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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대하여

박인환 시인

작성자민문자|작성시간19.07.29|조회수111 목록 댓글 0

박인환(1926-1956) 시인 강원도 인제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중퇴(1945).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등단. 195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 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1940년대의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의 모더니즘 운동은  김기림이 제창한 반자연(反自然),

 반서정(反抒情)의 기치에 1940년대 후반의 시대고(苦)가 덧붙여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도시적인 동시에 인생파적인

 비애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기타 동인의 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는 『박인환선시집』(산호장, 1955),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1982)가 있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

 

[1]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2]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3]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시선집>(1955)-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 박인환(1948년)



동양의 오케스트라
가메란의 반주악이 들려온다
오 약소민족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삼백년 동안 너의 자원은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빼앗기고
반면 비참한 희생을 받지 않으면
구라파의 반이나 되는 넓은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메란은 미칠 듯이 울었다


오란다의 58배나 되는 면적에
오란다인은 조금도 갖지 않은 슬픔에
밀시(密柹)처럼 지니고
육천칠십삼만인(六千七十三萬人) 중 한 사람도 빛나는 남십자성은
쳐다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수도 바다비아 상업항 스라바야 고원분지의 중심지
반돈의 시민이여
너희들의 습성이 용서하지 않는


남을 때리지 못하는 것은 회교서 온 것만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붕괴한 다음
오란다의 식민정책 밑에 모든 힘까지도 빼앗긴 것이다


사나이는 일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약한 여자들은 백인 아래 눈물 흘렸다
수많은 혼혈아는 살길을 잃어 애비를 찾았으나
스라바야를 떠나는 상선은
벌써 기적을 울렸다


오란다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사원(寺院)을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인처럼 은행도 세우지 않았다
토인(土人)은 저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축할 여유란 도무지 없었다
오란다인은 옛날처럼 도로를 닦고
아시아의 창고에서 임자 없는 사이
보물을 본국으로 끌고만 갔다


주거와 의식은 최저도(最抵度)
노예적 지위는 더욱 심하고
옛과 같은 창조적 혈액은 완전히 부패하였으나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생의 광영은 그놈들의 소유만이 아니다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
세워야 할 너희들의 나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성립하였다 그런데
연립 임시 정부란 또 다시 박해다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모략을 부숴라
이제는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쓴다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삼백 년 동안 받아온 눈물겨운 박해의 반응으로
너의 조상이 남겨놓은 저 야자나무의 노래를 부르며
오란다군의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라


제국주의의 야만적 체제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
힘 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
자유와 자기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참혹한 옛날이 지나면
피 흘린 자바섬에는
붉은 칸나 꽃이 피리니
죽음의 보람은 남해의 태양처럼
조선에 사는 우리에게도 빛이려니
해류가 부딪치는 모든 육지에선
거룩한 인도네시아 인민의 내일을 축복하리라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고대 문화의 대유적 보로 로도울의 밤
평화를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메란에 맞추어 스림피로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여라



마리서사[茉莉書舍]
1.
마리서사[茉莉書舍]는 시인 박인환이 1945년 말에 종로에 세운 책방이다.
아버지에게 3만원, 이모에게 2만원을 빌려..
종로3가 2번지 지금의 파고다공원에서 동대문쪽으로 약60미터 거리인 낙원동입구에..
당시의 고서점의 규모에 비하면 제법 큰 20평규모의 서점을 열었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인환은 해방전에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다니다가 광복을 맞이해 학업을 중단하고 '단지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1947년 3월 ‘마리서사’ 앞에서 임호권씨와 함께]
 
