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수동성과 수난의 선물

작성자Subp|작성시간26.06.17|조회수17 목록 댓글 0

예수님의 수동성과 수난의 선물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애 중 최후의 만찬부터 죽음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 부분을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기라고 부릅니다. 성금요일에 해설자는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라는 말로 복음서 낭독을 시작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passion)’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사람들은 이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수난이라고 하면 ‘격렬한 고통(passionate suffering)’이라는 말에서처럼 극심한 고통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틀리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습니다. 바로 수난이라는 말이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수동성, 비활동성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파시오(passio)’에서 유래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수난’에 해당하는 시기는 예수님이 무언가를 행하신 일보다 당신께서 받아들이신 일로 정의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인 활동가로 사셨습니다. 통솔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기적을 행하시고 조언해 주고 죄인들과 식사하고 토론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시면서 사람들을 복음의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삶을 사셨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공생활의 대부분 시간 동안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시작하신 순간부터 이러한 모든 활동은 중단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에게 어떤 일이 행해지도록 맡겨진 분이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고 손을 결박한 후 대사제와 빌라도에게 데려갑니다. 예수님은 매 맞고 모욕당하시고 옷이 벗겨진 채 십자가에 못 밖혀 돌아가십니다. 이러한 사건이 어떤 일을 행하기를 멈추고 당신에게 어떤 일이 행해지도록 맡겨진 시기, 즉 ‘수난’의 시기를 구성합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그 모든 활동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고통이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르술라회 소속의 수녀였던 제 누이가 십 년 전 암으로 죽었습니다. 삼십 년 넘게 수녀로 살았던 누이는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소임을 행하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누이는 자신의 수녀원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젊은 여성 수백 명을 지도하는 책임자로 봉사했습니다. 누이는 그 젊은 여성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어머니이자 언니, 멘토의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누이는 또한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십 년간 남은 가족을 돌보며, 가족을 위해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그 세월 동안 제 누이는 능동적인 사람이었고 능숙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일이든 책임을 맡아 주길 바랐습니다. 제 누이는 그 역할을 즐겼고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누이는 사망하기 9개월 전 암이 발견되어 생의 마지막을 병상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그녀가 능동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사, 간호사, 우르술라회의 동료 수녀들과 다른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그녀를 보살폈습니다. 체포되어 돌아가시기까지의 예수님처럼, 누이 역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몸을 끌어옮기고, 옷을 벗기고, 주사를 놓고, 호기심에 차 빤히 쳐다보는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과 비슷하게도 그녀는 누군가 입술에 대어 준 해면으로 수분을 섭취ㅏ면서 목막라하며 죽었습니다.

 

    이것이 제 누이가 겪은 수난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해 어떤 일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행해지는 일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 누이도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능동적으로 행하던 시기보다, 오히려 무력하고 주도권을 갖지 못한 시기에 더욱 심오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생명과 의미를 주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말기 환자, 중증 장애인, 병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또한 그것은 병들고 무력해져 타인의 간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삶이 능동적인 삶만큼이나 다른 이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나에게 주도권이 없는 상황에서, 굴욕과 고통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힘겨운 상황에서 우리도 고통을 겪습니다.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처럼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삶에서 심오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랑과 우리 자신을 내어 줄 기회를 얻게 됩니다.

 

 

   -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생활성서사, 2025, 2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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