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법천사지 중심사역. <<문화재청 제공>>
법천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 <신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에
따르면 통일신라에 창건되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부흥했다고 한다
원주 법천사지 중심사역, 불국사와 유사한 가람 배치 확인을 했다
원주 법천사지 당간지주 (원주특별자치도의 문화재자료 제20호)
이 당간지주는 절터의 남쪽에 있으며, 높이가 3.9m로 법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주는 큰 당간지주이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이 당간지주는 윗 부분이 바깥쪽으로 둥글게 되어 있고, 안쪽으로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두 기둥 사이의 아래에는 깃대를 밑에서 꽂아 두기 위한 지름 66cm, 높이 6cm 정도의
받침돌을 8각의 형태로 다듬어 놓았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간결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들어 가는 글>
이 땅에 3천여 개가 넘는 폐사지가 있고 지도상에 나와 있는 곳만 백여 곳이 넘는다
하지만 지금은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이다
법등이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 <폐사지학교를 열며>중에서
법천사지를 처음 찾는 시람은 모두가 의아해 할 것이다
이 외딴 시골 벽지에 불국사에 비견할만큼 거찰이 존재했다는 사실에ㅡ
물론 법천사지뿐만 아니라 거돈사지와 흥법사지 .고달사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폐사지를 답사하면서 절대 오늘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판단하지 말라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 뿐이지만 이곳이 고려시대 전국에 설치된 13조창 중 하나이자 조선 전기
9조창 중 하나로서, 남한강 수계의 대표적인 조창이었고 원주는그 중에 하나인 흥원창이 있던 곳으로
물류가 활발했던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즉 법천사지는
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합류점인 강원도 원주시, 경기도 여주시, 충청북도 충주시가 만나는 3도의 접점으로
원주 조창(고려)과 흥원창(조선시대)은 물류가 활발했던 곳으로 고려시대 주변지역의 세곡을 모아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보관창고가 었었던 곳이다
이 조창제도가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 992년 경이다 조선왕조 개창 이후
흥원창(興原倉)이라고 하였다 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합류점은 강원도 원주시, 경기도 여주시,
충청북도 충주시가 만나는 3도의 접점으로, 조운창인 원주 흥운창이 들어섰던 곳이기도 하다
. 흥원창은
원주·평창·영월·정선 횡성 등 강원도 영서지방 남부 5개 고을의 세곡과 강릉·삼척·울진·평해 등 영동지방
남부 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개경의 조창(세곡의 수송과 보관을 위해 강이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집)으로 운송하는 일을 맡아 한 곳이다.원주 흥원창은 조선시대 소양강창, 가흥창과 함께
좌수참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설치된 수역) 에 소속되어 흥운창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가 수운의 요충지가 되자 ,
여러 고장 사람들이 모여 서로 다른 곳의 소식을 전하여 통신수단이
빈약했던 시대에 언론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됨에 따라 이 지역 지명이 부론(富論)이 되었다고 한다. 부론 인근에
이름난 폐사지가 많은 것은 조운창이 들어설 정도로 물류가 활발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 동네 이름이 '부론(富論)'인 걸 보면 경제활동이 활발하고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했던 곳으로 법천사를 비롯
큰 절들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군현별 조운이 일반화되면서 조창 기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원주 흥원창(興元倉)은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된 후 수운(水運)이 육운(陸運)으로 대체되면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거돈사와 법륜사는 자취가 될 만한 유적을 남겼지만 흥원창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우물
장방형 회랑 안에 금당과 강당이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으며, 금당 앞에는 2기의 탑이
배치됐음을 확인했다 이는 완벽한 형태의 가람 배치이다.또 서탑지 전면에서 확인된 6각 지대석은
탑전공양보살상을 안치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확인했다. 이같은 양식의 탑전공양보살상은 강릉 신복사지
, 평창 월정사, 논산 개태사 등에 이어 국내에는 4기 밖에 없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금당
사찰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심사역은 강당인 무설전과 금당인
대웅전이 직선상에 놓여 있고, 대웅전 앞에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 불국사와 유사하다
법천사지의 중심사역은 회랑 안에 절의 본당인 금당과 불경을 연구하고 논하는
강당이 일직선상에 있고, 금당 앞에 탑 2기가 세워진 구조로 드러났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이곳을 방문한 뒤 ,<유원주 법천사기>를 썼는데
그에 따르면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서 폐사한 뒤 없어졌다고 한다
법천사는 당시 유력했던 종파 중에 하나인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고려시대의 석조미술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정면 (국립중앙박물관)
