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늘의 권세냐, 사람의 권세냐?
(마태복음 21:23-27)
우리의 육신을 복종시키기보다 먼저 마음을 복종시키는 권세, 곧 마음으로부터 복종하도록 만드는 권세다.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5-6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눅 9:1)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2)와 만국과 천사들까지도 심판할 권세(고전 6:2-3)다. 나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
오늘은 권세에 대하여 묵상하게 됨에 감사를 드린다.
사람들은 권세를 가지려고 한다. 심지어 짐승에게도 있다.
우리집에 강아지 두 마리가 있는데 처음에 온 메리는 암컷이고 후에 온 크리스는 수컷으로 1년 후에 왔다. 이들에게도 쟁탈이 벌어진다. 나를 독차지하려는 쟁탈, 맛나거를 더 많이 먹으려는 쟁탈. 그런데 후에온 크리스(장모치와와)는 물을 먹을 때와 먹을 것을 먹을 때 변을 볼때는 순서를 기다리다가도 나를 차지하려는 욕구에서는 1살 위인 메리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심하게 이발을 드러내놓고 나를 놓고 다툼이 일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사단은 나를 하나님에게서 빼았으려 한다. 어떻게?
주님의 주시는 권세와 사단이 주는 권세는 아주 다르다.
사단은 누리고, 즐기고, 섬김을 받으며, 먹고, 입고 쓰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시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다.
누가복음에서는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칠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이 모든 것을 주시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신다.
구별하여 본다. 사단이 주는 권세와 예수 그리스도께서주신 권세를 구별하여 본다. 사단은
늘 우리를 안일을 추구하게 하고, 화려함으로 이끌어가며, 사람들로 부터 섬김을 받으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권세는 다스리는 권세 (창1:28)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음을 알수 있다.
영분별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앞에 서 있을 때이다. 분별력이 없으면
현재의 안일이 복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계속 제자 삼으며 귀신제어하고 병을 고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특권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새롭게 묵상하게 하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권세에 힘입어 오늘도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17. 하늘의 보화냐, 땅의 보화냐? (마태복음 19:20-21)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한다. 재물에 대한 탐욕도 죽이고,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도 죽여야 한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골 3:5-7).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면 영안이 어두워져서
하늘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땅에 있는 것만 찾다가 결국 육신이
죽을 때에 모든 소망도 죽고 만다. 가련한 자가 되지 말고, 영광스럽고
거룩한 성도들이 되자.
할렐루야, 아멘!!! 나는 오늘 보화를 어디에 쌓았는가?
나는 오늘 보화를 어디에 심었는가?
나는 오늘 보화를 가지고 있기는 한가?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보화는 어떤것인가?
오늘 하루를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심판주이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분노도 하시고, 진노로 매를 드시고. 질투를 발하시기도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것이다.
이 마음이 보화이다. 이 마음이 하늘의 보화이고 하늘에서 돌려받은 생명의 면류관이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 또 한 가지 욕심과 탐욕도 있다.
이를 죽여야한다. 이 마음을 제거하여야 한다. 이 마음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사악한 영이 내 안에서 파멸되고 쇄하여 지고, 파쇄되어 질것이다.
아멘, 주님이 나의 마음을 지키시리라. 주의 성령이 나의 마음안에서 임재하사
다스려 주시리라. 사단의 권세는 길지가 않다. 멀리 못간다. 오래 머물지 못한다.
왜? 나의 안에 보화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균용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늘 보석같은 말씀으로 새롭게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18. 전쟁이냐, 평화냐? (사무엘상 7:5-11)
우리가 잘 아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욥기 8:7의 말씀을 보자. 저절로 창대해질까? 아니다. 그 방법이 5-6절에 기록되어 있다. 곧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이라고 하였다. 첫째가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 29:12-13에서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전심으로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하신 하나님. 오늘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은헤입게 하시고
뜻을 깨달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알게 하소서.
전쟁이냐. 평화이냐? 나라들과 민족들이 평화를 선택하였다가 종당에는
전쟁을 선택한다. 왜 그럴가? 그들은 당신들의 한계를 알게 된것이다.
