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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격수기] ★

제48회 (2004) 행정고시 일반행정직 이색합격자 합격수기

작성자태광|작성시간05.02.08|조회수19,698 목록 댓글 23
- 선생님에서 사무관으로 -

Ⅰ. 들어가며 ; 행정고시를 시작하기까지

1. 프롤로그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수험생활 동안 수많은 합격수기를 읽으면서 “나도 합격하면 수기를 써야지” 라는 생각을 할 터이고 저 또한 똑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선, 성적이 뛰어나지도 못하고 나이가 어리지도 않은 제가, ‘현직공무원 합격자’라는 프리미엄으로 인해 과분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저에게 합격수기를 쓸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짐을 저를 아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학교·독서실·고시원에서 원대한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 계시는 여러 학우들께서, 어줍잖은 제 글을 읽으시고 작으나마 힘과 자극을 얻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다만, 수험교재라든지 공부방법론 등은 다른 훌륭한 합격생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여기서는 행정고시를 합격하기까지 제가 살아 온 어리석고 부끄러운 사생활을 공개함으로써 저와 비슷한 상황에서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他山之石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2. 잘못 끼운 첫 단추

전 그야말로 평범한 가정(아버님은 공무원이셨고, 어머님은 전업주부)에서 3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대오 없이 마치고 ‘87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인생의 패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잘못 끼운 첫 번째 단추였습니다. 학력고사 성적이 기대에 많이 못 미치게 나와서 당시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은 재수할 것을 권유하셨지만, 전 그저 지겨운 고3생활을 다시 하기 싫다는 일념(?) 하에 학과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고민 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공이 적성에 썩 맞지 않더라도 대체로 적응하여 그 방면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건축공학의 특성상 그리고 저의 소극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적응하기 힘들었고 이때부터 저의 기나 긴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3. 군생활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

저의 대학생활은 이렇게 방황으로 시작되었고, 학교생활에 적응해 보려고 ROTC에 지원하여 최종 합격했으나, 그마저 학교 다니기가 싫어서 마지막 순간에 포기서를 냈고 결국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찾은 것이 KATUSA였으며 약2주간 준비해서 시험을 쳤고 다행히 합격하여 용산 41st 통신대대에 배치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소위 말하는 인생에 있어서 3번의 기회 중 하나가 그때였었나 봅니다. 당시 KATUSA들은 3~4명이 한 방을 썼었는데, 그때 저와 같은 방을 썼던 한 분은 시간을 쪼개 새벽 등을 이용해서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제대 2년 후 제37회 일반행정직에 합격하였습니다.

역사나 인생에 있어서 만약은 없지만 만약 그때 제가 그분에게 자극 받고 행정고시를 준비했었더라면 저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 2년간의 군생활을 영어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등 미군부대 근무의 장점인 넉넉한 여유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대할 즈음에는 전공을 아예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었으나, 어리석게도 행정고시에 지레 겁먹고 7급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93년 총무처와 경기도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고, 경기도에서 먼저 발령이 났으나 임용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YS정권이 들어선 후 조직개편의 와중에서 임용이 계속 늦어져서 약 2년간의 귀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아마도 그때가 제 인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즉, 그때 전 이미 7급시험에 합격하면 행정고시에 도전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으므로, 7급시험 합격 이후 1차시험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시험을 쳤으나 2년 연속 아깝게 떨어지고 공보처(현 국정홍보처)에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Ⅱ. 현실에의 안주 ; 배부른 아마추어 고시생

1. 잘못 끼운 두 번째 단추

‘95. 6월 공보처에 발령이 나서 첫 출근 하던 날 광화문청사 게시판에서 1차 시험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전 인생의 두 번째 단추도 잘못 끼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통상 공무원들의 대부분이 모나지 않은 사람들이고 제가 발령받은 과의 직원들도 대체로 그러해서 일단은 소속과에서 무난하게 생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출근한 지 일주일째 정도 되던 날 과장님으로부터(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불합리한 꾸중(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을 듣게 되었고, 그때라도 그것이 나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박차고 나왔어야 했으나, 타고난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2. 타락의 극치

