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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작성자Stephan|작성시간13.01.19|조회수6,336 목록 댓글 6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아담에서 다윗까지, 천지창조에서 세상에 새 생명을 주고, 신적 통치가 땅 끝까지 확대될 성전 건축까지, 족보와 땅, 왕조와 통치는 ‘타나크’(개별 책들을 무작위로 연결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구조와 분명한 시작과 중간 부분과 결말이 있는 하나의 큰 책)의 이야기이며, 다윗의 집에서 누군가 나와 만물의 회복을 가져올 집을 세우기를 기다리면서 여전히 일종의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다.

 

주석과 함께 줄거리로 제시되는 이 전체 메시지는 ‘타나크’가 잡동사니가 아닌 한 권의 책임을 보여준다. 확실히 ‘타나크’는 많은 개별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본문들은 더 큰 본문의 일부다. 많은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윗 왕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잃어버린 통치를 회복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며, 그 이야기는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야기, 주석, 이야기’ 흐름이 신구약의 공통 구조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구조적 특징 중 하나는 모형론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쓰여졌고, 이 지면에서 모형론에 대해 상세히 다 다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모형론이 사라지게 된 한 가지 확실한 요인은 성경 본문을 포괄적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Frie 1974).

 

모형론적 특징들은 성경 본문을 하나의 큰 본문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왕조와 통치의 쌍둥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특별히 더 분명해진다. 각각의 경우 보편적인 것에서 특정한 것과 특정한 것에서 다시 보편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지만 그 과업에 실패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는 이스라엘로 대체된다. 한 부족이 이스라엘 내에서, 한 가정이 그 부족에서 선택되고, 결국 한 개인 다윗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다윗과 그의 아들들의 실패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통치의 유익을 가져올 한 의로운 다윗 계열의 왕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통치는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 시작하고, 그런 다음, 가나안 땅이 초점이 되며, 그런 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 특정 장소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과 열방, 심지어 땅 끝까지 확대된다. 공간 및 시간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는 모래시계 이미지가 이런 발전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류와 우주, 이스라엘과 가나안, 다윗과 시온이 구약의 시공간 줄거리라면, 다시 신약에 와서 새로운 다윗인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과 가나안, 인류와 우주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그림이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복음서, 사도행전), 주석(서신서), 이야기(요한계시록)로 된 신약이 구조적으로 ‘타나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록 마지막 책은 엄격히 말해 이야기가 아니지만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에서 시작된 줄거리를 결론까지 가져간다.

 

신약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포함하는 계보로 시작한다(마 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신약은 ‘타나크’의 시작과 결말을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시킨다. 창세기와 역대기에서 아담, 아브라함,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다윗의 조상들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며, 각각 열네 대로 이루어진 균등한 세 시대, 즉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바벨론에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마 1:1-17)가 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숫자 ‘14’는 다윗을 강조하는데, ‘14’는 다윗의 히브리 이름의 숫자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포로생활에 종결을 가져올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인 새로운 다윗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생은 이방인들에게 빛을 가져다준다.

 

마태복음 2장 2절은 동방에서 떠오른 한 별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민 24:17). 따라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새 아담과 새 이스라엘로서 예수님은 옛 아담과 옛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한다(마 4:1-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에게 승리하고, 언젠가 온 땅이 영토가 될 하나님 왕국을 알린다. 그리고 이것은 고난받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높임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뿐 아니라 온 세계의 권세를 부여받는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서 강조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영토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한다(참조, 마 28:18-20; 단 7:13-14).

 

 

 

 

 

하늘에 닿으려는 바벨탑은 성령을 기다리는 오순절로

 

각 복음서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다윗의 집의 두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조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이 오랫동안 고대해 온 후손으로서, 부활을 통해 다윗의 왕좌에 앉는 다윗의 후손이다(눅 1:32; 행 2:30-35).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한나의 예언적인 노래의 성취를 반영하는 이중창을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성전으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화되고 예수님에게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샘솟는 강이 흘러나온다(참조, 요 2:19-22, 7:37-39; 겔 47:1-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교회는 탑으로 땅과 하늘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교만에 의해서가 아닌 생명의 강수인 성령의 은사를 겸손하게 기다림으로써 먼저 형성된다. 그리하여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뒤집어놓고, 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열방 가운데서 잃어버린 조화를 가져올 것임을 보여준다(행 2:1-21; 창 11:1-9).

