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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어느 날 들려주신 주의 음성... '얘, 교회가 타락하면 받는 구원만을 말하지 이루는 구원은 말하지 않는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4.11.08|조회수30 목록 댓글 0

어느 날 들려주신 주의 음성... '얘, 교회가 타락하면 받는 구원만을 말하지 이루는 구원은 말하지 않는다'

이루는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일전에 미국에서 집회를 할 때에 호텔방에서 어느 날 잠에서 깨는데 작고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얘, 교회가 타락하면 받는 구원만을 말하지 이루는 구원은 말하지 않는다.”

“......”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의 의만을 말하고 하나님 나라는 말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이 사실은 하나란다.”

처음에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이 문제를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언젠가 미국에서 집회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젊은 권사님이 급히 찾아왔다고 해서 만나보니 한 번 받은 구원은 다시 잃어버리지 않는 거라는 확인만을 하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모습을 보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든 죽어서 천국에만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교회가 받는 구원만을 말하여 죽어서 천국 가면 된다는 것만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의만을 말하여 어떤 죄를 지었어도 용서만 받으면 된다는 그 이상의 진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물인 것이다.

왜 교회가 받는 구원만을 말하고 이루는 구원은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의 지식은 있으나 그 믿음은 사는 믿음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지만 그 말씀으로 사는 것은 본을 보이지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죄를 짓고 때마다 죄를 용서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이 허다하게 많다.

내가 직장에 들어가서 내가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실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가 믿는 예수를 자랑하고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중에 어떤 이들은 이런 말로 나를 곤란하게 하였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직장에 와서 죄를 짓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그 죄를 용서받고 또 직장에 나와서 죄를 짓고 그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예수는 안 믿겠소.”

나는 생활이 변하고 인격이 변한 것을 말하였지만, 내가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은 죄를 용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죄인의 고장 난 인격이 고쳐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 율법주의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던 한국교회는 교인들에게 일상의 생활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의 생활인 것을 가르쳐주지 못하였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의만을 말한다. 그 하나님의 의로 자기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죄를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교인들을 옥죄는 것이다. 그들이 율법으로 자기들의 죄를 보았으면 구원을 받았을 텐데, 그들은 율법으로 자기들을 옳다고 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교만으로 그 율법을 가지고 남의 죄를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인 율법의 의를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대적인 의로 변질시킨 것이 바리새인들의 오류인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가 진리를 상실하면 하나님의 의를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시킨다. 교인들끼리 행위로 경쟁하고 교인들끼리 비교하여 서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귀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외식함으로 자기들이 상대적인 의인임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지 사실은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인 것이다. 율법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이다. 율법 앞에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죄인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죄만을 용서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지옥 불길만을 겨우 면한 것도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진 것이다. 상태가 바뀐 것이 아니라 신분이 바뀐 것이다.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요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신분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상태는 생활을 살 수 없어도 신분은 생활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변화된 신분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다. 일거수일투족,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성령의 다스림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용서받은 죄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자기의 인격이 고침을 받아 다시는 그 죄가 나오지 않는 거룩한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인격이 고쳐지는 생활,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거룩해지는 생활이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 나라의 생활이요 그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살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하는 곳 이상도 이하도 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 생활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세세무궁토록 왕 노릇을 하시는 것이다.

받는 구원과 이루는 구원은 같은 말이다. 받는 구원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죄 사함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이다. 구원이라는 말은 어떠한 상태로부터의 건짐을 말한다. 이전에 죄에 빠졌던 우리를 건져주신 것이 구원이다. 저주의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심판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구원이다.

구원해주셨는데 다시 이전의 상태로 빠지는 것은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정죄의식과 심판의 두려움과 형통하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하는 저주의식에 빠지고 죄를 거듭해서 짓는 패배의식에 빠지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죄의 모든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건져주신 주님의 뜻에 반하는 일로서 주님의 아픔이 되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었는데 무의식중에나 또는 의식적으로 다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면 건져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 것일까? 그래서 혹시 생명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로 인한 안타까움과 아픔은 얼마나 더할 것인가? 건짐을 받았으면 당당하고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그와 같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구원을 사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이른바 사는 구원이요 구원을 사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이루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받은 바 구원을 실행하는 것이요 받은 바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가지고 사는 곳이 세상이요, 그 세상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세속적이고도 육적인 환경과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육신의 습성들, 우리를 강력하게 옭아매는 세상적인 가치관들, 그리고 우리에게 치명타를 안겨줄 수 있는 마귀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구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고도 생활은 육신을 가지고 사는 생활을 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인격과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일은 두렵고 떨림으로만 이룰 수 있는 일이지 평상심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생활이 구원의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복종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이루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항상 순종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생활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려 주시는 구원을 이루는 생활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아니고는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사는, 구원을 이루는 생활을 살 수가 없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 곧 하나님과 함께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시고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사모하여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가?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간절하고 핍절함으로 사모하는 자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다.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날마다의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생활이다. 그로 인하여 죄 용서만 받는 천박한 종교인의 생활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격이 고쳐지고 생활이 고침을 받아서 세상의 소금과 같이, 세상의 빛과 같이 사는 것,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보이는 착한 행실,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그 인격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아보고 그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지만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 신앙고백을 따라서 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인격으로 변화되고 받은 바 구원으로 사는 생활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받은 구원만을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빠진 채 죄를 용서받게 해준 하나님의 의만을 말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인격도 생활도 안 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따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면서 이어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순복하고 순종하는 것밖에는 없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창궐하는 이유는 교회가 지식만을 가르치고, 실제로 살 수 없는 말씀만을 전하기 때문이다. 받는 구원만을 말하고 하나님의 의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생활이 없고 말과 지식만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지식으로 풀어서 거짓말로 교인들을 호리는 것은 거짓선지자들이 더 잘 하고 그 일은 마귀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살고 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헛된 지식에나 거짓된 말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교회가 소생하고 강건해지고 거룩한 부흥을 주님의 은혜로 받기 위해서는 이루는 구원 곧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사는 일에 눈을 떠야만 한다.

- 무명의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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