당시 소속과의 업무와 제게 주어진 업무가 그리 바쁘지 않아서 직원들과의 ‘퇴근 후 한잔’이 일상화 되었고, 현실에 안주하여 극도로 나태해진 저는 한잔이 두잔 1차가 2차로 이어지면서 일주일에 사흘 이상을 술 마시고 새벽에 귀가하는 어리석은 생활로 아까운 20대 후반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97년에는 아무런 준비 없이 의무감에서 1차를 응시하는 무모한 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3. 만시지탄(晩時之歎)

그러던 중 DJ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보처가 해체되었고 전 약 3달간 공무원이지만 자리 없이 광화문청사 대기실로 출근만 하다가 ‘98. 4월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예산처)가 출범하면서 기획예산위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기획예산위원회로 옮기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공보처와 달리 기획예산위원회는 고시출신 직원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서 비고시(7급 내지 9급) 출신의 과장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7급이 과에서 최하위직인 것은 어떤 중앙부처나 마찬가지지만, 공보처에서는 7급이 그런대로 조직에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가지는 반면, 기획예산위원회에서는 그 업무가 거의 집행적인 것으로서 7급의 역할이 극히 한정되어 있어 복사 내지 과 살림 정도 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나이가 점점 들수록 저보다 나이 어린 새내기 공채 사무관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수록 제 가슴은 조직에서의 소외감과 저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황폐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점차 그러한 생활에 적응하여 안주하게 되었고, 나이도 이미 서른이 넘어 집안의 장남으로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행정고시를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하고 늘 시험공고와 합격자발표가 있을 때마다 우울해지는 그야말로 배부른 아마추어 고시생이었습니다.

Ⅲ. 또 다른 시작 ; 새로운 도전

1. 가장이 되는 것과 포기한다는 것

그런데 의외로 빨리 그리고 운 좋게도 지금의 아내와 만나 만난 지 4개월만인 ‘99. 4월 결혼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7급 합격 후 고시에 도전한다”는 막연한 꿈은 실제로 막연하게 접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결혼해서 접게 된 것이 아니라 접기 위해서 결혼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에의 안주와 결혼, 여기서 저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다시 한 번 나타났습니다. 즉 맞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해서 향후 언젠가는 안정된 상태에서 고시에 재도전한다는,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무책임한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의식만 있었지 막상 신혼의 단꿈에 젖어 그러한 생각은 거의 잊고 지냈습니다.

2. 어머니에게 굴복(?)

그러던 중 저에겐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한 어머니께서 저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해 주셨습니다. 애당초 7급시험을 볼 때 부모님과 “7급합격 후 행정고시에 붙는다”는 약속을 했었기에, “그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님의 질타는 마냥 편하기만 했던 저를 해묵은 고민에 빠지게 했습니다.

집사람이 옆에 있는 상태에서 들은 꾸지람이었기에 저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랐으며, 그 자리에서 저는 “고시는 포기했으니 더 이상 고시를 강요하지 말라”는 말씀으로써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렇게 드렸지만 그때까지도 제 가슴 한 구석에는 행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에, 일주일쯤 고민을 한 후 전라북도 부안의 채석강으로 주말여행을 가서 집사람에게 고백을 한 후,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넉넉잡고 3년만 기다려 주시라고”.

