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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따라가는 여행

ㅡ 국립공주박물관 ㅡ

작성자한반도|작성시간26.06.20|조회수1 목록 댓글 0

국립공주박물관

공주박물관 반죽동 석조와 ㅡ중동석조(보물 제148호ㅡ 제149호)

중동석조(보물 제149호)

 

백제시대 석조로 사찰에서 연꽃을 담아 장식했던 것이다.원래는 공주시 반죽동의 대통사 터에 공주 반죽동

 

석조와 함께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 위해 옮겨가 제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1940년

 

이 곳으로 옮겨올 당시 중동초등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중동석조'라 부르게 되었다.


규모에 있어서 반죽동 석조보다 약간 작을 뿐 양식이나 조각 수법이 동일하여, 어느 한 건물 앞에 한 쌍으로

 

두기 위하여 동시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믿어진다. 석조를 받치고 있는 받침 기둥은 일본군에 의해 깨어져

 

없어지고, 이후 반죽동 석조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원기둥에 연꽃을 둘러 새긴 모습이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 모양으로 입구 가장자리에 굵은 돌기를 돌렸다. 바깥 면에는 2줄의 작은 띠를 돌려 새기고, 띠 위에

 

일정하게 연꽃을 장식하였는데 반죽동 석조에 비하여 많이 닳지 않아 문양이 훨씬 뚜렷하다.


대통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 (529)에 창건된 사찰이므로, 이 석조는 그 제작년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석조의 형태나 연꽃무늬는 백제의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그 가치는 반죽동석조와 아울러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반죽동 석조(보물 제148호)

 

대통사터에 있었던 백제의 유물로, 절에서 주로 연꽃을 담아 장식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40년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통일신라시대의 직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잎을

 

장식한 받침기둥 위에 놓인 이 석조는 바깥 면에도 풍만한 연잎과 단아한 띠를 돌려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현재 비바람에 의하여 장식무늬가 많이 닳아 있다. 

통일신라 9세기 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공주 서혈사지, 통일신라, 보물 제979호

 

공주 서혈사터에서 출토된 3구의 불상 중 하나이다. 서혈사지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작은 규모로 운영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본격적인 사찰로 운영되었다.머리는 나발이고  얼굴은 약간 길고 눈·코·입 등은 아주 작게 표현

 

되었다. 옷은 통견이고 두께가 얇아보인다. 옷주름은 배부분에서 곡선을 그리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규칙적인

 

가는 평행선이 약한 느낌을 준다. 결가부좌로 발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불상이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되어있는데, 상대는 앙련, 하대는복련을 새겨  넣고 있다

 

.활기차고 생동적인 면이 사라지고, 세부조각, 특히 옷주름의 표현에 있어 도식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불상광배 ㅡ, 공주 금학동, 백제 7세기

받침있는 동탁은잔 (왕비)

 

연꽃과 신선 세계가 정교하게 새겨진 ㅡ받침이 있는 은잔. 

 뚜껑과 받침이 딸린 은잔에는 봉황이 날갯짓하는 산봉우리를 용이 떠받친 정경이 층층이 새겨져 있다.

 

뚜껑과 잔 위아래로 액자처럼 둘려 있는 연꽃무늬는  이상향을 그린 것이다

 

은잔은 왕비의 머리부근에 놓여 있었던 은으로 만든 잔이다. 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었고, 잔받침은 동으로

 

제작하였다 뚜껑의 꽃봉오리 모양 손잡이 아래를 금꽃잎으로 장식하였고, 뚜껑과 잔, 받침의 겉면에는

 

산과 골짜기.노니는 짐승.나무.연꽃잎.구름.용을 새겨 극락정토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6세기  백제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연꽃과 신선 세계 등 정교한 문양을 통해 가장 잘 담아낸 유물이다

은잔에 새겨진 그림. 용, 봉황.나무,짐승, 구름, 연꽃잎 등이 새겨져 있다. 중국 남조에서 성행했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여겨진다

