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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스 사역자 방(2)

(1) 하나님보좌의 영광을 보는 사람(신나오미)/2/3/4

작성자은혜|작성시간24.02.26|조회수59 목록 댓글 0

1. 하나님보좌의 영광을 보는 사람(신나오미)

 

이사야는 약 기원전 8세기 경에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사야의 예언과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예언,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한 경고와 훈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시기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죄악과 부정한 행동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경고와 훈계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회개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의 예언 중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이며, 구원과 은혜를 가져다 줄 전능하신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이사야는 말하였습니다.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성전에서 진리의 비전을 경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경험은 이사야를 그의 사명에 대해 확신하게 하였고,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어 백성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했습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강한 진리의 비전에 관한 장으로, 이사야의 사명과 성결한 체험을 다룹니다. 주로 이장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이사야의 존경심,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 (이사야 6:1): "우리 왕 웃시야의 죽은 해에"로 시작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8세기 경에 활동했던 시대의 배경을 제공합니다. 이 시기는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사야 6:1-4에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비전을 보게 됩니다. 그 비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고, 그의 영광은 전 온 땅에 가득한 것을 보는데, 이는 하나님의 보좌와 권위를 나타냅니다.

 

이사야 6:5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목격한 이사야는 자기의 죄와 부정함을 깨닫고, "비린 입술의 사람이나 그 백성 중에 거주하는 사람의 아들이여, 나는 멸망하리로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이사야는 자기의 부정함을 자각하고 자신의 존재의 근원적인 부도를 자백합니다.

 

이사야가 죄의 부도를 자백하자, 성전에서 온 한 천사가 숯불을 가지고 다가와 그의 입술에 대고, 그의 죄악이 사함되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구제가 나타나며, 이사야가 청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사명을 이행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이 민족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인가라고 물으셨고, 이사야는 "나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사명을 이행할 결의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 민족이 회개하지 않고 그들의 귀가 막혀 있어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도리어 성읍들이 황폐하게 되겠다고 예언하십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성결한 체험과 사명에 대한 강력한 예시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은혜, 그리고 선지자의 순종과 사명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궁전에서의 만남 (출애굽기 33-34장): 모세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열방에서 인도하여 출애굽하게 한 지도자이자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3-34장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궁전에서 직접 만남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만남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과 성품을 모세에게 알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에 반영하여 내려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는 모세의 특별한 영성적 체험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선지자들이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거나 체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강화시키며, 그들의 사명에 대한 확신을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개인이나 교회, 종교 단체 등 다양한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의 핵심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구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삶을 살아가는 것도 영광을 위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며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자비롭고 관대한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과 관심을 나누는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예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영광을 위한 소중한 시간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섬기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영광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와 전도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며, 그들을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자원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에게 기여하고 나누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동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부를 사용하여 필요한 곳에서 돕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나누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으로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2. 누가 능히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리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자신의 궁전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언약궤는 이전에 여러 사건을 거쳐 여러 곳을 옮겨 다녔는데, 다윗은 그 궤를 자신의 궁전으로 가져와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근처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가져올 때, 큰 축제를 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과 군사들이 모두 참여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추고 노래를 부렸습니다. 언약궤를 새 수레에 올려서 옮길 때, 수레가 흔들려 우사가 손을 대자 그가 죽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에 놀라워하여 언약궤를 자기의 궁전에 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언약궤는 다윗의 궁전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를 자기와 함께 계시기 원하심을 깨닫고, 언약궤를 다시 옮겨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 위해 두 번째 시도에서는 예수살의 아들 오벧을 이용하고, 오벧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여 성공적으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과 동행을 중시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며,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감사의 예배를 지향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벧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예배와 순종에 대한 심각함을 깨닫게 되었고, 그에게는 언약궤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감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이야기는 성경의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진리의 궤를 위한 영원한 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대한 다른 계시를 전하고 다윗에게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될 것임을 알렸습니다.

 

다윗의 궁전과 하나님의 궤에 대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궁전을 건설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임시로 여러 곳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궤를 위한 적절한 곳에 영원한 전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여러 전쟁과 역경을 이겨낸 후에 안정된 시기에 있었고,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기의 궁전이 세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궤가 임시로 두어져 있음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려고 할 때, 선지자 나단이 나와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성전 건축에 대한 계시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전하였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에 감동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의 때에 예루살렘에 웅장한 성전이 건축되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의 원하던 성전 건축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성전의 건축은 솔로몬의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다윗의 죽음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성전은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습니다. 그 구조에는 굳은 돌과 시멘트, 백향목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은 일종의 궁전으로서 건축되었으며, 성전과 그 주변에는 여러 건물과 뜰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입구가 높고 아름다운 이층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의 전면에는 큰 두 브론즈 문이 있었고, 그 뒤에는 성전 안뜰이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성소와 거룩한 곳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소 안에는 금으로 입힌 목재 벽으로 감싸진 성소 상자[아가페]가 있었고, 그 안에는 언약의 궤와 여러 가지 성물이 보관되었습니다.

