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쿠데타로 나라를 얻은, 송태조 조광윤(趙匡胤)
- 기회는 스스로 만든자에게 찾아온다
오정윤(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명지대 사회교육원 문화콘텐츠과 교수)
봉건시기의 정치변동은 통치계급 내부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정치투쟁의 수단이면서 단순한
사회변동이 아니라 황제가 바뀌고 국가가 바뀌는 전체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보통 정치적인 변동의 목표는 최고의 권력인 황제의 자리를 탈취하기 위한 것이다. 임금이
국가이고 법이고 권력의 전부인 봉건시대에 2인자를 놓고 벌이는 정변은 엄밀하게 말해서
내부권력의 경쟁이라고 부를 따름이다.
두 번째로 정치변동의 대부분은 기존의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에서 벌어진다. 간혹 농민봉기
와 같은 형태로 표출되어 천하의 패권을 잡는 경우도 있지만 드문 예이다. 참여자의 대부분
은 황족(皇族)이나 황제의 측근, 곧 외척이나 환관등이 주요한 연출배우이며, 군사력과 정
치권력을 지닌 권신(權臣)도 주연이 되기도 한다.
정변의 방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은밀하고 급박하게 추진되고 여기에는 모험과
위험이 함께 따른다. 봉건시대에 정치변동은 곧 역적이 되어 죽거나 승리하여 황제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정치변동의 시기는 돌발성이 대부분이다. 준비는 은밀하게 오랜기간을 걸쳐서 할 수
도 있지만 결정적인 선택은 폭풍이 불듯이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역사상 가장 극적이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북송(北宋)의 건국은 봉건시대 정변의 여러 행
태를 교과서적으로 압축해 놓은 한 편의 소설이었다.
후주(後周) 현덕(顯德) 6년(959년) 여름, 세종(世宗;954-959) 시영(柴榮)이 도성인 동경(東
京;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에서 병으로 서거했다. 그때 시영의 나이 설흔 아홉이었고, 그의
아들 시종(柴宗)은 겨우 일곱살이었다.
후주(後周) 정권으로서는 영명한 군주의 죽음이야말로 커다란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시영은 당나라가 망하고 비온 다음날 자라는 죽순처럼 등장한 5대10국(五代十國)의 군주 중
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용맹을 갖춘 군주였다.
그는 본래 후주를 개국한 황제 곽위(郭威;904-954)의 사촌조카로서 그의 양자로 거두어져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오른 입지전(立志傳)적인 인물이다.
현덕 원년(954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그는 불과 4년동안 대내적으로 내치(內治)를
다지고.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옛 제도의 폐습을 일거에 고쳤다. 아울러 군대를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훈련시켜 주변국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해 나갔다.
이 해 사타족인 세조(世祖;951-954) 유민(劉旻;유숭이라고도 함)이 세운 북한(北漢;951-
979)이 3만의 기병을 이끌고 북방의 거란군(契丹軍) 1만과 합세하여 후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곽위를 뒤이어 후주의 2대 황제에 오른 세종(世宗;954-959) 시영(柴榮)은 시위마보군(
侍衛馬步軍) 도우후(都虞侯) 이중진(李重進), 시위마군(侍衛馬軍) 도지휘사(都指揮使) 번원
능(樊爰能), 선휘사(宣徽使) 향훈(向訓),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 장영덕(張永德)을 이
끌고 친정(親征)에 나서 고평(高平)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훗날 송태조가 되는
조광윤은 장영덕의 막하에서 군공을 세워 중앙정계에 자신의 이름을 내밀 수 있었다.
주세종은 즉위 초의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각지에서 군벌들이
들고 일어나 후한 말기의 군웅할거를 연상시키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후당, 후진, 후한의 3대는 사타족(沙陀族)이 세운 나라였다. 따라서 중국 한족이 세운 후주
정권은 중원의 땅을 지켜매고 천하를 통일해야 하는 역사적인 부담을 지고 있었다. 후주의
세종 시영은 자신이 그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적임자로 여겼다.
그는 955년에 서쪽으로 후촉(後蜀;934-965)을 공격하여 진주, 봉주, 성주, 계주 등 지금의
섬서와 감숙의 일부를 탈취하고, 남쪽으로 남당(南唐;937-975)을 정벌하여 광주, 황주, 점
주, 서주, 수주, 노주, 화주, 호주 등 양자강과 회하 사이의 14개주(州) 60현(縣)을 확보하
였다.