그 다음날부터 직장-학원-독서실-집으로 이어지는 고단한 나날들이 계속되었으며, 그 날이 마침 결혼한 지 꼭 5개월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3. 무모한 시작과 반전

그러나 제가 소속된 기획예산처는 DJ정부로부터 개혁의 선도부처로서 밤낮없이 일하는 곳으로서 이런 직장을 다니면서 행정고시 준비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공부를 다시 시작할 즈음 저의 소속과로 새로 부임하신 과장님께서는 제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별로 협조적으로 대해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결국 공부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2000년에 다시 1차시험을 응시했고 예상한 대로 참여하는데 만족해야 했으며, 저 하나를 바라보고 하루하루를 사는 가족들에게 정말 낯을 들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2000년 6월에는 저와 아내의 사랑의 결실로서 큰아들 규태가 태어났고, 그 시점에서 전 뭔가 특단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고시고 뭐고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마침내 휴직과 행정고시에의 올인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휴직하고 응시한 2001년 1차시험에서는 여유 있는 성적으로 합격하여 체면을 세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2차시험이 문제였습니다. 2차시험을 위해 또다시 휴직을 할 수는 없었으며, 결국 그해와 이듬해에 응시한 2차시험에서 어이없는 점수차로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Ⅳ.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며 ; 영광스러운 마무리

1. 시행착오의 반복, 그리고 오기와 끈기

2차시험에 두 번째 떨어지고 난 이듬해인 2003년에 직장을 다니며 응시한 1차시험에 다시 합격하였고 그해 7월의 3번째 2차시험에서 또다시 낙방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께서는 더 이상 행시를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의 욕심이 아들과 며느리까지 고생시키는구나. 이젠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마음 편히 살아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이제는 제가 오기가 생겼습니다. “왜 나는 남들이 20대에 합격하는 행정고시에 이 나이 먹도록 붙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가” 또는 “내가 직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보다 못난 것이 뭐길래 주눅들어 살아야 하는가” 등등.

그래서 또다시 부모님과 아내에게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밀어 주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03.11월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04. 1월 휴직을 한 후 다시 신림동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매일 계속되는 공부가 힘들 때는 부모님, 아내 그리고 두 아들(규태와 규광)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래도 정 견디기 힘들 때엔 비정기적으로 집에 가서 쉬고 오는 식으로 해서, 2~3주에 한 번 가족을 보는 생활이 7월 초 2차시험 볼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진도가 밀릴 때엔 어떤 날은 밤을 새우기도 하고 어떤 날은 3시간 정도만 자고 종일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종전과 달리 이번에는 독서실에 가지 않고 원룸에서 공부했으며 시간이 아까워서 특별한 운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운동량 없이 불규칙적으로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2차시험을 2달여 남긴 5월쯤에는, 신경 쓰여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왼쪽 눈두덩이가 계속 떨리는 이상한 증상이 생겼고, 약국에서 환약·피로회복제 등을 시험 때까지 계속 사먹었으나 별로 호전되지 않았으며 이 증상은 2차 합격자 발표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2차시험 때까지 병원에는 못 가봤고, 약국에서는 피로누적과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만, 2차시험이 끝나고 한약을 먹었는데, 한약 덕인지 아니면 합격했기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이 증상은 2차합격자 발표와 거의 동시에 없어졌습니다.

2. 뜻밖의 영광스러운 종지부

2차시험이 끝나고 좀 쉬었다가 7월말에 복직을 했고 지금의 소속과로 배치 받았습니다. 예산심의가 한창인 기간에 복직을 하게 되어 거의 매일 12시 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등 직장에서 너무 바빠서 2차 발표 때까지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초조한 마음으로 어중간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다른 수험생들보다는 오히려 행복한 나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2차시험에 합격했고, 강화된 3차 면접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스터디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신림동에 모여서 주요 시사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발표하는 면접 실전연습을 했고 많은 도움을 받아, 면접시험을 본 후 최소한 면접 때문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면접을 잘 치렀습니다.