법천사는 신라 성덕왕 (725)에 창건하여 법고사로 불렸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가 머물면서 큰 사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지리, 교통상의 장점을 배경으로 중앙정부와의 연결이 용이하였고, 중국으로부터
선진 불교사상을 수용하기에 적합했던 법천사는 마르지 않는 진리의 샘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법천사는 고려중기의 대표적인 법상종 사찰이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좌측면
탑비란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탑비는
고려 선종 (1085)에 지광국사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각자 .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비음 탁본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원경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부근 초석
법천사지 삼층석탑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국보)
지광국사는 원주 출신으로 8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문종까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최고의 승려로 활약하였다.역대 왕들은 자주 지광국사를 왕실로 초청해 말씀을 들었고, 임금과 함께
국왕의 수레인 어가를 타고 다녔다. 특히 문종은 지광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지광국사는 문종 (1017)에 87세의 나이로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이수(螭首) 부분.
받침돌에 있는 거북의 얼굴은 용의 얼굴과 비슷하다
.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고,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지광국사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전체 높이는 4.55m이다. 탑비에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연꽃, 구름, 용 등은 당시 조각 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여 준다
전액(篆額)에는「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智光國師玄妙之塔)」이라 쓰여있다.
지광국사탑비는 귀부이수형의 탑비이며 일반적인 탑비의 구성 형식과 마찬가지로 귀부 · 비신 · 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지광국사탑비는 거돈사지 탑비나 흥법사지탑비에 비해 세련미가 더하고,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碑身의 측면(側面).
고려 문종 1070년에 입적하였으며, 이 탑비는 입적 후 1085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 문하시랑 정유산이 짓고, 글씨는 명필 안민후가 중국의 구양순체이며 부드럽고 단아하며,
세련미가 강조된 탑비이다
화려한 용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런 형태는 고려 시대 "법상종계" 비석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탑비에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연꽃, 구름과, 몸통 양 옆면에 구름과 어우러지게 새겨진
용 두 마리는 당시 조각 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여 준다
어떻게 마치 종이에다 그림을 그리듯 돌에다 저런 용을 새겼을까
신라가 불교의 씨앗을 뿌리고 고려에 와서 꽃을 피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받침돌에 있는 거북의 얼굴은 용의 얼굴과 비슷하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字를 새겨 장식한 게 특징이다
.
990년에 원주 법천사에서 불교에 입문한 해린은 당시 법상종의 중심이었던 현화사에 있으며 제자들을
교육하였고, 국가의 중대 사업인 대장경의 판각을 주도하였다. ' 지광국사탑은 본래 이 승탑은 고려 문종 때
국사를 지냈던 지광국사 해린이 고향인 법천사에서 입적을하자, 문종이 슬퍼하면서 장례를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지광' 은 해린의 입적 후 문종이 내린 시호이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유리건판(서울 명동 소재 당시)ㅡ출처:국립중앙박물관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승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4각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 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 윗돌 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기단부터 탑신까지 연꽃, 구름, 신선, 보살, 봉황 등 정교하고 풍부한 장식들이 새겨져 있어 고려 시대
석조 예술의 정점이라 평가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은
탑비와 나란히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2년 오사카로 반출되어 비석만 홀로 남게 되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조선총독부 박물관 앞 정원으로 이전하는 등
십여 차례의 해체와 복원 과정을 거쳤다 탑의 이름은 현묘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파손 상태ㅡ한국전쟁 (출처 국가기록원)
이 탑은 후에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6.25 전쟁 와중에 유탄 폭격을 받아서 1만 2천 개가 넘는
조각으로 파손 된것을 복원하여 2024년 12년만에 원래 장소로 복귀하였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_상층기단갑석(국보)ㅡ출처:문화재청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_앙화 (국보)ㅡ출처:문화재청
앙화(꽃이 위를 쳐다보는 모양의 조각
옥개석 [문화재청 제공).