현덕 6년(958년) 4월에는 친히 수 만대군을 이끌고 북벌에 들어가 거란의 요(遼)나라를 공
격하였다. 그의 야심만만한 계획은 후진(後晉;936-946)의 고조(高祖;936-942) 석경당이 요(
遼)나라에 바친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되찾는 것이었다.
고구려를 뒤이어 일어선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거란족의 요나라는
강력한 기마군단으로 혼란에 빠진 북중국을 유린하고 연운16주에 강대한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었다. 만일 시영이 중국을 통일하는 전쟁을 일으킨다면 후주(後周)의 배후에 있는 요나라
는 가장 강력한 위협세력이었다.
시영이 북벌을 단행한 이유는 바로 배후의 세력을 물리치는데 있었다. 진격은 매우 순조롭
게 이루어졌다. 수일동안 시영의 북벌군은 와교(瓦橋), 익진(益津), 어구의 3관(三關)을 돌
파하였다. 이때 시영은 진격도중에 갑자기 병을 얻고 쓰러졌다. 북벌군은 도중에 회군하여
동경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두달 후인 6월, 시영은 동경에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어린 아들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사방에 적을 두고 있는 후주의 정권은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였다. 물론 후주
의 위기는 요나라와 주변국의 대항에도 기인하였지만, 사실 내부에도 그 요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를 일컫는 5대10국은 군부정권의 시기로서 각지를 점거한 군벌들이 각자 나라를
세우고 서로 전쟁을 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었다.
주온(朱溫)이 당(唐)나라를 멸하고 후량(後梁;907-923)을 건국한 907년 이래 현재까지 겨우
50여년의 기간동안 중국의 중심부에는 후량(後梁), 후당(後唐;923-936), 후진(後晉;936-
946), 후한(後漢;947-950), 후주(後周;951-960)라는 다섯개의 왕조가 번갈이 일어섰고, 서
쪽과 남쪽에는 남당(南唐;937-975), 오월(吳越;907-978), 전촉(前蜀;903-925)과 같은 10개
의 왕조가 세워졌다.
이중에서 중원을 장악한 5대(代)의 나라 가운데 처음의 후량(後粱)과 마지막의 후주(後周)
를 제외하고 이극용이 세운 후당, 석경당이 이룩한 후진, 유지원이 건국한 후한은 돌궐족(
突厥族)의 한갈래인 사타족(沙陀族)이 세웠으므로 중국 한족의 왕조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무려 십 수개의 왕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는 전국적인 불안정한 상태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고 있는 과정이
었고, 둘째는 각국의 왕실이나 조정에서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는데 있었다.
이처럼 군부정권이 각지에서 황제를 칭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조건은 누구라도 군대의
힘만 있으면 일개 지역을 차지하고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을 일으켰다.
군대의 장군들은 기분이 나쁘거나 수가 틀리면 단독, 혹은 연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
은 반란을 성공시키면 권력과 재산을 나누고, 그중에서 한사람을 황제로 추대하고 자신들은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일곱살의 어린 꼬마가 후주의 황제가 되었으니,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주변국의 도적이나 내부의 도적들이 가만 놔둘리가 만무하였다.
주세종은 생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그의 주요한 조치는 우선
황제의 지휘를 받는 금위군(禁衛軍)을 강화하고, 국경지역의 군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 금위군은 황궁과 황제를 지키는 부대로서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주세종 시
영은 자신의 직속으로 중앙의 전투부대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고, 이들 부대를 이끌고 주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후에 금위군의 핵심으로 성장하였다.
시영은 중앙의 금위군을 강화하여 지방군이 감히 중앙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강력한 용맹을 갖춘 황제가 살아 있을때나 유효할 뿐, 이제 겨우 일곱살에 불과한
황제의 능력으로는 효용성이 없었다.
세종은 죽기 바로 며칠전부터 어떤 불길한 징조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동경성에는
이상한 소문의 노래가 널리 퍼졌다.
“점검(点檢)이 천자가 되려고 꾸민단다.”
점검은 바로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의 약칭으로, 금위군(禁衛軍)의 최고지휘관을 의미하였
다. 당시에 이 직책을 맡고 있던 사람은 주태조(周太祖) 곽위의 사위인 장영덕(張永德)이었
다. 그는 본래부터 시영의 핵심적인 측근이었고, 시영이 즉위한 그 해 고평에서 북한군과
거란군을 격파했던 고평전투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전전도점검과 같은 중
요한 직책을 맡을리가 없었다.