왕과 왕비의 꺼묻거리

무령왕릉 널길 출토유물 (복제품)

무덤 입구를 지키던 동물상인 석수(石獸) /진묘수 (국보 제162호)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동물의 상으로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한다.무령왕릉 석수는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진묘수를 무덤에 넣는 전통은 중국 한대에 유행하였으며, 무덤을 지키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진묘수'는 입에 붉은 칠을 하여 나쁜 기운을 쫓고

 

발에  녹색 채색을 하여 무덤을 지킴이 역활과  몸통에 날개문양은 망자를 좋은 세상으로 안내한다

무녕왕 묘지석 국보 제163호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사마왕은 무령왕 생전의 칭호이고, 무령왕은 돌아간 뒤에

 

붙인 이름이다)무녕왕이 62세가 되는 계유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월

 

12일에 장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 한다"는 내용으로.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샀음을 밝힌 것이다.거기에는 "돈 일만문(文)과 은 일건을 주고 토왕,토백,토부모와

 

상하 지방관의 지신들에서 보고하여(왕궁의) 서서남방의 땅을 사서 묘 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세겨져 있다  왕의 매지권 앞 면은 무녕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 무녕왕의

 

사망시 나이와 시신을 능묘에 안장한 시기 . 왕비의 매지권 앞면은 무녕왕보다 3년 뒤에

 

왕과 합장한 사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무령왕 목관 ㅡ금송

무령왕의 목관

 

 .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은 왜의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금송으로 만들었다.

 

관 뚜껑은 중앙 판재를 중심으로 계단식으로 겹치게 하였는데 왕은 5개, 왕비는 3개를 사용하였다.

 

 왕과 왕비의 목관에 사용된 못과 고리는 재질과 형태에서 차이를 보인다

국보 제154호 무령왕 금제관식

 

왕의 머리 부분에서 2점이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을 오려 인동꽃 무늬를 맞새김하였는데, 역동적이고

 

 강한 상승감을 준다. 왕비의 관 꾸미개와는 다르게 구멍을 뚫고 금실로 달개를 달아 화려하게 만들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에 “왕은 자줏빛 큰 소매가 달린 도포를 입고 금꽃으로 꾸민 검은 비단

 

모자를 썼다…”라는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백제는 금을 얇고 섬세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왕이

 

사용했던 금 관꾸미개. 검정색 비단 모자에 아래쪽 뾰족한 침을 꽂아 고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인동초

 

줄기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가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달개 장식이 달려 화려하다

왕비의 관 꾸미개. 

 

가운데 꽃병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이다. 달개 장식 없이 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왕과 왕비의 관 꾸미개는 금 함유량 98% 이상으로 순금에 가깝다

용 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왕)

허리띠고리 ㅡ허리띠 꾸미개(왕)

톱니모양의 금팔찌. 크기가 작아 왕비가 어린시절에 사용했거나 가족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수저. 무덤 입구에 놓여 있던 제기 중 하나이다

국보 제157호ㅡ무령왕비 금귀걸이

국보 제157호무령왕비 금귀걸이

 

무거운 것을  투박한 것을 

 

 차가운 것을  가볍게 들어 올리다

 

가벼운 것으로  섬세한 것으로

 

온화한 것으로 가볍게 들어 올리다

 

 연꽃위로 넝쿨진 덩굴줄기 위로

 

란 줄기 불꽃으로 휘감아 가볍게 들어 올리다

 

  왕비마마 태후마마 공주마마님들 

 

궁궐의 긴 회랑을 거니실 때

 

  저 발걸음의 사뿐하고 날렵한 

 

발뒤꿈치를 사알짝 들어 올렸을까 ---중략---

 

                                                 ㅡ 상희구 시인 ㅡ

무녕왕비 은제팔찌ㅡ국보 제 160호

 

왕비의 왼손에 끼워져 있었던 것으로 2점이 발견되었다.  팔찌 안쪽에 만든 사람과 일자가 새겨져있다.  