면접이 끝나고 최종 합격자 공식발표 일주일 전, 면접 때 적어냈던 특이사항(현직공무원)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인사위 관계자로부터 받으면서 합격을 직감했지만, 오히려 전화를 받기 전보다 더욱 초조했습니다.
그런데 최종 합격자 공식발표 전날 연합뉴스 기자로부터 인터뷰를 하자는 제의를 받으면서 최종 합격했음을 알게 되었고, 몇 가지 일간지에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고 특히 KBS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저의 목소리가 전국적으로 방송을 타는 등 과분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공부한다고 10년 이상 소식을 끊고 지냈던 지인들로부터 축하전화를 받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구름 위에 뜬 상태에서 11월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3. 2차시험에 관한 소고

지난 7월 2차시험이 끝난 후 거의 전과목에서 시험 직후엔 잘 썼다고 느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실수와 무지함이 속속 생각나서 솔직히 합격:불합격의 가능성을 49:51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점수를 확인해 본 결과 저의 경우, 어떤 과목은 의외로 높은 점수를 받았고, 또 어떤 과목은 생각보다 약간 밑도는 점수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석차는 중상 정도 될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결론은 행정고시 2차시험은 주관식인지라 자신이 받을 점수는 누구도 사전에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행정고시 2차시험은 로또라고도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흔한 말로 열심히 해도 떨어질 수는 있지만,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 붙는 시험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Ⅴ. 나가며 ; 인생을 허비하는 저의 전철을 밟지 않으시길...

1. 인생을 허비한 죄

제가 읽은 합격수기 중 “인생을 허비한 죄” 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행정고시에 발을 들여놓은 후 무려 11년의 세월이 흘렀고(순수하게 공부에 전념한 기간은 4년 남짓 이지만) 그 동안 수많은 마음고생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이제야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제대로 맞추었고, 가슴위에 놓여 있던 큰 바위를 치워버린 듯 홀가분합니다. 또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도리와 체면을 조금은 찾은 듯 합니다.

2. 어리석은 선배의 노파심

이번 합격을 계기로 주위에서 직장과 수험의 병행에 대해 문의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2차 스터디를 같이 했던 아끼는 한 동생도 얼마 전 저같이 7급을 붙은 후 행시를 다시 하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극구 말려서 설득했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읽고 직장과 수험을 병행하려는 분이 계시다면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7급은 행정고시가 끝까지 안됐을 때 해도 충분합니다만, 행시는 바로 지금이 아니면 저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고시는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합격해야만 빠져 나올 수 있는 늪과도 같습니다.

3. 인생의 은혜에 대한 감사

이제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온 저에게 제가 합격하기까지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여러분들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직장생활과 수험생황을 병행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신 (지금은 외국에 계신) 이수원국장님, 김윤석과장님 특히 김주민 사무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분들인 저를 낳아주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 어머님과 아버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 하나만을 믿고 오랜 세월 기다려 준 아내 건경에게도 사랑의 말을 전하며, 우리 두 아들 규태 규광이와도 이젠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내년의 영광을 위해서 정진하고 있을 같이 공부했던 문혁·찬민·경남·순영이 그리고 명훈·순정·혜진씨에게도 행운을 빕니다.

4. 에필로그

이제 제 글의 제목에 대해서 의아해 하시는 분들께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전 이제까지 남들을 가르쳐본 적도, 지도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공보처에 발령받던 날부터 전 ‘이선생님’으로 불리웠고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중앙부처에서는 6급 이하의 직원들은 ○사무관, ○서기관, ○과장 등이 아닌 ○선생님으로 호칭됩니다)

내년 이맘때부터는 ‘이사무관’으로 불리우겠지요. 그 긴 세월의 마음고생의 댓가가 ‘사무관’이라는 호칭은 아닐 것입니다. 그 댓가는 국가, 조직, 가족에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뭔가 더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일 겁니다.

앞으로는 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해온 10년의 공무원생활보다는 훨씬 나은 위치에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나머지 단추들을 제대로 끼울 것을 다짐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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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마이스터스튁 | 작성시간 05.07.09 내게 힘을 주는 합격기군요...
  • 작성자한글이 | 작성시간 05.08.04 정말 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 감동,,,,
  • 작성자gbell | 작성시간 05.08.31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 작성자구라 | 작성시간 05.11.21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 작성자축구소년20 | 작성시간 06.01.23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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