시영은 처음에 소문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영덕에게 모반의 음모가 있
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부추기고 있지 않는가 의심이 들었다. 이에 시영은
장영덕의 군직을 박탈하고, 조광윤(趙匡胤)을 금위군의 통수권자로 임명하였다.
임종전에 시영은 재상 범질(范質)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삼고 유주(幼主;어린 임금)의
후사를 부탁하였다.
조광윤은 후당(後唐;923-936) 천성(天成) 2년(927) 3월 21일에 낙양(洛陽)의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조홍은(趙弘殷)은 금군비첩지휘사(禁軍飛捷指揮使)라는 중급군관이었
다.
조광윤이 10살이 되던 해인 936년에 후당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瑭)이 거란
군의 군대를 빌려 후당을 엎고 후진(後晋)을 세웠다. 이때 석경당은 거란에게 답례품으로
연운16주를 무상으로 할양하였다.
공교롭게도 10년이 지난 947년에 후당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유지원(劉知遠)이 진양(晉
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곧바로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후한(後漢;947-950)을 세웠다.
조광윤은 젊은 시절을 이런 격변의 현장에서 군인으로 성장하였다. 변화무쌍한 난세에서 그
는 군인의 선택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다.
조광윤은 재수가 있었는지 젊은 시절에 명망이 높은 군벌이었던 곽위의 부대에서 하급장교
로 시작해서 군문(軍門)에 발을 내딛였다. 곽위가 950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후한(後漢)을
무너뜨리고, 후주를 세웠을때 조광윤도 적극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세종 시영이 곽위의 뒤를 이어 후주의 2대 황제의 지위에 오르자, 젊었을때 조광윤과 친분
이 있었던 그는 조광윤을 대동하고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다. 조광윤은 전쟁을 치룰때마다
공을 세우고, 직위가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에 이르렀다.
시영이 조광윤을 금위군의 고급장교로 삼은데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그는 조광윤이
용맹하고 재간이 뛰어난 장수이면서도 자신과 후주의 정권에 대해서 충성심이 아주 강하다
고 믿었다. 2년전에 시영이 남당(南唐)과 격전을 치루고 있을때, 남당의 조정에서 조광윤을
수만금으로 매수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광윤은 수만금을 조정에 바치고 군비(軍
費)로 써야한다고 주청하였다 이때의 사건은 시영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시영은 임종 며칠전에 조광윤을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삼았다. 조광윤은 금위군에서 무척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지위도 전전도점검의 다음 가는 지위로 장영달의 바로 아래 직급이었
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조광윤은 장영달이 모반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자 곧바로 전전도점검
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시영이 서거하자, 도성의 분위기는 일시에 흉흉해졌다. 후주의 이전 왕조인 후량, 후당, 후
진, 후한은 겨우 2-3대의 황제에 10년을 버티지 못하는 단명왕조였다. 그런데 이제 후주도
영명한 군주가 갑자기 죽고 겨우 일곱살의 황제가 등장하였으니, 백성들이 동요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성내의 저자거리나 주점, 다관(茶館)에는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쑤근거렸다.
“다음에는 누가 황제가 될까?”
“점검이야, 점검이 천자가 된다는 노래도 못들었냐?”
“장 점검은 이미 파면되었는데, 무슨 점검이 천자가 돼?”
“조 점검은 점검이 아니냐?”
소문은 꼬리를 이어 발생했다. 성내의 많은 백성들은 불안한 심리에 당장이라도 도성을 떠
나고 싶었지만, 금위군이 성문을 지키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웠다.
현덕 7년(960년) 정월 초하루, 세종이 서거한지 반년이 조금 지났을 때이다. 새해가 들어선
지 하루도 못되어, 금주(錦州;지금의 하북성 경내), 정주(定州;지금의 하북성 정현)지방의
관리들이 급보를 올려 거란의 요(遼)와 북한(北漢)이 결탁한 수 만 대군이 국경을 침략한다
고 알려왔다.
고명대신 범질은 신년하례를 주재하다가 급보를 받고, 전전도점검 조광윤, 전전도지휘사 석
수신(石守信;928-984)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였다.
