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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같은 내 친구 / 남현숙

작성자이청산|작성시간26.06.13|조회수32 목록 댓글 0

일기장 같은 내 친구

남 현 숙

 

  친구야, 난 네가 선물해 준 빨간 일기장을 펼치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났어. 볼펜은 일기장 위를 서성이다 길을 잃은 듯 우두커니 서 있지만, 내 마음은 너와 함께 했던 시절 너에게로 달려가고 있어.

  지금 생각하니 너는 나에게 일기장 같은 친구였던 것 같아. 읽히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고, 다 채우지 않는다고 등 돌리지 않듯 넌 언제나 조용히 내 곁을 지켜주었지. 말이 없으면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지 않고, 미완성의 생각을 두서없이 던져 놓고 아무 말이나 쏟아내도 정리된 언어로 내 마음을 읽어주는 친구.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잊은 듯 살아가도 내 지나온 시간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 넌 바로 그런 친구야.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알 수 없던 학창시절, 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아. 넌 내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대나무 숲 같은 존재였어. 일기장을 덮어둔다고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너도 내 곁에서 내가 언제든 쉴 수 있는 편안한 마음 쉼터가 되어 주었어. 때론 맑은 호수처럼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조용히 들어주거나 내가 갈피를 못 잡고 헤맬 땐 진지한 조언과 함께 환한 미소도 주었지.

 기억나니? 우리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마도 모의고사 치르기 전날이었을 거야. 우린 공부를 핑계 삼아 만났다가 내 자취방에서 공부는커녕 밤이 늦도록 이야기만 나누었지. 그러다가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 너에게 자고 가라고 나는 애원하듯 매달렸어. 넌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어. 우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지.

  그런데, 새벽녘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잠이 깼어. 잠결에 연탄가스를 마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겁이 덜컥 났어. 미동도 없이 자고 있는 너를 보고 죽은 건 아닌지 걱정되어 마구 흔들어 깨웠지. 영문도 모르고 부스스 일어나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너를 보며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 네가 깨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난 그때 그 상황과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내가 너를 못 가게 잡아서 네가 연탄가스를 마셨다는 생각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

  난 너를 부축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지. 쓰러지듯 마당에 앉아 우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하늘을 바라보았어.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지만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얼굴을 얼얼하게 만드는 얼음장 같은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 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저기 저 별 좀 봐. 엄청 크다!”라고 하던 너의 말에 난 머리 아픈 것도 잊고 까르르 웃었어. 넌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지. 우린 함께 하늘을 보며 한참 동안 웃었어. 그 상황에 그게 왜 그렇게 웃겼는지 모르겠어. 그때 너의 얼굴은 달보다 더 창백했는데도 말이야.

  결석이라곤 해 본 적 없는 우리는 그날도 학교에 가 시험을 봤지. 하지만 시험을 잘 볼 리 없었어. 연탄가스를 마셔 시험을 제대로 못 쳤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난 그 시절을 너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행복해. 아직도 ‘연탄’이라는 단어를 보거나 TV에 연탄이 나오면 그때가 떠올라. 생사의 갈림길에 함께 있었던 친구, 너의 모습과 함께.

  지난번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 대신 짧은 머리와 수척해진 얼굴로 나타난 너를 보고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앞섰어. 오랜만에 만난 네가 암 투병 중이라는 말에 반가운 마음을 한껏 표현해 활짝 웃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옛날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지. 너는 친구들에게 일기를 쓰라고 일기장을 한 권씩 선물로 주었어. 나에게는 예쁜 소녀가 그려진 빨간 일기장을 주었지.

  일기장 같은 내 친구, 언제나 환한 미소로 내 곁을 지켜주던 너. 네가 준 일기장 안에 너의 마음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어. 너의 그 마음 위에 이젠 나의 마음을 가득 담아 보려고 해. 일기장의 종이는 시간이 지나면 빛바래지만, 그 안에 적힌 마음과 추억은 오히려 더 소중해지잖아. 별것 아닌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떠들었던 날들, 너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앞으로의 우리 우정도 일기장에 차곡차곡 쌓아 볼게.

  변화무쌍한 감정선을 오르내리던 학창 시절, 너는 나에게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 사람이야. 오늘은 네가 선물해 준 그 일기장에 그 시절의 온도와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너에 대한 문장을 남기고 싶어.

  “친구야, 난 네가 있어 참 좋아! 내 삶의 소중한 기록이 되어줘서 고마워.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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