위 사진을 보면
마리서사라는 한글 고딕체의 글씨를 출입문 왼쪽 진열장에 써 놓았고..
오른쪽 진열장에는 LIBRAIRIE MARIE라는 고딕체글씨와 아래로 불어표기로..
‘문학, 시, 연극, 예술’등을 장식했는데 꽤나 현대적 감각을 풍기는 책방이다.
진열장 위에는 茉莉書舍라는 입체적인 글씨가 나무장식으로 커다랗게 붙어있어 더욱 모던한 느낌을 주고 있다.
책방 유리창 좌우에는 ‘세계희곡전집’, 세계문학전집‘ 등 서적에 대한 광고문, 안내문이 붙어있고..
특히 ’중외양서고가매입[中外良書高價買入] 안내문은 이곳이 고서점(헌책방)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리서사라는 아름다운 책방이름은 마리와 책방을 뜻하는 서사(書舍)의 합성어이다.
마리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녀는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마리와 열애후 헤어지면서 쓴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르고'란  싯귀),
장콕트와 앙드레지드, 릴케 등과 교류하며..
당시 유럽의 문화예술계에 많은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역할을 하면서 사교계의 꽃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인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파리의 예술인촌을 꿈꾸었던 인환으로서는 서점이름을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박인환 시인의 부인인 이정숙여사의 증언에도 "마리로랑생이라는 프랑스의 여류 화가가 있었는데..
그 여자를 좋아해서 그녀의 이름 '마리'를 붙였다고 한 말을 들었다'라고 회고했다.
 
 
한자 茉莉는 인환에게 적잖은 사회성에 영향을 미친 박일영이라는 초현실주의 화가가 지어준 것으로,
모던니즘 시인 ‘안자이 휴유에’의 시집 “군함말리(軍艦茉莉)"에서 차용한 것이다. 
 
2.
마리서사는 문학, 예술 관련 전문서점으로 책방의 책은 거의 인환이 모은 책으로 처음 시작하였다.
인환은 1949년 10대중반인 경기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수집했는데..
그의 관심사는 초기에 시와 영화분야에서 차츰 예술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아마 시인 은 이 무렵부터 시인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어로 번역된 세계문학과 일본의 상징파 시인들 뿐만 아니라 서구 현대시그룹의 시인들.
즉, 몽마르트르에 모이던 프랑스 전후의 젊은 예술가들..
스티븐 스펜더, 프레게르, 오든, 루이스 등의 영미 시인들의 작품들까지 섭렵해 가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그의 서재는 더욱 많은 책으로 채워져갔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로 입학한 평양의전을 1년 중퇴하고 짐을 꾸렸을 때에는..
전공서인 의학서적은 전무하고 수많은 문학서적이 이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책들은 훗날 마리서사를 열었을 때 가장 중요한 밑천이 된다. 
 
사실 인환은 지독한 책수집광이었다.
한때 신문사에 근무했던 시절이 있던 김규동의 증언에 의하면,
「인환이 가끔씩 찾아와 "여봐 뭐 좀 먹어갈거 없나?" 하면서 책장에 있는 책을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아무거나 한두권 슬쩍 끼고 사라져갔다.
그가 먹어갈 거란 보통 책을 말함이었다.
그는 또 인환은 책에 대한 남다른 수집벽이 있어서 그의 서가에는 "일본 제일서방의 한정본이나..
콕토나 자콥 혹은 발레리의 호화판 시집과 고흐 라든가 릴케의 미끈한 서간집같은 구수한 책들"이 꽂혀있었다고 했다.
또 인환은 이봉래와 마찬가지로 책을 빌려가면 영 소식이 없었다고 했다. 아주 먹어치우곤 했다.
김경린이나 조 향이 깍듯이 돌려주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자기소유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또 장만영의 증언에도 그가 정말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다시한번 말해준다.
「그는 보기드문 애서가이기도 하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린 현대문학만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 ..
6,25때의 일이다....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의 거실구경을 하였지만 어수선하고 불안스러운 그 판국에도..
그의 장서들을 가지런히 꽂아놓고 먼지하나 없게시리 깨끗이 소제를 해 놓고 있는 데는 놀라는 한편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자신의 장서를 바탕으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연 인환. 당시 마리서사에 자주 드나들던 양병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서점안에는 숱한 시서들이 있었다. 마치 외국서점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기억에는 외국의 현대시인의 시집 그것도 일본어로 번역된 것과 원서들로 메워져 있었다.
그중에 지금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앙드레브르통의 책과 폴 엘뤼아르의 처녀수태라는 호화판시집이라든지 마리 로랑생 시집, 콕트시집 등이 있었다.」 
 