 

성전 주변에는 여러 시설과 기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전 내부에는 두 개의 큰 기둥인 요야긴과 보아스가 있었고, 성전 주변에는 순환하는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성전은 솔로몬의 통치 11년 후에 완공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그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예루살렘의 중요한 중심지로 남아있었으며, 이후의 역사와 성경에 많은 언급을 받는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절 바울의 편지에는 “이뿐 아니라 너희 몸도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너희는 너희를 살린 그분의 몸이 아니냐 너희는 다른 이에게 속한 것이 아니로되 값으로 산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몸이 하나님에게 속하고,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거처하는 성전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또 네 영혼을 다하고 또 네 마음으로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니라." 이 구절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다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다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영적인 중심이자, 믿음과 사랑의 근원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마음의 성전이란 개념을 강조하며, 믿는 자들은 영적인 변화와 성령의 주도하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을 공언하는 것뿐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하고 삶의 각 영역에서 반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성전”은 성경에서 종종 사용되는 표현으로, 신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사회나 개인의 영적인 측면을 나타내며, 하나님과의 교감, 성장, 순종 등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래는 “마음의 성전”에 대한 주요 아이디어와 의미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이 개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생명의 문”이라고 불리며, 믿음을 통해 그의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의 교감을 통해 마음의 성전이 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마음의 성전은 사랑, 순종, 감사, 참회, 기도와 같은 영적인 특성들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고 강조됩니다. 또한 성서에서는 하나님과의 교감, 예배, 섬김을 통해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성스럽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믿는 자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따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마음이 성령과 함께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게 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주도하에 믿는 자의 내면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과 교감의 장소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믿음의 행동과 삶의 방향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감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개인의 믿음과 마음을 통해 건축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즉, 하나님의 성전은 믿는 각 개인의 마음이 성령의 인도와 변화를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하고 건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믿는 각자가 성령의 주도하에 성장하고 순종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 강조됩니다.

 

고전서 3:16-17절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도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훼파하면 그를 훼파할 이가 있으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가 그러므로 그 성전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의 모임, 즉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여기고,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 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함께 성령의 지도를 받아 성장하고 순종한다면, 그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엡 2:21-22절 “그가 그 안에 모든 건축물을 합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게 하여 주 안에서 너희로 또한 성령으로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건축물로 여기며, 그들이 모여 성령으로 하나님의 거하는 곳이 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장하면서, 그들이 모여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3. 때를 아는 사람

 

역대하 5장에 나오는 게하시는 선지자 엘리사의 수종드는 사람으로 일생동안 수고도 많이 하였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문둥병에 걸려서 최후를 비참하게 마치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신 나아만이 문둥병으로 고생하다가 엘리사를 방문하여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하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나아만은 많은 은과 비단으로써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렸으나 엘리사는 한가지도 받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엘리사도 생도학교운영에도 필요한 예물을 왜 받지 않았을까요?

 

엘리사의 능력은 하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입니다. 또한 엘리사는 이방인인 나아만이 치유됨으로 하나님이 이방인들속에 더 많이 전파되기를 원했습니다. 나아만은 이적에 한번 놀랐고 엘리사 선지의 청렴에 두번째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귀로에 올라 차탄우행하는 도중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병이 나은 걸 감사하는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나아만이 다시 강력하게 말했으나 엘리야는 다시 거절했습니다. 나아만은 어쩔 수 없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의 예물을 엘리사가 거절하자 이런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던 게하시는 탐심이 생겨서 엘리사 몰래 나아만을 뒤좇아 가서 엘리사의 심부름이라 하면서, 엘리사의 말씀이 두 소년이 에브라임에서 왔는데 그 소년에게 옷 두벌과 은 달란트를 주라고 하신다은과 옷을 달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아만은 아무 보답도 못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려 게하시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걸 집에 감추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엘리사가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묻자 게하시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엘리사는 모든 사실을 알고 왕하 5:26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합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사람입니다. 엘리사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대로 발각된 겁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이렇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왕하 5:27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는 부끄러움으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엘리사 앞에서 물러나왔습니다. 그러자 곧 나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건 게하시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돈에 욕심을 내거나 그런 유혹을 늘 받습니다. 나아만에게서 이런 돈이라도 받아내는 게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엘리사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서 일정한 액수의 기부금을 받아서 엘리사 선지학교의 운영기금으로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돈이 많은 나아만의 병을 고쳤으니까 기부금을 좀더 두둑하게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걸 받은 것입니다. 나아만도 보답의 기회를 얻게 되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도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고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방 사람이었지만 나병이 나았고, 게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오히려 나병에 걸렸습니다. 평생 우상을 섬기면 살았던 나아만과 평생 엘리사 곁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던 게하시의 운명이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책망하면서 26절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게하시의 잘못은 때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아만으로부터 얻은 돈으로 감람원 포도원 우양 등을 사려했던 게하시의 생각을 엘리사가 간파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게하시는 착복한 재물을 팔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것 같아보입니다.

