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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얻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 그것들이 너희들의 영혼 안에서 피어나지(세미나 논의와 교과과정 강의, 2011, 197)."

작성자공감교육연구소|작성시간25.12.13|조회수25 목록 댓글 0

  "학교에서 얻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 그것들이 너희들의 영혼 안에서 피어나지(세미나 논의와 교과과정 강의, 2011, 197)."

 

  사실 학교뿐만 아니라 일상 삶이 모두 -아이들의- 영혼안에서 피어나야 한다. 그럴려면 먼저 아이들의 영혼에 일상 삶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에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사회 포함)이 이러한 연결을 끊고 있으며, 나아가 배제해서 서로를 무관하게 전혀 관계가 없는 상태로 만든다. 조야하게 말하면 영혼이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 피어나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인간의 삶이 말로 할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우리에게 늘 화두인 창조, 이제는 모방에서 벗어나 창조로 나아가야한다는 이야기도 여기에 궁극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따라서 해결 방법은 아이들의 영혼이 피어나게 해야 하는데, 문제는 정신이 보이지 않아서 드러내서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체험하는 방법으로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 정신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그래서 필자가 한 체험을 통해서 정신을 살펴볼 것이다. 

 

  사실 인간의 발달단계는 정신이 발달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정신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는 보이는 육체의 발달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정신의 발달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야 그나마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슈타이너가 굉장히 많은 강연을 하고 책을 집필, 현재 저작물과 강연록은 약 360권에 이른다- 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와 정신을 발달시키는 방법들이다. 요컨대 정신을 360도 관점에서 조망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이쪽 면, 또 다른 쪽면을 설명한 것이다. 조금씩 이해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전 부분이 보인다는 생각도 한다. 

 

  첫번 째 체험이다. 필자는 초등 6학년 무렵에 수학공부가 어렵다는 사실을 느꼈다. 선생님은 설명하는데 필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른 친구들 얼굴 표정을 살핀 기억도 남아 있다. 당시 필자는 친구들 얼굴에서 '모른다'는 표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상하다'. '나만 모르는가' 그 이유가 뭘까를 혼자서 무척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찾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문제를 외우는 상황까지도 나아갔다. 그 이유를 먼저 말하면 정신의 속성에 따른 방법이 아니어서 정신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정신이 받아들여야 이해가 되고 이어서 나아가는데 정신이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거기에서 길이 끊긴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부분에서 이해가 안된다면, 그것은 정신과 연결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또 어떤 부분에서 흥미를 느낀다면, 그것은 정신에 연결되어서 정신이 길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에 연결이 중요하지 자신의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오히려 용기를 내서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문이 풀린 것 역시 슈타이너 공부에서 였다. 

 

  먼저 말하면, 정신은 인간의 전체(몸과 마음)에 분포되어있어서 연결될려면 전체가 먼저 파악되어야 한다. 당시 필자가 배운 수학은 2+3=5로,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은 전체를 보고자 하는데, 전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길을 잃은 지점이다. 

 

  다음은 정신의 속성으로 가르치는 방법이다. 먼저 5를 말하고 5는 2와 3을 합한 것이다. 그리고 2+3은 5이다라고 설명한다. 여기까지는 그런가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 5 속에는 4와 1도 있다라고 말하면, 순간 5가 확 받아들여진다. 정신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정신이 받아들이면 그 기쁨은 공자가 말하는 '희열'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벅차오르면 정신이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정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짜증이 나고 힘이 든다. 이는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매우 당연하다. 이렇게 5가 이해되면 차차 다른 부분으로 전이가 되어서 정신이 수학을 받아들인다. 현재 많은 아이들이 수학을 포기하는 사태가 결코 아이들의 탓만은 아닌 것이다.

 

  "덧셈은 합계에서 시작하고 뺄셈은 나머지에서 시작합니다. 곱셈은 적수에서 나눗셈은 몫에서 발달시킵니다(위 책, 260)." 되풀이하지만 전체를 파악하게 해주어야 정신에 연결된다.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반드시 이렇게 가르쳐야 아이들의 정신에 수학이 연결된다. 문제는 교사의 정신이 받아들여야 이를 이해하고 또한 아이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두번 째로 필자는 논리(?)가 어려웠다. 논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니 글을 쓰기도 어려웠는데,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가 하면은 처음 발단은 초등 6학년 무렵 인듯하다. 선생님이 글을 쓰라고 했는데, 필자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당시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쓸 수가 없었다. 그 후 글을 쓰기가 어려웠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초등 아이들에게 글을 쓰라고 할 때는  반드시 체험한 것을 쓰라고 해야지 체험하지 않은 것, 추상적인 내용을 글로 쓰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당시 글 소재가 필자가 체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한 것이다. 이것 또한 정신에 연결되기 위해서 체험을 해야 한다.

