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 검증받은 사이
이 애 경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이제는 진짜 내려가야 해.” 남편이 염려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찰 공양주로 보이는 분이 이곳에 눈 오는 일이 정말 드문데, 이렇게 한 번 오면 꼼짝없이 산에 갇히게 되니 빨리 내려가라고 한 지도 한참 지났다.
일출 보기는 이미 포기했다.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미적거린 지도 십여 분이 지났다. 사찰의 오래된 기와 너머 눈발 사이로 하늘과 산과 바다가 천천히 끝없이 열리는 광경은 신비롭다 못해 장엄하다. 지금 이대로 영원할 것 같으면서도 순식간에 시간을 삼켜버리는 듯하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남편과 남해 여행을 나선 지 이틀째 새벽이다. 남해 금산 정상에 자리한 보리암의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새벽부터 눈 소식이 있다는 일기예보를 봤지만, 일말의 기대를 안고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차를 주차하고 이십여 분쯤 걸어 올라가자 어둑하고 흐릿한 날씨에도 기암절벽 위 보리암의 자태는 멀리서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남편이 내려가자고 한 건 그러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눈이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사찰 너머 눈 속으로 희뿌옇게 사라지다가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는 그 어디쯤 머무르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듯 남편 목소리가 물결처럼 일렁인다.
조금 전에 올라온 길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눈으로 소복이 덮인 산길은 가히 절경이다. 그 속에 우리만 존재하는 것처럼 이내 사라질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남기며 나란히 걷는다. 아마 내려오던 그 길 어디쯤에선가 내가 그랬을 것이다. “참 좋네. 이렇게 편한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이처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게. 앞으로 둘이 자주 여행 다니자.”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특별히 좋은 숙소에, 좋은 음식, 좋은 곳을 다닌 것도 아니다. 그대로 그냥 편안했다. 남편과 함께한 3박 4일 동안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나와 다르게 계획적이고, 매사 분명하고, 민감하고 신중한 경향이 있는 남편은 위험하다고 예측되는 일은 시작하지 않는 편이었다. 서로 다른 성향 때문에 종종 어딘가 나서기 전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갈등이 고조되어 ‘다시는 같이 어디 가나 봐라.’라며 마음에 되새기곤 하기도 했었다.
눈 온다는 소식에 예전 같았으면 애초에 보리암 근처도 안 왔을 텐데. 눈발 날리는 보리암에서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준 남편이 고마웠다. 눈 쌓인 내리막길을 조심하며 주차장까지 오는 중에도, 주차장에서 그 아래 큰 도로까지 차로 구불구불 굽은 길을 거북이걸음으로 움직이면서도 타박 한마디 하지 않는다. “일출은 못 봤지만, 그래도 보리암에 자주 안 온다는 눈을 우리가 맞고 가네.”라고 말하는 남편에게서 오히려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날 땅끝마을로 향하는 길에 들른 백련사를 시작으로 사찰과 고택 탐방을 해보기로 했다. 강진 다산초당, 해남 녹우당, 대흥사, 미황사를 거치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만족하며 그 시간에 머무른다. 쉬고 싶을 때 쉬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며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은 그대로 하뭇하다.
그러고 보니 전날도 그랬었다. 장소를 정하고 차로 이동 중에 작은 서점을 발견했다. 좀 전까지 계획에 없던 곳이라 시간이 지체될 걸 알면서도 잠깐 들러 보고 싶다고 했었다. 남편은 “그래, 그럼 가 보지 뭐.”라며 흔쾌히 방향을 돌렸다. 오래된 목욕탕을 그 모습 그대로 살려 꾸민 이색적인 곳, 서점 이름도 ‘은모래마을책방’이다. 정감이 간다. 주인장이 ‘헌책’이 아닌 ‘시간으로 검증받은 책’이라고 부르는 중고 서적 코너에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만났다. 좋아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집에 읽지 않은 책이 천지다. 읽지도 않을 책 뭐하러 사냐?”라는 말을 꺼내는 대신 선물이라며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래, 그런 것들이 감동을 주었나 보다. 무엇을 해도 뭘 하지 않아도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며 무심한 배려가 나를 감동하게 한다. 그 감동들이 나에겐 여유로움과 편안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 혼자만의 착각이지 않기를, 남편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본다.
앞에 놓인 남편이 선물한 시간으로 검증받은 책을 보며, 30여 년간 함께 해온 ‘시간으로 검증받은 우리 사이’를 가만히 펼쳐 본다. 겹겹이 쌓아 온 추억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처럼 ‘사이 좋은 사이’로 수많은 감동을 쌓아가는 행복을 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