 

약1장 15절에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고" 했습니다. 게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을려고 한것이 아니고 자기의 계획으로 축복을 누려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것은 우리에게도 축복을 받을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 시기를 참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분명히 엘리사의 이말은 게하시에게도 축복이 다가오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는 그 사실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입니다.

 

마치 발람이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나귀는 주의 사자를 보았는데 사람인 그는 그것을 못보고 나귀만 채찍질한 것이나 같습니다.

 

게하시는 에브라임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 중 어린 생도들이 갑자기 엘리사를 방문했다는데 이 소년들이 돈과 의복을 요구하면서 엘리사가 지금은 한달란트와 의복 두벌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실상 나아만이 원래 주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억지로 청하여 게하시에게 한달란트가 아니라 두달란트를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보물들을 감추었습니다. 그후 그는 동방의 종들이 하는 습관대로 가서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마치 나아만이 출발한뒤에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꾸민 것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게하시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게하시는 적어도 자기가 한 일은 자신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으나 엘리사는 게하시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뢰란? 신용하며 의로함 남을 믿고 의지함 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신뢰를 하여 가까이에 두었지만 게하시가 그 신뢰감을 깨뜨린 것입니다. 게하시의 행동은 우선 그의 주인이 그에게 가졌던 신뢰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크게 신뢰받는 동료이기도 하였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가 큰 영향력을 가진 특권적인 위치였습니다. 엘리사의 종이라는 것 자체가 이방인이 두려워하는 명예로운 직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이런 게하시가 탐욕스런 욕망에 굴복하며 나아만을 따라가 보물을 달라고 한 게하시의 행위는 악한 것입니다.

 

25절에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든 행동은 선지자의 주권하에 움직이어야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큰 죄를 범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전도 대열을 자주 이탈하여 대제사장들과 접촉을 했기 때문입니다. 게하시는 분명히 자기의 위치를 탈선했습니다.

 

게하시는 진실하지 못하여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을 칭찬하신 것은 요 1:47 "보라 이는 참 이스하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참 성도라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마음이 간사함도 없이 진실해야 합니다. 간사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주님은 칭찬을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진실된 인간 영혼이 모든 자연적 미덕의 기초입니다. 그것은 참 종교, 용기, 정의, 절제 등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진실하고 공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해 주신다고 말하는 것도 사도들의 목소리인 동시에 우리안에 있는 진실성의 목소리입니다. 성도들의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를 구하도록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진실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27절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게하시가 받은 형벌하나는 게하시 자신이 나아만과 같은 문둥병자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병이 자손 대대로 유전 되리라는 것입니다.

 

게하시의 처벌은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 처벌의 공·의를 분명이 발견하는 동시에 나의 행위이며 그동안 우리가 진실이 결여되어 살지는 아니했는지 자신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모든 것을 물질적인 손익계산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의 논리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나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병은 피부가 곰팡이류에 오염되어서 결국 모든 감각을 잃게 되는 병입니다. 불에 닿아도 그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게하시의 나병은 단지 육체적인 나병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영적인 나병이 문제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감각이 죽는 겁니다. 이방인 나아만은 이제 영적 감각이 살아났고, 거꾸로 하나님의 백성인 게하시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인 게하시만이 아니라 북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영적으로 무감각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시대에 대한 영적 분별력이 무감각해졌다는 말을 실질적으로 그런 상태에 들어가면 본인이 그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떤 집단이나 어떤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총체적으로 무감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경제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지금 이 시대는 영적으로 나병환자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웬만한 자극을 받아도,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영혼이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조금 생각이 살아있는 사람들도 세상이 다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성경은 게하시 사건을 통해서 북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어찌 ... 받을 때이냐? 정신차려라

 

때에 대한 분별력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분별력이 회복된다는 말은 우선 하나님 경험은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빛 비춤에 의해서 열립니다. 분별력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생명의 영이고, 진리의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평화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일생동안을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던 하나님의 종들이 말년에 신앙으로 실패를 한 사람들의 기록을 종종 보게 됩니다. 신앙의 생활을 체험하고 은혜의 진미를 맛본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위하여 일생동안 수고를 하고 말년에 신앙적으로 실패를 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제적 실패는 다시 회복할 수 있고 정치적 실패는 다시 성공할 수 있지만은 신앙의 실패는 좀처럼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신앙의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선교현지에서 조그마한 탐심이라도 생길 수 있는 원천들을 마음속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하고 늘 기도와 찬송과 예배로 주님과 가까이 하면서 맡겨진 사역을 충실히 해나가는 것입니다.