당신들의 지혜와 명철로는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과 활, 총을 선택한다. 하나의 아이콘과 같은것, 게임에서 업그레이 하듯전쟁이라는 아이콘으로 이기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한계를 무기에 의지하여 힘을 보태려는 것이다.
과연 옳은 것일 까?
다윗은 골리앗과 싸움에 무기를 가지지 않았다. 물매돌을 가졌을 뿐이다.
이는 사람을 죽일 힘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물매돌에 골리앗이 죽었다. 왜 쉽게 죽었을까?
갑옷을 입은 장군이다. 싸움에 능한 자이다. 키도 구척이다.
사람의 생각에 이길 승산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벌 떨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인간은 본래 나보다 센 사람들 앞에 떨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겼다. 다윗이 이겼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겼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였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신뢰하였을 때 돌을 통하여 승산이 이루어진다. 발락에게 말하는 당나귀나.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있었던 요나나 모두 누가 그렇게 하였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였다. 말씀의 권세, 말씀의 능력. 말씀의 권능이다. 다윗은 이 것을 알았다.
우리가 매일 북한의 미싸일에 숨을 죽이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면 북한의 미싸일은 하나의
고철에 불과하게 될것이다. 오늘도 담대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앞에 감사를 드린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나균용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19.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
누가 생명의 부활을 받을까?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 신성하고 거룩한 그 곳,
아름답고 성스러운곳이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에서 물 한모금도 못 먹고 죽지도 못하고 있다.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얼마나 부러웠을까?
우리에게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앞에
물어본다. 어느 곳이냐?
사람들은 당연히 생명의 부활을 원할 것이다.
그러면 조건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생명의 구속자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하기 싫어한다.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입으로 시인하기 싫어한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려면 여태껏 주인으로 살아왔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모든 것 포기 하여야 한다. 모든 것 비워야 한다. 모든 것 버려야 한다.
일어서는것, 포기하는것, 비워야 하는 것, 버려야 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쉬운것은 아니다. 내가 주인이여야 한다.나의 자아가 주인이여야 한다. 나의 주장이 주인이여야 한다. 나의 생각이 주인이여야 한다. 나의 결단과 의지가 주인이여야 한다. 모든 것들이 나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그래서 쉬운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바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19:25) 말씀을 묵상하여 보면 알수 있듯이 힘든 것이다. 그러면 진정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인 생명의 부활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다. 소유를 다 팔아, 다 나누고, 다 공유하고, 모두를 섬기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나의 소중한것,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주의 십자가에 내려놓고 주의 뜻 가운데 주의 얼굴 바라보며, 주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20년전에 처음 주님을 만나서 가장 제일 먼저 배운것이 십일조이다.
우리 전도사님이 십일조를 강요하다싶이 강조하시면서 주일 설교를 마치셨다.
우리집은 오이살돈도 없었다. 어느날 남편이 중국돈 1원50전을 주었다.
1999년도 중국돈1원50전이면 닭알10알, 오이 5개는 살수 있는 귀한 돈이었다.
마작을 놀았다면서 이겼으니 이돈으로 채소를 사오란다.
나는 그돈에서 15전을 떼어서 다음주 헌금하였다. 전도사님 눈치도 있고,
나도 역시 말4:10절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알고 싶었다.
과연 20년이 흘렸다. 15전 부터 시작된 십일조는 200,000배가 불어서 십일조를 하게 된다. 물론 늘 그렇지는 않지만 말이다. 현장일이 들쑹날쑹하여서 겨울에는 쉰다. 하지만 먹고 입는 문제까지. 그리고 공부하는데 장학금으로 도와주신다.
포기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포기는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포기는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다. 의탁하고 신뢰하고 인정하고 믿음으로 바라볼때 내것이라 끌어안고 있을 때보다. 내가 주인이다 고집하였을 때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으로 나에게 증거하여주셨다. 오늘도 주님께서 보내어 주신 나균용목사님 감사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인사를 드린다. 보석같은 말씀은 나의 마음에 생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