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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15.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롬8:18–25)

작성자선한목자|작성시간26.06.06|조회수40 목록 댓글 0

로마서강해15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롬8:18–25)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들어가는 말

우리의 인생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 경제적인 어려움, 관계의 아픔, 믿음 때문에 받는 오해와 핍박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고난이 있는가?" "성도도 왜 눈물을 흘리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질문에 답합니다.

바울은 고난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에게도 분명히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보다 더 큰 것을 바라봅니다. 바로 장차 나타날 영광입니다.

성도는 현재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1.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18)

고난 이라는 단어 παθήματα(파데마타, “고난들”): 단수보다 복수로,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포괄합니다.

(육체·관계·영적 싸움·박해 등).

 

이 고난에는 몸이 아픈 분들의 통증, 마음이 무너진 분들의 우울, 관계가 깨진 분들의 상실, 경제적 압박 속에서 숨이 가빠지는 분들의 한숨, 죄와 싸우다가 지쳐버린 성도의 탄식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을 현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고난이 실제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고난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현재일 뿐, 최종 판결이 아닙니다. 현재는 잠시 머무는 계절이며, 마지막 목적지가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잊으셨다. 너의 삶은 망했다. 너의 끝은 이 눈물이다.”

그러나 복음은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너의 삶은 십자가로 이미 붙들렸다. 너의 끝은 눈물이 아니라 영광이다.”

사실 바울은 고난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고, 매를 맞았고, 굶주림과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육체적 고난: 40대에서 하나를 감한 태형(유대인의 매)5번 맞았고, 3번 로마 매로 맞고, 1번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자연재해 및 위험: 3번의 파선과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표류했으며,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사회적/관계적 고난: 동족인 유대인과 이방인, 심지어 거짓 형제들에게 숱한 박해와 배신을 당했습니다.

/영적·정신적 고난: 굶주리고 헐벗었을 뿐 아니라, 날마다 모든 교회를 향한 염려와 영적인 부담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과 영광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고난은 영광과 비교 자체가 안 된다."

 

/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는 표현은 특히 아름답습니다.

영광은 단지 미래의 보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광은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은 가려져 있고, 덮여 있고, 때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드러납니다.

씨앗 안에 숲이 숨어 있듯, 지금 우리의 연약한 몸과 흔들리는 마음 안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숨겨져 있습니다.

영광은 우리가 만든 업적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흘러오는 영광입니다.

 

/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단지 천국의 금 길입니까.? 단지 고통이 없는 상태입니까?

물론 하나님 나라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다시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광 δόξα(독사)는 단순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무게·광채를 포함합니다.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주어지는 참여적 영광입니다.

영광의 중심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는 은혜,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지식이 온전히 밝아지는 날,

성령의 빛이 우리 존재의 모든 그늘을 몰아내는 날, 그리고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날입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래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영화로운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썩어질 육신이 아닌 썩지 않고 흠 없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 질고와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상태입니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자연 만물(피조물)과 우리의 연약하고 병든 육체가 모든 질고와 죽음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영원한 상속: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자녀로서의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하고 고난을 겪지만, 그날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임이 온 우주 앞에 완전히 드러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얻으신 그 영광의 형상에 우리도 참여하여 영원히 왕노릇 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걸 구속사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도 먼저 고난받으시고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이며, 장차 그 영광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2.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회복을 기다립니다(19–22절)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8:19-22)

 

바울은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타락의 영향은 인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죄 이후 온 세상이 저주 아래 놓였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그래서 자연계도 신음합니다. 홍수, 지진, 질병, 죽음, 파괴가 가득합니다.

본문은 이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종말론적 회복

피조물이 탄식한다는 표현은 피조물은 지금도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회복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입니다.

 

(21:1, 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날에는 사망이 없고, 눈물이 없고, 저주가 없고, 질병도 없게 됩니다.

피조물도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성도도 탄식하며 구속의 완성을 기다립니다. (23절)

 

(8: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더 깊이 탄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은 죄를 더 아파합니다. 세상의 악함을 더 괴로워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더 절실히 느낍니다.

 

바울은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변화된 상태는 아닙니다. 우리 몸은 여전히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썩을 몸이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라나타’ "아멘 주님, 어서 오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고전15:51-53)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것이 바로 몸의 구속입니다.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Already but Not Yet).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 영광의 몸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순례자로 탄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순례하는 교회입니다.

