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7-8). 이 말씀이 요셉님께 응해서 주님의 귀한 상속자, 아들이 되시기를 ....
20. 하나님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냐?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여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태복음 22:15-22)
1. 가이사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1) 인간의 얄팍한 수단으로 의인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2) 가이사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인간적 방법만 찾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변화 받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가이사의 형상과 글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과 글도 볼 수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신다.
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1) 누구의 형상이 있는가?
① 일반적으로 돈에는 왕이나 대통령의 그림이 있다. 정치적 통치자의 형상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 미국 돈에도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들의 초상화를 넣었다. 그분들이 지금 생존해 있는 분은 아니지만, 그들이 미국을 위대한 나라로 이끌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기리기 위해 돈에 그들의 형상을 넣은 것이다.
② 미국 돈을 쓰는 사람은 미국 사람이요, 미국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다. 한국 사람은 한국돈을 쓴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통치를 받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돈을 쓰는 사람은 국적이 어디이고, 누구의 통치를 받을까? 우리가 쓰는 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돈을 바르게 쓰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③ 세상 사람의 형상이 있으면 세상의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세상의 돈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넣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령한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2) 누구의 글이 쓰여 있는가?
① 모든 돈에는 그 돈을 만들어 쓰는 나라의 글이 쓰여 있다. 또한 그 돈이 얼마짜리인지를 기록해 놓았다.
② 마찬가지로 사람의 글이 쓰였으면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의 글이 쓰였으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글은 쉽게 구별되고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글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미국 돈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In God We Trust)라는 글이 씌어 있다. 이것이 미국의 건국 정신이고, 돈을 쓰는 정신이다.
③ 글이 쓰였다는 말은 또한 어느 나라의 말을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당신이 한국말을 하면 한국인이다. 미국말을 하면 미국인이다. 우리는 미국말을 한 마디도 못해도 미국에서 살 수 있다.
3) 그 돈을 어디에 쓰느냐? - 이것은 충성의 문제다.
① 돈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돈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쓸 수도 있고, 살리는 일에 쓸 수도 있다. 세상 물건을 사는 데에 쓸 수도 있고, 천국을 사는 데 쓸 수도 있다. 이것이 문제다. 그 사용처에 따라서 그 돈의 방향이 결정되고, 그 돈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결정된다.
② 돈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무엇을 위해서 얼마나 쓰는가?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과 그 사람의 삶의 목표와 방향이 나타난다.
③ 돈은 우리 믿음의 척도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돈도 집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다. 또한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 후에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은 천국을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돈으로 밭을 샀다. 그는 천국을 산 것이다.
3. 두 가지의 형상과 글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가이사의 것은 우리 육신의 눈에 보이는 형상과 글이다.
① 가이사의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쓰고 다 좋아하는 돈에 기록되어 있다.
② 그 나라 사람들이 다 보고 읽을 수 있도록 그 나라의 글자로 기록하였다.
③ 또한 돈에 가이사의 형상을 그려넣은 것은 가이사를 존경하고, 그에게 충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자꾸 보면 사랑이 생긴다. 존경이 생긴다. 나아가 숭배하게 된다. 예배의 대상이 된다.
2) 하나님의 것은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형상과 글이다.
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 넣으셨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을 자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된다. 이왕이면 하루에 한 번만 보지 말고, 10번이고, 100번이고 자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형상이 더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② 또한 하나님의 글을 우리 마음에 기록하셨다. 대관절 그 글자가 어떻게 생겼을까? 세상 글자도 배우기 어려운데, 또 어느 시간에 하늘의 글자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상 나라들의 글자는 배워야 하지만, 천국 글자는 배우지 않고도 알게 된다. 마음을 깨끗하게만 하면 하늘의 글자는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
③ 신기한 일이다. 이런 신비가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 형상과 그 글자가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자꾸만 더 읽어보고 싶고, 더욱 가까이하여 만나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3) 사람 중에도 가이사의 것이 있고, 하나님의 것이 있다.
①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진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진다.
② 또한 누구의 형상이 이루어졌느냐를 보아 알 수 있다. 마귀의 형상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시니 그들은 마귀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는가?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가득하다.