 

  필자가 글을 쓴 것은 어느 순간 필자의 생각을 글로 쓰면서 부터이다. 그 이후부터 저절로 글이 써졌는데, 이또한 정신이 글에 연결되어서 길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물론 글의 수준은 많이 미흡하다. 

 

  둘째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의 논리는 결론, 판단, 개념형성으로 나아간다. 현실에서는 세 부분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자세히 보면은 그렇게 순차적으로 형성이 된다. '결론'은 현실에서 깨어있는 의식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동물원의 사자를 보면은 사자라고 결론을 짓는데, 이렇게 결론은 현실의 깨어있는 의식에서 이루어진다.

 

  '판단'은 꿈꾸는 의식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사자가 '용감하다'는 판단은 꿈꾸는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꿈꾸는 의식이 감정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하는 판단에 자신의 감정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나쁜 감정이 있다면 판단 역시 우호적이지 않을 수가 있다. 자신이 어떤 판단을 한다면, 감정에 휩쓸리면 이성적인 판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꿈꾸는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아이들의 영혼에 습관을 형성시킨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선생님의 판단이 아이들의 영혼에 습관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이를 염두에 두어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개념'은 인간의 잠자는 의식에서 이루어진다. 잠자는 의식은 인간의 신체에도 영향을 준다.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신체도 변화하므로 가지는 개념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개념이 살면서 얼굴에 드러난다고 한다(슈타이너의 주장). 그 사람이 가진 개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얼굴이 밝을 수도 어두울 수도 있는 것이다.

 

  사자는 결론으로 현실의 깨어있는 의식, '사자는 용감하다'는 판단은 꿈꾸는 의식, '용감한 사자'라는 개념은 잠자는 의식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응용해 보면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여름에 풀밭을 보면서 '푸르러진다'라고 말하면 결론이다. 이어서 '풀밭이 푸르러진다'라고 말하면 판단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푸르른 풀밭'이라고 말하면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논리 과정을 익히면 정신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신이 받아들여야 '논리'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연습한 결과 정신이 발달하는 것이다. 이런 연습을 거쳐야 인간의 의식이 활성화될 것이고, 나아가 우리가 자주 보는 그런 격차(?)까지도 생기게 된다. 정신은 현실의 깨어있는 의식에서 꿈꾸는 의식으로, 꿈꾸는 의식에서 잠자는 의식으로 순환을 하기 때문이고, 그런 순환을 경험하는 것이 정신의 발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창조에 관한 체험이다. 슈타이너는 아이들이 처음에 학교에 와서 소묘작업, 그리기부터 시작하라고 하였다. 읽기나 쓰기가 아니라 선그리기, 굽은 선, 직선 등으로 소묘를 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주장을 한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단순한 모방을 모두 도외시해야 합니다 (발도르프 교육방법론적 고찰, 2009, 31). 여기에서 필자는 단순한 모방을 도외시하는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대부분 어떤 것을 보면 모방을 하라고 하는데, 심지어는 모방에서 창조가 나온다고까지도 하는데, 슈타이너의 주장은 분명 이와는 다르다. 

 

  그리고 그 이유이다. "이런 저런 것의 형태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된 형태들에서 시작해서 형태 자체에서 어린이의 흥미를 밀깨우고자 노력할 것입니다(발도르프 교육방법론적 고찰, 2009, 32). 아이들이 형태를 그릴 때 모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 자체에 부족함이 있는지, 또 서로 연결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지 파악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 전체가 형태를 보아야 하고 그렇게 본  형태에서 문제를 찾는다는 말이다. 이는 몸 전체가 움직이는, 정신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정신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기가 창조와 모방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만약 모방을 하라고 한다면 머리만 움직이게 된다. 정신은 일깨워지지 않는다. 창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정신이 일깨워지면 창조가 일어나고 머리만 일깨워지면 모방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공지능 시대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하게 되면, 인간으로서 인공지능을 관리하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자신의 삶 전체를 송두리채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결과 속수무책으로 인공지능에게 인간이 당한다. 무섭고 안타까운 일이다.

 

  어차피 정신은 인정되지 않고, 그로 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돌이키기에는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이 있겠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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