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11:28~30 -
인간생활의 가치는 배움에 있다고 본다. 정신 작용으로 배워지는 활동에서 물질계가 화려해질 수 있고, 영적으로 배워지는 생활에서 화려한 세계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 작용으로나 영적으로나 배워지는 생활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조그만 그릇에 담긴 물이 불의 힘으로 끓는 것을 깊이 생각할 때에 배워지는 것으로 오늘날 물과 불의 힘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빨리 다닐 수 있는 세계를 이루었고, 작은 골방에서 책 하나를 들고 배워지는 생활은 정신작용으로 배워진 것보다도 더 빠른 교통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을 영계 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면 주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는 생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말한다.
1.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함 (28)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을 지었다고 본다. 이 짐이라는 것은 지고 싶어서 지는 것이 아니고, 벗고자 해도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이 짐을 지고 가는 자들은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짐 하나를 벗겨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많은 영도자가 있지만 이 짐을 벗겨 줄 자는 오직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왕의 아들로서 옥중 방문을 한 일이 있었다. 옥에 간 왕자는 죄수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이렇게 옥에 와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모든 죄수들은 왕자 앞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인데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죄수 한 사람은 왕자 앞에 공손히 엎드려서 하는 말이 “저는 백 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는데, 이날까지 내 생명이 살아서 있다는 것은 임금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자는 이 죄인에게 말하기를 옳은 사람만 사는 옥중에서 죄인 혼자 있을려니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냐고 하면서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 자유롭게 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 오실 때에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인간들의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겨 주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어서 죄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역사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버린 자는 주님의 멍에를 멜 자격이 있다. 죄 값으로 헛된 수고를 하다가 영원히 멸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사망의 법을 벗어나서 주님의 멍에를 메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2.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심 (29)
주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사람을 향하여서는 항상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다. 택한 사람이 아무리 주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있다 하여도 온유하게 대해 주시는 것은 택한 사람을 바로 깨닫게 하여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요일5:20).
그러므로 사울이 아무리 주님을 핍박하는 사람으로 다메섹을 향하여 갔지만, 주님은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말씀하실 때에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깨닫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바리새교인을 대할 때에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죄인들을 대할 때에는 온유하게 대해 주신 것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죄가 없어도 당신을 대적하는 자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시었고, 알지를 못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대하실 때에 언제나 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대해 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온유와 겸손이 없이 대하신다면 우리는 감히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울 수가 없는 인간들이다. 나는 40년간 신앙 생활에 19세에 교회의 성직을 맡아 가지고 오늘까지 배워진 것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이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일을 하다가 넘어지고 실수가 있을 때에 은혜를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는 그 은혜를 받았으므로 믿는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어도 그 형제에 대하여 조금도 무시할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셨으므로 나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형제의 실수를 보고 혈기를 낸다든지, 무시를 한다든지, 악평을 한다면 이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의 일을 한다 하여도 자기 멍에를 멘 사람이지, 주의 멍에를 메고 나가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소는 쟁기를 쥔 주인의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뿐이다.
이와 같이 주의 멍에를 멘 자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지도하시는 대로 순종할 것뿐이지, 한 사람이라도 주님이 용서하는 자를 멸시하거나 압박하거나 저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멍에를 메었기 때문이다.
3. 쉽고 가벼워짐 (30)
주님께 배우는 생활은 극도로 쉬워지고 가벼워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 주의 멍에는 승리의 멍에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그 멍에는 주님의 승리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이 하등 필요가 없고, 주의 승리의 능력이 오므로써 배워지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둘째 : 주의 멍에는 능력의 멍에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당신이 승리하신 다음에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시는 것은 왕권 받을 인격이 이루어 지도록 역사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는 인격적인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로 말미암아 배워지는 생활이 있게 된다.
셋째 : 주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역사라는 것은 하나도 억지가 없고 불타는 사랑에서 오는 역사이니 그 사랑에 이끌려 가는 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가벼워지는 힘을 얻는 것은 우리 주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사람은 주의 대행자가 되는 것이니 주의 명령에 순종할 것뿐이다.
결 론
주님께서는 택한 자를 배워 주실 적에 쉽고 가볍게 일하도록 배워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능력의 역사가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시므로 배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