③ 누구의 글이 쓰여 있느냐를 보아 알 수 있다. 당신 마음에 하나님의 글이 쓰여 있어야 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1) 하나님의 것이 되면 어떤 복을 받을까?
①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될 것이다.
② 이 세상이 함부로 대적하지 못한다. 세상이 훔쳐갈 수도 없다.
③ 이 세상에서도 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2) 왜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할까?
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고귀한 피를 흘려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③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어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3) 누가 하나님의 것일까?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요, 따라서 하나님의 것이 아닌가! 욥기 41:11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라고 하였고, 시편 50:10-12에는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학개 2:8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사람들이 있다.
① 초태생이다. 출애급기 13:2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려라. 이는 내 것이니라.”라고 하셨고, 34:19에서는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다.”라고 말씀하셨다.
② 특별히 택함 받은 사람이다. 이사야 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하신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다. 예레미야 31:33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라고 하셨고, 에스겔 11:20에서는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④ 연단을 통하여 세상 줄을 끊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이다. 스가랴 13:9이다.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4) 이 모든 조건을 가장 잘 요약 정리한 말씀이 오늘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다.
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② 하나님의 글을 새겨 넣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③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이 쓰시도록 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21. 영에 속한 사람이냐, 육에 속한 사람이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4-16)
1. 육에 속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1)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① 성령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②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③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들은 성령의 역사를 거절한다.
2) 14절에서는 성령의 일을 미련하다고 비웃는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① 이런 사람들이 성령의 계시를 비웃는다.
② 우리가 이 말씀을 알아야 예수님이 살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하신 말씀 중에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라고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된다. 누가 미련한 자일까? 성령으로 역사하는 제자들을 미련하다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들이 아닌가?
③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비웃고 배척하는 자가 바로 육에 속한 자다. 23절에서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으로 알고, 이방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교회에는 다녀도 육에 속한 자는 이방인이다.
3)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이다.
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마 12:31-32).
② 성령으로 하는 말씀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척하고 대적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구름같이 몰려왔던 그 많은 무리들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겠느냐? …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52,60)라고 하면서 다 떠나고 말았다.
③ 갈라디아서 3:3에서는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는 무서운 책망이 나온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신령한 사람이 되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다시 육체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을 베드로는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 2:22)라고 표현하였다.
④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이단이라고 무섭게 정죄한다.
2. 신령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1) 성령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①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엄마의 젖이다. 배가 고프면 사정없이 울어댄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면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영의 양식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혜를 갈구한며 신령한 말씀을 사모한다. 영적으로 배가 고프니 소리소리 지르면서 울부짖는다.
②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어서 넷째 복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다. 영적 갈증을 느끼는 사람, 영적인 만족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③ 이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④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요한복음 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하셨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영의 양식이 풍족하여 항상 만족함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2)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① 자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함으로 죄를 사함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다.
②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난다.
③ 성령이 충만하면 영에 대한 새로운 소원이 생기고, 성령과의 교통을 제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된다.
④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행하는 사람이다.
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을 찾고 계신다.
⑥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셨다.
3) 신령한 사람은 전심으로 주님만 구하는 사람이다.
① 사람마다 자기의 영광을 추구한다.
②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마 4:8-10).
③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영광이 아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었다”(눅 2:14).
3.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에 속한 사람이 될까?
1)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철저히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①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전도 제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신약을 열어주는 말씀이요, 복음을 열어주는 말씀이다.
②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고기잡이 이적을 체험하게 되자 곧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얼른 떠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불러 당신의 수제자로 삼으시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다.
③ 누가복음 7:47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2)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를 깨달아 늘 자신을 살펴야 한다.
① 로마서 8:5-6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를 늘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참 평안이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② 로마서 7장에서는 우리 마음에 두 개의 법이 있어서 서로 싸운다고 하였다. 곧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이 싸운다. 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운다.
③ 로마서 8:13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늘 자기 몸의 행실을 죽이기에 힘썼다.
④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이 한 번 죽었으면 되었지, 왜 날마다 죽어야 하겠느냐?”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갈 2:20)라고 하였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의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5:24)라고 선언하였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와 참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잠 1:7; 9:10).
② 이사야 11:2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하였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지혜롭고 총명하며, 모략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지식의 사람이 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된다.