조광윤은 당년 설흔 넷으로 키가 훤칠하고, 몸이 비교적 뚱뚱하였으며, 네모난 얼굴에 옅고
검은 눈썹이 길게 뻗은 모습이었다. 조광윤은 중후한 몸짓에서 울려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황제께서 북벌을 단행 하시었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신 이후, 아직도 우리는 그 뜻
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대업은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지금 북쪽의 외적(外敵)은
우리의 유주(幼主)를 업신여기고 감히 병마를 일으켰으니 이 기회에 모두 발해(渤海)의 차
가운 물에 고혼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조광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석수신을 힐끗 보고나서 계속 입을 열었다.
“본인이 나아가 적을 맞겠으니 석 장군은 도성에 남아 유주를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재
상 대인도 염려를 놓으시고, 승전보를 기다려 주십시오.”
석수신과 범질은 조광윤의 제의를 혼쾌하게 찬성하였다. 금위군은 두개의 부대로 나뉘어 반
은 석수신의 지휘를 받아 도성을 지켰고, 반은 조광윤의 지휘를 받아 북정(北征)에 나섰다.
북정군은 정월 초사흘에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아침에 동경성에는 또다시 ‘점검이 천
자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극심하게 떠돌아 다녔다. 많은 사람들은 짐을 싸고 여차하면 도
망갈 채비를 갖추었다. 특히 시집안간 처녀가 있는 집안은 더욱 바짝 긴장하였다.
매번 새로운 천자가 바뀔때마다 도성은 온갖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들은 병사들이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해도 묵인하였다. 특히 약탈의 주요한 대
상은 국가의 창고, 부상(富商)과 대신들의 저택이었다. 어떤 때는 황실의 귀족들도 약탈을
당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약탈을 빗대어 정시(靖市)라고 불렀다. 도성의 저자거리
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비아냥의 일종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은 백성들에게 스스로
몸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경고를 일깨우기에 충분하였다.
동경성의 동북 사십리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진교역(陳橋驛)이라고 불렸다. 조광윤
은 정월 초사흘 아침에 북정군을 이끌고 황혼 무렵에 그다지 번화하지도 않은 이곳에 도착
하였다.
이틀전에 그는 선발부대를 미리 황하 이북에 파병하여 적군이 반드시 거쳐와야 하는 요충지
에 주둔시켰다. 이날 저녁에 조광윤은 몇 잔의 술을 마시고 지휘부의 군막에서 잠에 들었다
.
진교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어느 군막에는 커다란 촛불이 아직도 켜져 있었다. 그곳
에는 금위군의 고급장교인 도압아(都押衙) 이처운(李處耘), 산원지휘사(散員指揮使) 왕언승
(王彦升)이 여러 지휘관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거란의 요(遼)와
지난 해에 몇차례 싸웠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선황제 시영을 떠올렸다. 또한 나이 어린 소황
제의 앞날을 거정하기도 하였다.
어떤 지휘관이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하가 아직 어지럽고, 황제가 나이가 어리니, 이후에 어떻게 될런지 정말 걱정이오?”
어떤 사람이 그 말을 이어 받았다.
“지금 도성에서는 점검이 천자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천명(天
命)이 아닐까요?”
이때 묘훈(苗訓)이라고 불리우는 문서관(文書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오늘 천상(天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는데 모두들 알고 계십니까?”
지휘관들은 방금 일어나 소리친 묘훈이 성상(星象)이나 천문에 매우 밝은 사람임을 알고 있
었다. 어떤 사람이 궁금한듯 다그쳤다.
“천상에 무슨 변화가 있었단 말이오? 궁금해 죽겠구려.”
“오늘 오전에 태양이 떠오르는데 바로 그 밑에서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오르는게 아니겠소?
”
묘훈은 전령관(傳令官) 초소보(楚昭輔)를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당시 그곳에는 초 전령관도 함께 있었소.”
전령관 초소보가 묘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도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군막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때 침묵을 깨고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태양 밑에 또다른 태양은 무슨 징조를 말하는 것입니까?”
곁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
“태양은 천자를 상징하므로 먼저 뜬 태양은 옛 천자이고, 뒤에 뜬 태양은 새 천자이지.”
그의 말은 기름에 불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지휘관들이 왕언승과 이처운에게 재촉했다.
“우리 모두 점검을 새로운 천자로 추대합시다. 두분 장군께서 주관 하십시오.”
