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중도원(任重道遠]
[字解]
任(맡길 임)
重(무거울 중)
道(길 도)
遠(멀 원)
[意義]
소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으로, 책임이 중대하므로 오랫동안 분투하여야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出典]
논어(論語)-태백편(泰伯篇).
[解義]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선비는 견식이 넓고,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선비의 소임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이 선비의 소임이니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죽을 때까지 걸어가야 할 길이니 그보다 더 먼 것이 또 있겠는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이 짤막한 증자의 말은 공자의 가르침이자 유가(儒家)의 가르침인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을 학문하는 선비의 평생 소임으로 삼아야 함을 일컫는 것이다.
'인'은 여러 가지 말로 정의가 되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것이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누르고 예의 범절을 쫓는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누구나가 이 말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실제로 그 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나약하기만 하다.
공자의 수제자라고 하는 안연(顔淵)도 3개월 정도 밖에는 인을 꾸준히 실천하지 못했다고 한다.
항상 전전긍긍하며 삼가고 조심해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인이라는 짐에서 해방되는 만큼 선비의 소임이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다고 하겠다.
도산서원에 가면 조선 중기의 명필인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이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은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던 전교당(典敎堂)인데, 요즘으로 치면 교실이 되겠다. 그리고 전교당 앞 좌우에 정면 3칸으로 똑같이 생긴 두 동의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공부하고 잠자던 곳으로, 기숙사라고 할 수 있다. 동쪽에는 박약재(博約齋), 서쪽에는 홍의재(弘毅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박약재는 선배들이 머물던 곳이고 홍의재는 후배들이 머물던 장소이다.
이 홍의재의 '홍의(弘毅)'라는 말은 바로 오늘 임중도원(任重道遠)과 연결되는 것이다.
'홍의', 즉 견식을 넓히고 의지를 굳세가 가져야만 퇴계 선생의 가르침, 더 나아가서는 유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힘들고 먼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하겠다.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말이 원래 선비가 '인'을 실천하는 것과 관련되어 나온 것이지만, 다른 측면으로 대입해 볼 수도 있다.
수레를 끌고 가다보면 비탈길도 있고, 자갈길도 있고, 또 비라도 오는 날이면 땅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실어놓은 짐이 떨어질 수도 있고, 바퀴가 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때문에 수레바퀴와 적재함에 나무를 덧대어서 수레가 주저앉거나 물건이 떨어지는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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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극기복례 克己復禮)
克 : 이길 극
己 : 몸 기
復 : 돌아올 복
禮 : 예도 예
자기의 욕망ㆍ감정을 이겨내고 사회적 법칙인 예를 따르다. 《논어(論語)》에는 인(仁)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 이유는 공자의 대표적 사상이 인이었기 때문이며, ‘극기복례’도 그 인의 정의의 하나이다.《논어》에는, ‘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누가 인한가? 모든 사람이 인 때문에 살면서 인을 모르고 인을 외면한다’고 하였으며, ‘인 좋아하기를 색 좋아하듯 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라고도 하였다.
《논어》〈안연(顔淵)〉편에,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 된다[顔淵問仁 子曰克己復禮爲仁(안연문인 자왈극기복례위인)]. 하루라도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인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爲仁由己 而由人乎哉:위인유기 이유인호재)]. 안연이 그 조목(條目)을 여쭈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여기서 ‘극기복례’가 유래되었으며, 공자의 많은 제자들이 이 인에 대해 질문을 하여 왔지만 그때마다 공자는 각각 그들의 정도에 따라 다른 대답을 하였다. 수제자 안연에게 대답한 ‘극기복례’가 인의 정의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으며, 이 장은《논어》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유명한 장으로 예(禮)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극기는 마음의 욕망과의 싸움보다는 극기주의(금욕주의), 극기운동 등 육체적 훈련과정을 지칭하는 경우에 많이 쓰고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字解]
任(맡길 임)
重(무거울 중)
道(길 도)
遠(멀 원)
[意義]
소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으로, 책임이 중대하므로 오랫동안 분투하여야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出典]
논어(論語)-태백편(泰伯篇).
[解義]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선비는 견식이 넓고,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선비의 소임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이 선비의 소임이니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죽을 때까지 걸어가야 할 길이니 그보다 더 먼 것이 또 있겠는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이 짤막한 증자의 말은 공자의 가르침이자 유가(儒家)의 가르침인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을 학문하는 선비의 평생 소임으로 삼아야 함을 일컫는 것이다.
'인'은 여러 가지 말로 정의가 되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것이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누르고 예의 범절을 쫓는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누구나가 이 말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실제로 그 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나약하기만 하다.
공자의 수제자라고 하는 안연(顔淵)도 3개월 정도 밖에는 인을 꾸준히 실천하지 못했다고 한다.
항상 전전긍긍하며 삼가고 조심해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인이라는 짐에서 해방되는 만큼 선비의 소임이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다고 하겠다.
도산서원에 가면 조선 중기의 명필인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이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은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던 전교당(典敎堂)인데, 요즘으로 치면 교실이 되겠다. 그리고 전교당 앞 좌우에 정면 3칸으로 똑같이 생긴 두 동의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공부하고 잠자던 곳으로, 기숙사라고 할 수 있다. 동쪽에는 박약재(博約齋), 서쪽에는 홍의재(弘毅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박약재는 선배들이 머물던 곳이고 홍의재는 후배들이 머물던 장소이다.
이 홍의재의 '홍의(弘毅)'라는 말은 바로 오늘 임중도원(任重道遠)과 연결되는 것이다.
'홍의', 즉 견식을 넓히고 의지를 굳세가 가져야만 퇴계 선생의 가르침, 더 나아가서는 유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힘들고 먼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하겠다.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말이 원래 선비가 '인'을 실천하는 것과 관련되어 나온 것이지만, 다른 측면으로 대입해 볼 수도 있다.
수레를 끌고 가다보면 비탈길도 있고, 자갈길도 있고, 또 비라도 오는 날이면 땅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실어놓은 짐이 떨어질 수도 있고, 바퀴가 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때문에 수레바퀴와 적재함에 나무를 덧대어서 수레가 주저앉거나 물건이 떨어지는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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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극기복례 克己復禮)
克 : 이길 극
己 : 몸 기
復 : 돌아올 복
禮 : 예도 예
자기의 욕망ㆍ감정을 이겨내고 사회적 법칙인 예를 따르다. 《논어(論語)》에는 인(仁)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 이유는 공자의 대표적 사상이 인이었기 때문이며, ‘극기복례’도 그 인의 정의의 하나이다.《논어》에는, ‘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누가 인한가? 모든 사람이 인 때문에 살면서 인을 모르고 인을 외면한다’고 하였으며, ‘인 좋아하기를 색 좋아하듯 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라고도 하였다.
《논어》〈안연(顔淵)〉편에,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 된다[顔淵問仁 子曰克己復禮爲仁(안연문인 자왈극기복례위인)]. 하루라도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인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爲仁由己 而由人乎哉:위인유기 이유인호재)]. 안연이 그 조목(條目)을 여쭈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여기서 ‘극기복례’가 유래되었으며, 공자의 많은 제자들이 이 인에 대해 질문을 하여 왔지만 그때마다 공자는 각각 그들의 정도에 따라 다른 대답을 하였다. 수제자 안연에게 대답한 ‘극기복례’가 인의 정의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으며, 이 장은《논어》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유명한 장으로 예(禮)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극기는 마음의 욕망과의 싸움보다는 극기주의(금욕주의), 극기운동 등 육체적 훈련과정을 지칭하는 경우에 많이 쓰고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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