③ 경외란 무엇인가?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형을 피하여 외갓집으로 도망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허허벌판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신기한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야곱이 잠이 깨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리고는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6-17).
바로 이것이다. 이 두려움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만 임하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이것이 곧 경외(敬畏)라는 말의 뜻이다.
4) 전심으로 주님을 구해야 한다. 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
① 신령한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마 6:33).
② 욥기 8:7에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5-6절을 보아야 한다. 그 첫째가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둘째는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셋째와 넷째는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이라고 하였다. 먼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③ 예레미야 29:12-13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④ 이사야 55:6에서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지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기에 만나주시지 못하신다.
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누가 있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할 것인가?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까닭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라고 말하였다. 이런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다.
22. 버린 자냐, 가진 자냐?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23-31)
1. 우리가 왜 먼저 버리는 일을 해야 할까?
1) 버리는 것이 믿음의 정문이기 때문이다.
①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다(요 10:1). 신앙에도 정문이 있다. 그 정문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② 예수님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선언하셨다. 나아가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셨다(요 10:8).
③ 정문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고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요 10:9). 먼저 버리는 일, 이것이 없이는 구원도 없고, 신령한 하늘 양식, 곧 우리 마음과 영혼의 양식을 받지 못한다.
2) 왜 버리라고 하시는가? 버려야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① 마라톤 선수가 짐을 잔뜩 짊어지고서 달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는가? 그런 일은 결코 없다. 우리도 몸을 가볍게 하고서 달리기를 해야 한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초청하셨다.
②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이만 가지면 좋은 줄 알고, 잔뜩 움켜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실은 그곳엔 행복이 없다. 참 행복은 오히려 모두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하는 데에 있다.
③ 우리는 차라리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러니까 버린다는 말은 맡긴다는 말로 이해하면 더 좋다. 성경에서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겨라”(시 37:5),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라”(시 55:22),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라”(잠 16:3),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벧전 5:7), “네 원수를 갚는 일도 맡겨라”(롬 12:19)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내가 맡아서 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나 되도록 더 좋게 이루어주신다.
3) 왜 버리라고 하시는가? 그래야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① 예수님은 간음죄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려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려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백체 중 하나를 버려서라도 천국에는 가야 한다.
②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롬 8:13). 떠나야 하고, 버려야 하고, 또한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진다.
③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때에 주님이 주신 약속은 오늘의 본문 30절이다.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4) 왜 버리라고 하시는가? 그 넷째 이유는 버려야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이 세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① 천국은 막연하게 내세에서나 이루어지는 줄로만 알면 안 된다. 예수님은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라고 밝히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천국이 이루어지는 터전이다.
② 바울도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였다. 천국은 우리 마음에 있고, 성령으로만 건설된다.
③ 이렇게 먼저 마음에 천국이 건설되어야 이 땅에도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2. 무엇을 버려야 할까?
1) 세상에 있는 것을 버리고 하늘에 있는 것을 취해야 한다.
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즉시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②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부르심을 받자 즉시로 자기의 겉옷을 내버리고 주님 앞에 달려갔다(막 10:50). 엘리사도 엘리야의 옷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에 즉시로 자기의 옷을 벗어 두 쪽으로 찢어버리고, 엘리야의 옷을 주워서 취했다(왕하 2:12-31).
③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④ 십일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 3:10-11)라고 말씀하신다.
⑤ 구제하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2) 육신에 속한 것을 버리고 영에 속한 것을 취해야 한다.
① 본문 29-30절을 보자.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② 육신의 지혜와 지식을 버리면 하늘의 지혜와 지식이 임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을 다 버렸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까닭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라”(빌 3:5-9).
③ 목숨도 버려야 한다. 마태복음에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10:39; 16:25-26) 나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는가? 예수님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3) 마귀에게 속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취해야 한다.
① 마귀에게 속한 것은 죄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취해야 한다.
②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옛 사람이라는 말은 로마서 6:6과 에베소서 4:22, 골로새서 3:9 등에 나온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라”(엡 4:22-24).
③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말에 속아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거역하였다. 마귀의 달콤한 속삭임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있다.
3.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버리고 살 수 있을까?