이처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조광윤의 측근과 동생인 조광의(趙匡義;939-997), 서기관
(書記官) 조보(趙普;922-992)를 불러 대책을 상의하였다.
왕언승은 금위군의 또다른 고급장교인 전전도우후(殿前都虞侯) 이한초(李漢超)와 내전도우
후(內殿都虞侯) 마인후(馬仁瑀)를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조광의, 조보, 이한초, 마인후가 군막 안에 모두 모이자, 지휘관들은 더욱 시끄럽게 대사(
大事)를 재촉하였다.
왕승언은 조광의에게 묘훈이 아침에 본 천상(天象)을 설명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에 있는 지휘관들은 모두 점검을 천자로 추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번 대사가 위
로는 천상(天象)에 부합되고, 아래로는 민의(民意)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장군의 뜻은
어떻습니까?”
조광의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천자를 세우는 일은 무척 힘든 일로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성공 할 수
가 있소.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커다란 재난을 당할 것이오.”
이처운이 이한초, 마인후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이 도우후, 마 도우후, 왕 지휘사, 그리고 이모(李某)가 있는데 누가 감히 반대를 할 수
가 있겠습니까? 만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
군막안의 지휘관들이 모두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십시오.”
이한초와 마인후는 군막의 분위기에 눌려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반이 결정되자, 사람
들은 중급 이상의 장교들을 군막에 모두 불러들여, 전전도점검 조광윤을 천자로 옹립하는
계획을 선포하였다.
군막안에 모인 군인들은 대부분 첫번째 쿠데타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시
에 도성안에 들어가 약탈하는 활극을 상상하면서 모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그 짧은 순
간에 어떤 군인은 누구네 집을 털고, 누구네 아가씨를 겁탈 할것인지 벌써 주판알을 튕기는
자도 있었다.
서기관 조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내를 조용히 정리하였다. 그는 조광윤의 핵심 측근으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조광윤 본인이 직접 한 말로 간주하였다. 장내가 조용하자 조보가 결연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새로운 천자를 옹립하려면, 결코 하룻밤의 부귀영화를 꿈꾸지 마시오. 오랜 기간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생각하기 바라오.”
그의 말은 곧바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무참히 짓밟았다. 어떤 사람이 지 못하고 물었다.
“오랜 기간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란게 무엇입니까?”
조보가 조용히 대답하였다.
“새로운 천자가 들어서고 천하가 태평해지면, 그대들은 모두 원훈공신으로 많은 상과 지위
에 합당한 벼슬도 받을 것이오. 그대들이 자손만대에 걸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면 그
것이 오랜 기간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가 아니겠소?”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조보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성에 들어가 약탈을 일삼는다면, 도성의 백성들이 강하게 반발을 할 것
이며, 이를 핑계로 각지에 있는 절도사(節度使)들이 너도나도 병사를 일으켜서 우리를 공격
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대들의 부귀영화는 누구도 보장할 수
가 없는 것이오. 한순간의 부귀영화를 꿈꾸어 작은 재물을 탐하면 이런 꼴이 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조보의 말은 더욱 힘이 가해졌다.
“이번 거사는 군기가 엄정해야 하오. 도성에서 일체의 약탈도 있어서는 아니되오.”
조보는 역대로 묵인되어온 정시(靖市)의 관례를 깨고 엄정한 군율을 강조하자, 일부 지휘관
이 불멘 소리로 웅성거렸으나, 곧바로 대다수의 적극적인 찬성에 파묻히고 말았다.
조광윤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오경(五更)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이때 동생 조광의
가 군막 안으로 들어와 지휘관들이 모두 막사 앞에 서있으니 빨리 군복을 갖추고 밖으로 나
오라고 재촉하였다.
조광윤은 사태를 파악하고 동생에게 선황제인 세종 시영의 은혜를 배반할 수 없다고 강력하
게 반대하였다. 더욱이 시영이 임종전에 자신에게 어린 황제의 후사를 보살펴 달라고 극구
부탁한 사실을 들먹이며 거절하였다.
밖에 도열한 지휘관들이 소리높혀 조광윤을 불렀다. 더이상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한
조광윤이 군복을 갖추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날은 이미 밝아 사방이 훤하였다.
그는 군막 앞의 계단에 올라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맞이하였다. 몇몇 혈기왕성한 지휘관들
이 칼을 높이 빼어들고 봉기를 재촉하였다.
“점검을 새로운 천자로 모시고 천하를 평정합시다.”