탑신석 사리공(사리를 넣는 구멍)에서 발견된 옥개석 파손 부재 조각과 법천사지에서 발굴된
하층 기단 갑석 (돌 위에 포개어 얹는 넓적한 돌) 조각을 원래 위치에 복원했으며, 1957년 수리 때
잘못 복원된 옥개석의 방위와 추녀 위치를 바로잡았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_하층기단석 (국보)ㅡ출처:문화재청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_우석 (국보)ㅡ출처:문화재청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_사자상(국보)
지광국사(智光國師 海麟)의 묘탑.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표현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광국사탑은 장막을 표현한 것 또한 특징이고
, 탑신부는 남-북, 동-서가 대칭을 이룬 것이 특징이며, 일반적인 둥근 달을 조각한 것과 달리 초승달을
조각한 것이 특징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상륜부
불보살상, 봉황, 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탑신
탑의 몸체에 페르사아 풍의 창문과 장식으로 동서문화교류,
회화, 사상적 배경을 담고 있고 네 모퉁이에 사자석상이 4마리가 있다
탑 전체에 여러 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기단의 형태는 상층과 하층의 이중 기단이기는 하나, 하층의 기단석이 지대석을 포함한 2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삼중기단으로도 볼 수 있는 특별한 구조라는 것이다 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사자상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오다 탑과 함께 옮겨졌다
청동보살입상
속이 비어 있는 주조품이다 얼굴 팔 다리 등이 결실되어 몸체 부분만 잔존해 있다
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도드라졌 있으며 영락 장식은 마모가 심해 존재 유무를 파악하기 어렵다
양팔에는 견갑을 착용하였으며 견갑 상단에는 깃털 장식이 확인되는데 머리카락으로 추정된다
허리에는 사선방향의 줄무늬가 장식된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는데 허리를 매우 잘록하게 표현하였다
허리띠 하단부는 종방향의 옷주름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으며 사선방향으로 벌어진다
철제 은입사 말재갈 멈추개.
재갈은 말을 부리기 위해 입에 물리는 도구로 철이나 금동으로 흔히 제작하지만 법천사지에서는 은으로
상감하여 제작한 자갈이 출토되었다. 은입사의 문양은 꽃무늬를 정교하고 세련되게 표현해 고려시대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치미
원주 법천사지에 25개 파편으로 흩어져 있던 장식기와 '치미'가 8개월간의 보존처리를 거쳐 원형을
되찾았다. 치미는 높이는 120㎝ . 신라 후기 혹은 918년 건국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원주 법천사지 공양보살상.
법천사지 석조공양보살은 원통형 보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상호는 턱이 두툼하게 강조된 채 이목구미가
얼굴 중앙에 모여있다. 또한 양쪽 어깨와 팔, 왼쪽 무릎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남아있는 신체 부분을 통해
이 공양보살상이 우슬착지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을 가슴에 모은 공양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이어 "동탑 터의 적심석 위치로 보면 여기에도 공양보살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탑 2기 앞에
공양보살상이 각각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국내에서는 최초의 사례"라고 설명했다.
강릉 신복사지, 평창 월정사, 논산 개태사에도 탑 앞에 공양보살상을 둔 예가 있지만
, 이들 사찰은 탑과 불상이 하나뿐이다.
봉로대
흔히 배례석이라고 하나 그것은 일제시대 표현이고 옛 문헌에 기록된 대로 "봉로대"라 해야 할 것이다
불좌상
원주 법천사지 석조 광배(비지정 문화재)
약 1.5m 높이의 이 광배는 상단에 3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2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철마,
철로 주조 되었으며, 부식으로 인하여 머리와 몸통부분만 잔존해 있다.
다리 및 꼬리등은 부분 결실 되었다. 말의 안장 및 목 아래쪽에 고삐
부분등이 관찰되며, 전반적인 형태는 법천사지 인근 거돈사지에서 출토된
철마와 양상이 비슷하다.
청동제 말,
청동으로 주조한 말 모형으로 꼬리 끝이 야간 절실되어 있다.
머리 부분은 눈, 콧구멍, 입, 목뒤의 갈기 등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몸통 이하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한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