<나는 순례자>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날 기다리는 밝은 곳에-

곧 돌아가리. 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나는 순례자- 방황하지만

예수 내 구주 이끄시네-

영광의 나팔 소리 들릴 때, 천사 날 위해 찾아오리.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날 기다리는 밝은 곳에-

곧 돌아가리. 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나는 순례자- 피곤한 몸을

하늘나라에 누이시네-

주 볼때마다 영광 나타나, 승리을 위해 찬양하리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날 기다리는 밝은 곳에-

곧 돌아가리 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4.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기다릴지니라" (8:24-25)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나 요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기다렸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25년을 인내한 믿음의 여정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구체적인 시간은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약속이 더디게 성취되자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인간적인 조급함이 앞섰습니다. 그 결과,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고, 이는 훗날 가정 내의 큰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은 13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나타나셔서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며 다시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는 온전한 기다림을 작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25년이라는 기나긴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증명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다림은 아브라함의 삶을 '실패와 조급함'에서 '절대적인 순종(이삭을 바친 사건)'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기다림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자,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 모세는 어떻습니까?

모세의 120년 인생을 40년씩 3단계로 나누며, 각 단계마다 하나님이 다루시는 '기다림의 주제'가 달랐습니다.

- 애굽 왕궁의 40("I am Something" - 내가 하려는 기다림): 모세는 자신의 힘과 타이밍(혈기)으로 동족을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열정이 하나님의 때보다 앞설 때, 영적 기다림은 시작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미디안 광야의 40("I am Nothing" - 나를 비우는 기다림):영적 상태: 철저한 무명(無名)의 양치기로 지내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를 뼈저리게 배운 시기입니다. 사도행전 730절은 이 세월이 무의미한 방치가 아니라 "사십 년이 차매"라는 하나님의 밀도 있는 계획의 시간(플레로오)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출애굽과 이스라엘 광야의 40("God is Everything" -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기다림):영적 상태:

"나는 못 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를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홍해 앞에서 백성들이 두려워 떨 때, 모세는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고 선포합니다. 이때의 기다림은 절망의 멈춤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향한 적극적인 신뢰입니다.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도 모두 이 보이지 않는 약속을 바라보고 인내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1)

 

성도의 기다림은 세상 사람의 기다림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재만을 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영광을 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눈물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 결론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둘째, 피조물과 성도 모두 구속의 완성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셋째, 성도는 보이지 않는 구원의 완성을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난과 탄식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듯이, 탄식 뒤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눈물 뒤에는 기쁨이 있고, 고난 뒤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은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예화) 1594년 초 칼빈의 건강이 심히 나빠졌습니다.

평생 두통, 천식, 소화불량, 열병, 담석증에 시달리는 육신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임무에 충실했다고 합니다.

몸은 더욱더 쇠약해져 신장염이 악화되어 그는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해 425일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심을 감사하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얼마 안되는 유산을 제네바 대학과 가난한 외국인에게 남겨달라고 부탁하고, 주의 일을 하면서 자신이 분출한 노가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했답니다.

428일부터 몸이 점점 약해졌으나 정신만은 또렷했는데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지만 제자들에게 사역에 충실하고 낙심치 말라고 권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5278시 무렵 칼빈은 평화롭게 주님의 품에 안겨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칼빈은 너무나도 평온했고 손발에 아무런 경련도 없었으며 심지어 깊은 숨을 내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칼빈은 오늘 본문 말씀을 15번 암송했다고 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우리가 다 아시다시피 기독교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꽃을 피웠던 역사는 로마 10대 황제들의 박해시대였습니다.

맹수에게 찢기는 살육의 순교, 십자가에 화형을 당하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던 초대교회 우리 선배님들이 겪었던 고난은 그들이 그 당시 겪었던 고난은 그들이 천국에 입성할 때 지금도 받고 앞으로 영원토록 받을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카타콤 (지하 묘지이자 피신처)유래: 고대 로마 시대,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 지내며 예배를 드리고 시신을 매장했던 지하 무덤입니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데린쿠유(Derinkuyu)라는 곳이 있습니다.

기원전 7~8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 도시입니다. 지하 85m(최대 지하 8층 개방) 깊이에 2만 명의 인원이 거주할 수 있는 방, 교회, 학교, 마구간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외 이런 지하도시가 생겼을까요? 바로 기독교 탄압입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박해 속에서 성장했으며, 박해를 받을수록 신앙인은 더욱 확산되어 갔습니다.

왜 답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오늘도 이 약속을 굳게 붙들고, 오늘도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현재의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탄식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속의 완성을 기다리는 굳건한 믿음을 주옵소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끝까지 인내하게 하시고,

주님의 재림과 우리 몸의 속량을 날마다 사모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현실의 어려움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두게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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