지휘관들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맞장구쳤다.
“새로운 천자는 태위(太尉;조광윤의 명예관직)이다.”
이때 조광윤의 등뒤에 서있는 사람이 그에게 황제를 상징하는 황포(黃袍)를 어깨에 걸쳤다.
군막 앞에 도열한 지휘관들이 모두 부복하고 소리높혀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조광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멀리 하늘을 응시하였다. 예의가 끝나자 조광윤은 괴로운 표정
을 지으며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한낮 짧은 부귀영화를 꿈꾸었다면 과인을 천자로 추대하지 마시오.”
“명령만 내려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고급 지휘관들이 소리쳤다.
“그럼 그대들에게 세가지 조건을 명령하오. 첫째는 후주의 황실을 보호하고, 태후(太后)와
유주(幼主)를 절대로 해쳐서는 아니되오. 둘째로,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나의 동료들이니
아무도 해치지 마시오. 셋째는 조정의 창고와 백성의 집을 약탈하지 마시오.”
지휘관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맹세를 하자 조광윤은 더욱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사가 끝나면 모두 공로에 따라 후한 상을 내리겠지만, 명령을 어긴 자는 색출하여 삼족
을 멸하는 중벌에 처하겠소.”
지휘관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을 표시하였다.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쿠데타로 이름난 진교병변(陳橋兵變)은 이렇게 영화의 극적인 장면처
럼 계획되고 추진이 이루어졌다.
북정군은 정월 초사흘에 곧바로 말머리를 동경성으로 돌렸다. 회군하는 도중에 두 사람의
중급 군관은 신이난듯 서로 화제를 주고 받았다.
“원래 ‘점검이 천자가 된다’고 한 유언비어는 장 점검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끝
내는 조 점검이 되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야.”
“이 바보야, 장 점검은 본래 천자가 되고 싶어서 그 말을 퍼뜨린 것이야. 그런데 안되는
바람에 조 점검이 기회를 얻은거라구.”
“조 점검은 거란을 치러 간다고 하더니, 이대로 회군하면 거란병이 동경으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이 바보야, 그런 일은 애당초 없었던거야.”
“그렇다면 조 점검도 애당초에 천자가 되려고 했단 말이야?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사양
하고 반대했지. 더군다나 옆에 사람들이 핍박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승낙을 하였는데......?
”
“이 바보야, 그게 바로 뛰어난 술책이야. 만일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
게 쉽게 거사를 할 수가 있겠냐?”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중급 군관도 하나만 알고 둘, 셋은 모르는게
있었다.
5대10국을 개국한 황제들은 대부분 식견이 짧고, 전략도 없었으며, 충분한 고려와 준비도
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쿠데타를 일으킨 병사들이 백성의 재물을 약탈해도 적극적으로 막아
내지 못해, 이것이 백성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자신의 파멸을 이끌어 내는 주요 요인이 되었
다.
조광윤은 매우 야심만만한 사나이였다. 그는 후주의 세종 시영이 매우 건실한 중앙집권의
기초를 다져놓자, 이 기초를 발판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불세출의 왕조를 건립하려고 준비하
였다. 안정적이고 전국적인 지지기반을 획득해야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통치질서
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남의 위기를 틈타 신하의 입장에서 주군(主君)을 죽이고 권력을 탈취하는 일은 매우
부도덕한 행위로 지탄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광윤은 남의 핍박을 받아 어쩔 수 없
이 승낙을 하였다고 천하에 알려진다면 부도덕이라는 더러운 냄새를 약간이나 씻어내고, 성
군(聖君)이라는 약간의 도덕적 풍모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중급 군관이 하나만 알고 둘, 셋은 모른다는 말은 이를 의미한다. 거사를 준비하고 유언비
어를 퍼트렸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파악했지만, 중앙집권이 어느정도 공고화된 시점에서, 핍
박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거사를 하였다고 선전한 조광윤의 고단수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
이다.
회군하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정오가 못되어 대군은 동경성에 도착하였다. 성문을 지
키는 병사들은 전혀 놀라지 않은채 성문을 모두 열고 반란군을 환영하였다.