 

은팔찌에는 안쪽에 '경자년(520년)에 대부인(즉 왕비)을 위해서 '다리(多利)'라는 사람이 팔찌를 만들었는데,

 

230주이의 은이 들어갔다'는 "팔찌의 주인" "만든시기""만든사람"의 이름이 정확히 새겨져 있다.여기에서

 

주이는 무게의 단위로 추정된다 다리(多利)는 기록으로 나타난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가이며, 일본의 호류지

 

삼존불의 작가인 도리의 집안 선조였으리라 여겨진다. 팔찌의 바깥면에는 혀를 길게 내밀면서 머리를 뒤쪽으로

 

돌리고 발이 3개인 두 마리의 용이 막 꿈틀거리듯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었는데, 그 솜씨에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발톱과 비늘이 섬세하게 표현된 한 마리 용의 꼬리가, 다른 용의 목 밑으로 들어가

 

포개어진 채, 바깥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제작수법과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520년에 만들어졌고

 

왕비가 526년에 사망했으니  무령왕릉비가 살아있을때부터 찼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 금제뒤꽂이, 국보159호,

 

관장식과 함께 관모를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뒤꽂이는 머리에 꽂아 머리모양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뒤꽂이 자체의

 

장식으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장식적인 용도를 가진 장신구이다

무령왕릉 흑옥 탄목목걸이

 흑옥제는 벽사용 장식품으로 액막이를 위해 만들어진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석중 하나이다.

 

서양에서는 석기시대 동물조형의 흑옥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1세기 켈트족이 로마에 전해졌으며 주로 반지

 

, 팔찌,목걸이 등 장식품으로 만들어졌다. 동양에서는 요녕성의 한대 무덤과 평양 낙랑 무덤에서

 

출토 되기도 했다.

국보 제156호 ㅡ무령왕 금귀걸이

 

이 금귀걸이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역대 금귀걸이 중 가장 무겁다. 금이 가장 많이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금귀걸이다.

 

왕의 금귀걸이. 아래에 크고 작은 하트 모양 꾸미개 3개가 달려 있다. 

얇게 편 금으로 만든 나뭇잎 모양이 수없이 달려있고, 가운데 기둥에는 금 알갱이를 하나하나 박았다.

 

재질도 거의 순금에 가깝다. 고리 장식 끝에는 구부러진 옥(곡옥)을 달았다. 신라 금관에서도 보이는 형태다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 무령왕릉 의자손수대경 , 국보 제161-2호

의자손수대경은 가죽끈이 끼워져 있는 거울걸이 아래에 의자손이라는 글씨와 짐승모양이 새겨져 있어

 

붙은 이름이다. 거울 중앙의 꼭지를 중심으로 9개의 돌기가 있고, 안에는 크고 작은 원과 7개의 돌기가

 

솟아있다. 내부 주위의 테두리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선명하지 못하여 알아볼 수 없다.

 

중국 한대의 수대경을 본떠 만든 복제품이다

무녕왕릉 동경일괄- 신수문경 국보 제 161-1호

방격구신수문경은 뒷면의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4각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신수를 표현하였다.

 

거울에 묘사된 사람은 신선을 표현하듯,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반나체에 삼각하의만 입은 모습이며

 

손에는 창을 들고 4마리의 큼직한 짐승들을 사냥하는 모습이다.손잡이 주위에는 4각형의 윤곽을 만들고

 

작은 돌기들을 배열한 다음 그 사이에 12간지의 글씨를 새겨 놓았다. 청동신수경은 ‘방격규구문경’이라는

 

중국 후한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거울 내부에는 반나체 인물상과 글은

 

한나라의 거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국보 제16494호 ㅡ무령왕비 베개 

.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6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6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飛天), 새그림, 어룡(魚龍), 연꽃

 

, 인동, 네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윗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다. 이 봉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에 금박을 띠처럼 돌렸다. 왕비베게 윗부분에 올려진 봉황

 

아래에서는 붓으로 갑(甲), 을(乙)이라고 쓴 묵서명이 확인되었다,. 필체는 행서체로 왕비 지석에 새겨진

 

갑, 을의 서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갑과 을은 10간의 첫째와 둘째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두 마리 봉황의

 

암.수 성의 구별이나 좌.우를 가리키는 방위개념으로 쓰인 것으로 보여진다. 

