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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 편영미

작성자이청산|작성시간26.06.14|조회수30 목록 댓글 0

은행나무

 

편 영 미

 

  진종일 비가 내렸다. 봄 가뭄 앓는 대지를 달래는 반가운 비다. 늦은 귀갓길 거리는 비안개가 피어오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가 어지럽다. 비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어린 새잎들인가? 새잎의 때 이른 낙화 생각에 밤잠이 편치 않았다.

  집 주변으로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있다. 사람들은 은행 나무하면 황금빛 단풍을 먼저 떠올리지만, 나는 계절마다 다른 나무의 숨결을 즐긴다. 가을의 눈부신 화려함을 내려놓은 겨울나무는 빛바랜 잎을 겨우 몇 개 매달고 서 있다. 앙상한 나무의 실루엣은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를 생각나게 한다. 울퉁불퉁 거칠게 패인 회갈색 외피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비움의 미학을 전하기도 한다. 낙엽조차 사라진 길을 찬바람도 잊은 채 걷는다. 나무의 고독을 함께 느끼며 깊은 사색에 잠겨 드는 시간이 좋다.

  긴 추위를 이겨내며 창백해진 빈 가지에 생명의 촉들이 기지개를 켠다. 여린 새잎이 핀다. 앙증맞은 부채모양의 잎이 도심의 불빛과 어우러져 눈부시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몸의 여기저기가 간질간질하다. 내 몸에도 연둣빛 싹이 돋을 듯하다. 그래서 봄밤엔 마실 가는 날이 잦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시간 연두는 초록을 향해 질주한다. 잎은 무성히 자라 초록의 뭉게구름을 만들어 이고 더위를 식힐 그늘을 내어 준다. 짙은 초록은 경건해지는 삶의 속내처럼 웅숭깊다.

  가을엔 웃지 못할 추억이 있다. 둘째를 가졌을 때니까 25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 은행이 건강에 좋다고 크게 붐이 일었다.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은행을 따거나 줍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루는 이웃 몇 분이 은행 주우러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일행은 은행을 주우며 앞서가고 그 뒤를 멀찌가니 따랐다. 터진 은행을 밟지 않으려고 지뢰밭을 걷듯 조심조심 걸었다.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일행들의 봉투가 묵직하다. 고약한 냄새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며칠 후 온몸에 울긋불긋 전쟁이 났다. 심한 곳은 물집까지 잡혔다. 병원에 가니 은행 알레르기라고 한다. 임신 중이라 먹는 약은 생각지도 못하고 바르는 약도 아주 순한 거로 받아왔다. 정상적으로 약을 쓸 수 없으니 잘 가라앉지도 않는다. 보름 넘게 참기 힘든 가려움과 싸워야 했다. 그때 이후 은행이 노랗게 익을 때쯤이면 은행나무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된다. 은행나무 근처만 가도 몸에서는 신호가 온다.

  아침 일찍 은행나무 아래 섰다. 다행히 새잎이 아니다. 뭔가하고 쭈그리고 들여다보는데 “은행나무 꽃이네요.” 운동복 차림의 인상 좋은 분 말씀이다. “은행나무도 꽃이 피나요?” 내 반응이 반갑다는 듯 은행나무 꽃 이야기를 들려준다.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라 암나무와 수나무에 피는 꽃의 모양과 기능이 다르단다. 수술이 성숙하면 꽃밥을 터뜨려 꽃가루를 바람에 실어 암꽃에게로 날려 보낸단다. 임무를 마친 수꽃은 장렬하게 지상으로낙화하고,암꽃은 열매를 맺는단다. 지금 발아래 있는 것은 수꽃의 잔해라고 한다.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을 모르고 살았다고 미안함을 담아 쓴 안도현 시인의 ‘애기똥풀’이란 시를 읽으며 웃었는데, 오십이 넘어 은행나무 꽃을 본다. 마른하늘에 번개가 지나간 듯 전율이 인다. 놀라워라!

  먼저 인터넷으로 암꽃, 수꽃의 사진을 찾아 꼼꼼히 살펴본다. 수꽃은 한 개의 긴 꽃대 둘레에 여러 개의 작은 꽃들이 달려있다. 크게 확대해서 보니 작은 바나나 송이 같기도 하다. 반면 암꽃은 잎겨드랑이 사이에 돋은 꽃자루 끝에 밑씨 두 개가 박혀 있다. 꼭 곤충 사마귀 눈처럼 보인다. 밑씨는 찐득한 진액을 품고 있어 수꽃의 포자가 날아와 붙으면 절대 놓지 않고 은밀한 사랑을 한다. 그리고 암꽃은 씨앗을 품는다. 우리가 열매라고 알고 있는 은행은 씨앗이다.

  꽃은 키 큰 나무 위 새잎 사이에 피어 있다. 다른 꽃들처럼 화려한 꽃잎도 없고, 색깔도 새잎과 비슷한 색이다. 눈에 잘 띄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만나는 사람들에게 은행나무 꽃 이야기를 하면 나와 비슷한 반응이라 위안 아닌 위안을 받는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도 한다. 식물이 대부분 멸종한 빙하기를 거치고도 거뜬히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강인한 생명력이다. 더불어 병충해에도 강하며 잎은 공기를 정화하고 유해 중금속을 빨아들인다. 이 외에도 은행나무는 가로수로 적당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도심을 지키고 있다. 일 년 중 한 달여 씨앗의 악취나 알레르기 때문에 멀찌감치서 즐겨야 하는 불편쯤은 감수할 만하다.

  초록 그늘 깊어지는 유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가벼운 걸음으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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