물론 여기에도 깊은 음모가 있었다. 도성에 남아 있었던 금위군의 고급 군관 석수신, 왕심
기(王審琦)는 모두 조광윤의 측근으로 이미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내궁(內宮)을 지키는 시위대의 장군인 친군부지휘사(親軍副指揮使) 한통(韓通)은 북정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곧바로 측근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때 이미 내궁에 들이닥친 왕언승의 부대는 대항하는 한통의 목을 베어버리고 내궁 시위대
를 해산시켰다.
황궁은 예상대로 쉽게 점령되었다. 조광윤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와 측근들에게 나머지 처
리할 업무를 지시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얼마 후, 고명대신 범질과 몇몇 대신들이 조부(趙府;조광윤의 저택)로 압송되어 왔다. 범질
은 조광윤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광윤은 천자의 위용이 아니라,
지난날의 관직으로 범질을 대하면서 슬프게 울먹였다.
“오늘 이렇게 일이 벌어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하에 죄를 짓지나 않
았는지 걱정입니다.”
조광윤의 곁에서 부복하고 있던 장군 나언괴(羅言瑰)가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들고 소리쳤
다.
“우리는 천하의 백성들을 구하고자 오늘 새로운 천자를 추대하였소.”
범질과 여러 대신들은 모두 눈물을 떨구며 흐느꼈다. 그들은 오늘 새로운 천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죽음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
광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올렸다
조광윤은 예의가 끝나자 범질과 대신들의 안전을 약속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 날 오후에 도성의 주요한 곳을 모두 점령하고, 후주의 대신들을 포섭한 조광윤은 고명대
신 범질과 조정의 중신을 앞세우고 선양(禪讓)의 예식을 거행하였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내전에 모두 도열하였다. 황혼이 질 무렵에 환관이 어린 황제를 이끌
고 들어와 보좌에 앉혔다. 조광윤이 후주의 마지막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곁에 서있던 한
림승지(翰林承旨) 도곡(陶谷)이 소매에서 두루마기를 꺼냈다. 후주의 3대황제인 공제(恭帝)
가 송(宋)의 개국황제 조광윤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한다는 조서였다.
여덟살 난 황제 시종훈(柴宗訓)은 자신이 내린 조서가 무엇인지 모른채 마냥 동그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림승지가 조서를 모두 읽자 환관이 시종훈을 보좌에서 끌어냈다
.
조광윤이 송나라의 개국황제로 보좌에 앉았다. 문무백관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소리 높
혀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조광윤은 곧바로 조서를 내려 후주의 마지막 황제를 정왕(鄭王)에 봉하고 조상의 제사를 자
손대대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어서 나라 이름을 송(宋)으로 정하고, 년호를 건륭(
建隆)으로 선포했다.
모든 일은 하룻만에 이루어졌다. 그는 새벽에 황제를 상징하는 황포(黃袍)를 걸치고 봉기를
하였으며, 오후에는 도성을 점령하고 대신들을 굴복시켰으며, 저녁에는 선양을 마치고 법적
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은 후주에서 송나라로 바뀌는데 겨우 하루가 걸려다는 사실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거사는 완벽한 사전계획에 의하여 주도면밀하게 안배가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주요한 결정은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몰래 이루어졌다. 아주 밝은 대낮에 이루어진 단 하나
의 일은 군대를 이끌고 거사를 성공시킨 그것 뿐이었다.
특히 거사의 일정을 새해 첫날에 잡은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모든 날의 처음이고 새
로운 빛이 뜨는 첫날에, 들뜬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고, 세상의 주인이 첫날 바뀐다는 깊은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5대10국의 특징은 누구라도 병권(兵權)이 있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황제가 될 수 있
는 그런 세상이었다. 조광윤은 누구보다도 그런 경험을 두번이나 경험하였다.
한 번은 후주를 세운 곽위,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또다시 병변이라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고심에 고심을 하였다.
건륭 2년(961년)의 어느 날, 조광윤은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초청받아 참석한 사
람들은 모두 금위군의 고급 군관들이었다. 조광윤을 천자로 옹립하는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
운 석수신, 고회덕(高懷德), 왕심기, 장령택(張令鐸)도 참석하였다.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있을때, 조광윤이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인은 여러분의 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천자가 될 수 없었소. 여러분들의 공로와 은혜
를 잊을 수가 없소. 그러나 천자가 되고난 후에는 차라리 일개 지방을 다스리는 절도사가
낫다는 생각이 부쩍 드니, 나도 왜그런지 모르겠소. 밤마다 불안하고 매사에 즐거움이 없소
.”
석수신이 황급히 일어나 물었다.