 

왕은 돌아가신 뒤에도 왕비와 잠자리를 함께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영혼의 눈을 감자

 

옆에 누웠던 왕비가 놀라는 바람에

 

 베갯머리에 앉았던 봉황 두 마리  땅에 떨어졌다

 

 행복의 미소도 권력의 고함소리도  생명을 잡아 둘 힘도

 

 안개처럼 사라지고  흙 묻은 침묵만 남았다

 

이젠 더 이상 주검에 베개가 필요 없자 

 

이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임자 없는 베개 한없이 외롭다  

 

- [두침(頭枕)의 말 - 이생진]

무령왕 발받침(국보 제165호)

 

베개와  발받침 등은 죽은 사람의 몸이 뒤틀리지 않도록 하는 의례 장치인 것이다

무령왕비 금목걸이 국보 제158호

출토된 다양한 목걸이는 금, 비취, 마노,수정,호박 등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그 중 무령왕비의 금목걸이는

 

.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2종류가 있는데 , 발굴당시 7개 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 있

 

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양직공도

 

526∼536년 무렵 무제의 즉위 40년을 맞아 주변 제국이 양나라에 조공한 성황을 기록하기 위해 외국 사신의

 

용모를 관찰하고 풍속을 물어 제작하였다고 전한다. 원본은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현재 알려진 것은 세 종류의

 

모사본이다

 양직공도 속의 백제사신

 

양작공도 속 백제 사신은 무령왕 때 파견된 사신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은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양나라에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한 바 있다  사신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을 쓰는 좌임의 대수포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12개국 사신 중  아프가니스탄 사신과

 

페르시아 사신 다음으로  세 번째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가 일본과 신라보다 위상이

 

높았음을 양직공도가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연꽃무늬 벽돌.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은 모두 614점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령왕릉 입구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줬던 연꽃무늬 벽돌도 볼 수 있다

 

공주 일대 벽돌무덤 3곳 중 송산리 6호분은 동전무늬 벽돌, 교촌리고분은 무늬가 없는 벽돌을 사용했고,

 

연꽃무늬 벽돌은 무령왕릉에서만 발견된다. 백제 시대 불교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계유명천불비상 'ㅡ 연기 서광암, 통일신라, 국보 제108호,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광암에서 발견된 작품으로, 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과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사각형의 돌 전체에 불상을 새겼는데, 앞면의 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나머지 면에는 작은 불상을 가득 새겨 놓았다.이 작품은 삼존불 좌우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볼 때

 

신라 문무왕( 67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예식진"의 묘지석

 

근래 중국 시안 당나라의 고위 관료들이 묻히는 무덤 군에서 "예식진"의 묘지석이 발견되어 내용을 보면

 

당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황제가 최대의 예우를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나라와 주군 의자왕을 배신하는 대가로 편안한 삶을 택하여 660년  백제가 멸망하게 된다

의자왕은 감옥에 갇힌 뒤 신라왕(김춘추) 김유신 소정방이 당상에서 내려다보는 곳에서 항복 의식을 거행하고

 

술을 따라 올리는 치욕을 당한다 의자왕 왕족 신료 93인과 1만 2천 명의 백성들이 전리품으로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황해를 가로지르고 2천 리 길을 걸어 낙양에 도착하게 된다

 

의자왕은 쌓인 피로와 처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며칠 만에 죽어 북망산에 묻히게 된다

불상대좌

2003년 구 공주박물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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