 

다윗 왕조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점점 더 많은 제자들의 무리가 유대에서 땅 끝까지 퍼져 나간다(행 1:8). 새 다윗에게서 새로운 ‘토라’를 배운 예수님을 믿는 무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마 5:14)가 되어,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자신들의 선한 행위의 빛을 열방에 비추게 된다(21-48절).

 

‘타나크’의 중반부에서 이야기 줄거리는 주석을 제공하기 위해 잠시 중지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약속하는 바벨론에서의 유다 왕의 방면이 마지막 역사적 언급이었다(왕하 25:27-30).

 

마찬가지로 신약의 중반부에서 줄거리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이라는 주석에 의해 중단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바벨론(로마)에서 다윗 계열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급진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허락받은 포로에 대한 마지막 역사적인 언급이다(행 28:30).

 

이 이야기 줄거리에 대한 바울의 주석은 모든 열방으로 구성된 초기 교회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며, 단지 한 나라가 아닌 전 세계가 교회의 기업이라는 것이다(롬 4:13). 시내 산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원하기에는 힘이 없었지만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할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필요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불순종한 자들을 위해 나무에 달리는 선고를 받는 순종적인 아들이다(참조, 갈 3:10-14; 단 21:18-23). 모든 열방과 민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뱀을 정복하는 최후의 싸움이 이어진다(갈 3:28-29; 롬 16:20).

 

신약 끝 부분에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역사’가 다니엘서와 같은 방식으로 재개되는데, 요한계시록은 그 메시지에서 하나의 놀라운 파노라마적인 환상 속에서 ‘타나크’의 광대한 만화경 같은 마지막 날에 대한 환상들을 포착해낸다.

 

인자가 있으며(계 1:13; 단 7:13), 인자의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는데(계 1:13) 인자는 촛대 사이에 있는 분(계 1:13; 슥 4장),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 창 49:9-10), 다윗의 뿌리다. 보좌에 앉으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이 메시아이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 포로 생활과 심판의 끝을 강조한 70주간은 새로운 세상 질서의 탄생에 필요한 과도기인 세 번의 칠중 재난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상 질서는 모든 기대를 초월하는 질서다. 새로운 세상은 에덴동산의 이미지들을 반영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할 만큼 형언할 수 없다. ‘타나크’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성전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과 성도들이다(참조, 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이 생명나무들은 지속적으로 잎이 푸르고 그 잎들은 만국을 치료한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소가 되었다(참조, 렘 3:16-17).

 

그 결과 인간들은 마침내 그들이 잃었던 왕적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이마에 새긴 채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계 22:5). “여호와와 여호와의 백성은 함께 있고 한 몸이 된다”(Barth 1958: 315).

 

 

-스티븐 뎀프스터(캐나다 애틀랜틱 침례대학교의 스튜어트 머리 종교학 교수),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부흥과개혁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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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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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1.19 야곱처럼 허물많은 인간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볼수 있는 건국신화에서 주인공들은 완벽한 인간형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지어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지어냈다면 야곱처럼 문제가 많고 허물많은 인간을 이스라엘로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성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군상들이 하나님을 만나 온전해 지고 구원받는 삶들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부터 성서 끝의 내용까지 하나님의 구원사에 관한 일관된 내용들입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무엇하러 보이지도 않는 신의 구원을 이토록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을까 생각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1.19 예수님의 이야기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구원을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같이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자가 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처형의 두려움을 가지고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인류사랑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인간상은 어떤 인간도 지어내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로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볼 수가 없습니다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기독네티즌 | 작성시간 13.01.19 요즘 저희 교회(모임)에서는 성경개요를 공부하는 중입니다. 성경(구약+신약)을 바르게 연구해야 합니다.
  • 작성자정반합 | 작성시간 13.07.22 안타깝습니다. 내용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 작성자가슴 깊은 사랑 | 작성시간 14.06.07 구약과 신약의 연결된 부분을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개요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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