3.
마리서사는 해방직후에 신간(新刊)서점이건 고(古)서점이건 문예서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시 문예인들에게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유리창에 쓴 안내문구를 보고 종로를 드나들던 문예인치고 이 곳을 안 들어가 본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갖춰놓은 장서가 ‘외국서점에 들어온 느낌’이라거나 ‘당시로서는 놀랄 일’이란 양병식의 회고에서 말해주듯..
문예전문서점으로서의 자부심을 인환은 가지게 있었고 실제로 그는 예술연감에 광고를 내며 책방홍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환은 그다지 서점경영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서사를 통해 인환을 처음 만났던 김광균은 ‘도대체 주인이 서점에 붙어 있지 않아서 장사도 안되는데...’라고 했고,
양병식도 ‘마리서사가 손해만 입었다’고 말했다.
또 김경린은 ‘박인환이 멋을 부리면서 경영의 원리는 몰랐다고 했고, 수입으로 친구들과 더불어 술 마시는데 썼다’라고 했다.
박인환은 책방운영을 생활의 방편이라기보다는 문학교류의 한 장으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본격적인 한국시단을 향한 그 첫발을 내딛는 교두보 역할로서 이를 활용했다고 본다.
실제로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문예인들은..
이시우, 조우식, 김기림, 김광균, 이 흡, 오정환, 배인철, 김병욱,이한직, 임호권, 박일영(김수영씨의 회고) 이외에..
박인환 추모문집에 실린 송지영, 이봉구, 박영준, 양병식, 송기태, 설정식, 최재덕, 길영주 등의 문예인들이 마리서사를 통해 박인환과 친분을 쌓았다.
   
4.
8.15해방과 더불어 좌우이념대립은 문단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대의 민족문학과 프로문학이라는 문학적인 대립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국가건설과 관련한 정치적 이념이라는 면에서 그 치열함은 극에 달했다.
임화를 중심으로 한 좌익계열의 ‘조선문화건설중앙회’, ‘조선문학건설본부’, ‘미술건설본부’, ‘음악건설본부’가 있었다면,
변영로, 오상순, 박종화 등이 주축이 된 ‘중앙문화협회’가 우익계열에서는 결성되었다.
또한 좌익문인들이 ‘조선문학가동맹’대회를 가지는가 하면 이에 대해 우익문인은 ‘조선문필가협회’대회로 맞서곤 했다.
그야말로 문단의 대립과 갈등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박인환의 마리서사는 외부의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좌우익 모든 문예인들이 통하는 열린공간을 지향하였다.
마리서사는 대립이 가시화되지 않는 자유로운 문화공간이었다.
실제로 이곳을 드나든 문인들은 좌익계열의 오장환, 김기림 등도 자주 오갔고 인환도 이들과 상당한 교류를 통해 그들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책방을 운영했던 오장환한테는 마리서사의 단초를 제공받은 것으로 보임- 차후 후속편에서 기술예정)
마리서사에 자신의 책을 팔기위해 방문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은 김수영은..
‘문단에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익의 구별 없던, 몽마르뜨르 같은 분위가 있었다’고 마리서사를 회고했다.
마리서사는 문화예술인들의 열린 영역이었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책방이었다.
해방전후의 혼란기에 오늘날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책의 이상향이 마리서사에 있었던 것이다.
새삼 박인환의 책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놀라운 상상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서사는 문을 닫고 만다.
이때가 1948년 입춘 무렵으로 1945년 말에 문을 연 마리서사는 만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시인 김광균은 ‘대체 주인 서점에 붙어 있지 않아서 장사도 안되는 데다가..
책을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아닌 문학청년들이 모여 떠드는 소굴이 되더니 얼마가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라고 회고 했고,
양병식도 ‘.... ...얼마 후 이 마리서사도 손해만 입고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마리서사가 문을 닫자 이를 걱정하던 김경린에게 박인환은 말한다.
“김형, 나는 아무 미련이 없어. 그때 드나들던 많은 친구들을 사귄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지” 그리고 이어 말한다.
"하지만 김형, 그 때에 손님으로 찾아왔던 정숙을 알게되어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서점에서 보석을 얻은 셈이지”
 
이후 인환은 마리서사를 운영하면서 인연을 맺은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1948년 4월에 ‘신시론’1집을 내고 다음해 1949년 4월에 앤솔러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한다.(김수영,임호권, 양병식 등 참여).
또한 ‘후반기 그룹’(후에 그의 작고로 유야무야 되지만)을 결성하며 한국 시단에 모던니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더욱 확장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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