 

4.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사람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말기에 있었던 선지자로서, 그의 예언은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과 파멸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백성에게 재앙을 예언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전하였습니다.

 

렘 1:11-12절에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비전을 통해 유다 백성에게 전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구나무가지와 끓는 가마는 그 비전의 일부로 등장합니다 이 비전에서 살구나무는 일반적으로 속히 이루어질 일을 나타내며, 끓는 가마는 유다에 더 큰 재앙이 다가온다는 상징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유다에게 경고하고,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권고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를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살구나무는 흔히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기 때문에 쉬지 않고 성장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살구나무를 보여 주심으로써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꾸준하고 부지런 하라 라는 것을 묵시적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살구나무 꿈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면 사단의 시험을 받게 되지만, 말씀을 잘 이해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사탄의 시험살구나무 환상의 뜻은 하나님의 언약하신 말씀은 반드시 시행하시고 지키시고 뜻을 이루신다는 교훈입니다.

 

살구나무는 유다 지역에서 가장 먼저 잎이 나는 나무로, '성취'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하나님 말씀이 사명자를 지키고 동행 하시고 반드시 성취 될 것을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특히 하나님께서는 살구나무를 본다고 대답한 예레미야에게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살구나무는 ‘솨케드’인데 이는 ‘지켜보다’ 혹은 ‘깨어 있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동일한 어근의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의 살구나무는 겨울에도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기 때문에 쉬지 않고 성장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을 원문으로 해석하면 ‘네가 살구나무(사케드)를 본 것처럼 하나님도 내 말과 뜻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겠다.’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살구나무 가지는 유대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어린 권고와 책망있는 교양,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대한 보증과 약속, 그리고 경고를 의미합니다. 또한 봄이 되면 살아날 새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환상은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끊는 가마”를 하나님께서 보여 주었습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버리고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불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북에서부터 가마가 기울었다’는 것은 북방 바벨론을 통하여 남쪽 유다 위에 임한다는 내용이었고, ‘끓었다’는 말은 그 도가 극심하고 맹렬하므로 그 끓는 가마가 북에서 기울어진 환상은 심판에서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말씀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17장 5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있다면 이제 임하게 하라’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그 종들을 비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들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것들 앞에서는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며 복을 달라고 빌면서도 정작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부정하며 경외하기는커녕 멸시와 조롱으로 일관했던 백성들입니다.

 

이 사실은 지금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다면 눈에 보여 달라느니 하나님이 있다면 왜 악한 자를 지금 벌하지 않느냐는 등의 말을 하며, 하나님의 존러면서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 라고 말하거나 혹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와 향락을 신처럼 떠받들며 그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행복과 구원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부인하고 하나님 섬기는 자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계획을 위하여 부르신 자에게 능력과 강건함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선민이고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라고 반역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행우에 따른 보응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북방 나라들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의 삶의 모든 영역을 불꽃같이 지켜보시며 큰 능력으로 인도 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손과 발을 지으신 자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인간에게 법을 주어 재판하게 하신 자가 영원하신 말씀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간단한 이치를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까지도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죄악으로 어두워졌고 눈과 귀가 가리워졌기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즐기는 그들은 술 취한 자가 감각이 마비되어 때려도 아픈 것을 모르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착각과 혼란 속에서 비틀거리며 어둠 속을 헤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신은 없다"는 무신론자들이 소리치며 믿는 분들가운데서도 권력이나 명예, 돈과 같은 우상 앞에 엎드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리석으며 혼탁한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며, 세상 가치관으로 사는 그들의 어리석은 말에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동행 하시고 보고 듣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이 복되고 힘과 능력이 됩니다.

 

성령님은 “지금 내가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 하시고 계심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내 말 한 마디, 내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보고 듣고 알고 계심을 인정하는지? 죄악이 끓어 넘치면, 쏟아버리시는 진노가 있음도 믿고 있는지? 거룩한 두려움으로 내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있는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인지? 여전히 말씀을 떠나 죄악의 화력도 올리고 있는 형제와 이웃이 있다면,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고 계십니다. .

 

기도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점검하는 삶을 경건하게 살아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복음의 사명 자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매일 매일을"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매순간 당신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을 전해 보는 하루가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전도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전해 주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라고 경고하고 또 경고하여 엄하게 심판하시겠다는 음성을 반드시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후회 없이 기쁨으로 주님 품에서 영원히 살 그 날과 그 때를 준비하고 살면서, 부활의 주님이 오셔서 영생의 복 된 자리로 영광 중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오늘도 묵묵히 주어진 현장에서 주의 뜻을 이루며 복음의 증인 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인 복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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