1)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바울 서신, 그 중에서도 옥중서신들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항상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심지어는 감옥 바깥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말한다. 곧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참 행복이 있고, 참 승리가 있다. 성령 안에, 그리고 생명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하여 더욱 행복하시고 더욱 형통하자. 아멘.
23. 이면적 유대인이냐, 표면적 유대인이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으로부터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으로부터니라. (로마서 2:28-29)
1.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첫째 특징은 할례에 있다.
① 이 할례의 법은 모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아브라함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 17:1-5)라고 하셨다. 또한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라고 하시고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며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시고, 이어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라고 하셨다.
② 골리앗이 이끄는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나라에 쳐들어왔을 때에, 왕과 모든 장수들도 골리앗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마침 전쟁터에 형들을 만나러 왔던 다윗이 골리앗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의분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 할례 없는 불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라고 하였다. 할례는 이방인에게는 없는 선민의 표였다.
③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할례는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모세에게 나타난다. 또한 여호수아에게도 나타난다.
④ 그러므로 이 할례 문제가 신약에 와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거나 안 믿거나 당연히 할례를 받았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는 할례를 받게 해야 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된 것이다.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강경하여 이방인들도 할례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곧 육신의 양식보다는 영의 양식이 더 중요하고, 육신의 할례보다는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일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였다.
2) 둘째 특징은 율법에 있다.
① 바울은 이를 가리켜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1-2)라고 말한다.
②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또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였다(신 6:6-9).
③ 율법은 물론 반드시 지켜야 한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 19:16-17)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을 재해석해 주심으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④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는 했지만, 마음으로부터 지키지를 않았다. 형식적으로 지킬 뿐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행위로 지키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
3) 셋째 특징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에 있다.
① 유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제사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렸다.
② 나아가 그들은 성전을 성전답게 하지 못하고 장사치들의 집(요 2:16)으로 만들었고, 나아가 “강도의 소굴”(마 21:13)로 만들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예배하는 집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③ 왜 그렇게 타락하였을까? 세 가지 이유다. 첫째는 편의주의(便宜主義)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식주의(形式主義)이고, 셋째는 배금주의(拜金主義)다. 이런 불순한 것들이 제사장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오니까,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고,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는 더러운 제사, 가증한 제물들이 되고 말았다.
2.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1) 그 첫째 의미는 나다나엘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① 간사한 것이 없어야 한다. 였다.
② 그러면 이 간사하고 거짓된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창세기 3:1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마귀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마귀는 욕심쟁이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또한 거짓말쟁이로서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요 8:44)라고 하셨다.
③ 우리가 어떻게 해야 간사한 것을 뽑아버리고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둘째 의미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①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고, 또한 사람과 겨루어서도 이겼다.”는 뜻이다.
② 무엇으로 이겼는가? 야곱은 밤새워 기도를 함으로 이길 수 있었다.
③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 또 얼마나 더 강한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이길까? 기도밖에 없다.
3) 셋째 의미는 육신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인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① 로마서 8:5-13에 잘 설명되어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② 갈라디아서 5:16-18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③ 본문에서는 이면적 유대인이냐, 표면적 유대인이냐의 문제는 “의문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하였다.
4) 이면적 유대인이란 말의 넷째 의미는 이사야 41:14-15에 나타난다.
①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② 육신적으로는 지렁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이면적 유대인이다. 하나님은 그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로 만드신다.
③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면적 유대인이 될 수 있을까?
1) 우리는 표면적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를 에베소서 2장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① 1-2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②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③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① 회개해야 한다. 형식적 신앙생활을 회개해야 한다. 마음에 숨긴 죄를 회개해야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③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3)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①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시 1:2).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항상 우리를 지켜 의의 길로 가게 하신다. 또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어주신다(요 15:7).
② 진리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a) 진리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하셨으니, 반대로 진리가 없으면 자유가 없다(요 8:32). 어떤 자유인가? 가장 중요한 자유는 양심의 자유다.
b) 또한 진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거짓에 속아 넘어가게 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44에서 마귀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 끝 날에 임할 일을 설명하시기 전에 먼저 경고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라고 하셨다.
c)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된다. 예수님이 친히 증언하셨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라고 하셨고, 이어서 “너희가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④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참된 양식이다.
⑤ 또한 진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참된 표적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셨는데,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라고 말함으로 그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었음을 밝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