,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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