“폐하, 어찌된 일이옵니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황제의 자리가 이렇게 힘이 들 줄은 몰랐소?”
연회에 참석한 장수들은 황제의 말에 모두 놀랐다. 조광윤의 말속에는 여러분들이 모반을
할까 불안해서 죽겠다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수들이 모두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폐하, 천명이 이미 내려졌는데 누가 감히 모반을 꿈꾸겠습니까?”
조광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그대들이 비록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대들의 부하가 충동질
하면 어쩌겠소? 느닷없이 뒤에서 황포를 걸쳐준다면 어쩔 수 없이 모반을 하지 않을 수 없
을 것이오.”
조광윤은 자신의 예를 들먹이며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석수신은 조광윤이 주연을 빙자하여 그런 말을 꺼낸 의도를 파악하고, 결코 이 국면을 벗어
날 수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폐하, 소신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조광윤은 천천히 속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냈다.
“인생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법, 부귀영화도 잠시일 뿐이오. 진정한 즐거움은 평생
을 편안하게 지내고 자손들을 굶지않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오. 여러분들이 만일 병
권(兵權)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 의심하고 끝내는 부귀영화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오.
조용히 물러나 미녀의 품에서 노래와 춤을 얻고, 손자들의 재롱을 보면서 말년을 보내는게
어떻소?”
조광윤은 군관들을 상대로 거대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인 혜택을 조건으로 내
걸고 그들의 병권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설사 기분이 내키지 않았어도, 어쩔 수 없이 병권
을 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광윤은 이렇게해서 손쉽게 금위군의 지휘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이
를 두고 ‘술잔으로 병권을 풀었다는’ 뜻으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고 하였다.
널리 알려진대로 5대10국은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진교병변도 많고 많은 쿠데타의 하나
에 불과하였다. 사람들은 조광윤의 송왕조도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으로 생
각하였다. 무려 3백여년이나 지속될 줄은 어느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쉽게 천하를 얻은 조씨(趙氏)들
이 오히려 천하를 통일하고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병권(兵權), 정권(政
權), 재권(財權)을 장악한 철저한 중앙집권에 있었다’고 하였다.
조광윤의 송나라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체는 바로 병권의 획득이었다.
송나라는 중앙에서 강력한 병권을 장악하여 지방의 반발을 사전에 제압할 수 있었다.
후대의 왕들도 송나라의 예를 본받아 외병(外兵)의 방비보다는 내부의 반란세력을 방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조광윤을 뒤이어 황제에 오른 조광의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국가는 항상 외우내란(外憂內亂)에 시달리는 법이오. 그 중에서 외우는 도리어 막기 쉬우
나 내란은 돌발적이서 가장 걱정이 되는 바이오, 제왕이 신경써야 할 것은 바로 내부의 방
비요.”
이처럼 송태조 조광윤과 송태종 조광의는 조정의 대신들에게 병권을 주지 않고, 전쟁이 있
을때면 임시로 지휘권을 맡기곤 하였다.
송나라는 이후 북송과 남송을 거쳐 국내에는 커다란 반란이 없었으나, 밖으로는 요(遼), 서
하(西夏), 금(金)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렸고, 끝내는 몽골의 원(元)나라에 멸망당하는 비
운을 맞는다.
중국의 역사를 통털어서 송나라처럼 대외관계에서 이렇게 유약하고 처참하게 당한 예는 없
다. 수많은 문사(文士)들이 아무런 힘도 없이 비분강개만 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외적의 침입
에 시달린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진교병변에서 그 뿌리를 내렸으며, 병권의 박탈에서 가지
를 쳤고, 요, 금, 서하, 원의 침략으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조광윤은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쿠데타를 성공시켜 하룻만에 나라를 바꾸고 황제
가 되었다. 그를 추대한 군인집단들은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쿠데타를 계획
하고 추진하였다.
조광윤과 군인집단들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쉽게 거사를 성공시켰지만, 부귀영화와 반란
방비라는 정치무역을 놓고 너무나 쉽게 타협하였다.
조광윤은 이로써 조씨의 왕권을 유지시키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끊임없는 외침을 초래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의 정치적 한계는 군인집단의 병권을 회수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취약한
구조였다는 사실이다.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과정이 아무리 완벽한 계획에 의한 성공일지라도, 이처럼 근본적인
취약성이 있다면 문제는 항상 드러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