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鑑賞] 김소연의 [이 순간,] / 조재룡(문학평론가)
이 순간,
김소연
나는 주머니 속에서 불거져 나온 주먹처럼
너는 주먹 안에 쥐어진 말 한마디처럼
나는 꼭 쥔 주먹 안에 고이는 식은땀처럼
너는 땀띠처럼
너는 높은 찬장 속 먼지 앉은 커다란 대접처럼
나는 담겨져 찰방대는 한 그릇 국물처럼
너는 주둥이를 따고 몸을 마음에게 기울인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따라지기를
나는 기울였다 세워진 술병처럼 반은 비어 있다
마개처럼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몇 바퀴를 돌다 멈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너는 벽을 껴안고,
나는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너는 고맙다며 두 팔을 뻗고,
나는 미친 척하고
너는 제정신인 척하고
나는 부딪힐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빗방울이 되어
흔적만이 환한 눈송이가 너는 되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행복한 너와
이미 만났었기 때문에 괜찮다는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나와
심장이 제대로 뛰기 시작하는 너는
이제야 죽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지는
이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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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鑑賞] 조재룡(문학평론가)
인연이라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나 경험이 없었다. 인연이 없으니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는 말처럼 인연은 주로 억울한 경우에 불려나왔기 때문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이제는 그 말뜻을 조금 알 것 같다. 인연은 순간과 동의어였던 거다. 우리는 오로지 순간에만 서로를 이해할 뿐이며, 그런 순간이 이어지고 지속되어 작은 사건 하나를 만들고, 자그마한 사건들이 연결되어 관계를 만들어낸다. 우연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거기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을 제거해내고서, 바로 이 순간-사건-관계의 세로축을 동시대에 살고 있는 타인이라는 가로축에 포개어내는 알 수 없는 힘이다.
― <http://cafe.daum.net/poet48/AsB2/437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