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4:17-29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두 제자를 책망하신 이후에(눅24:25) 성경을 가지고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눅24:26-27). 두 제자에 대한 주님의 책망은 동시에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제자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동시에 우리에 대한 책망입니다. 두 제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눅24:17참조). 동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확고히 믿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불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였던 것입니다. 두 제자가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찾고 있던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눅24:1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두 제자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눅24:16)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와 같은 인체의 모든 기능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19:11) 이것은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것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에도 해당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책과 부패를 가진 자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영적인 빛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나, 아니면 일반적인 일에 있어서나 분별력을 빼앗겨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허다한 것입니다. 두 제자가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할 때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24:17)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면서 머물러 섭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당한 것이 너무나 슬펐던 것입니다. 그래서 글로바는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냐”(눅24:18)라고 답변합니다. 글로바의 대답 속에서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소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글로바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무슨 일이냐”(눅24:19)라고 묻습니다. 글로바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일깨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글로바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눅24:19)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은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글로바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안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글로바는 위험을 무시한 채 그리스도를 “선지자”(눅24:19)로 부름으로써 존경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글로바가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몰라서 “선지자”(눅24:19)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눅24:21절을 보면 글로바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구속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가 구속자라는 더 높은 고백으로 끌어올리고자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눅24:19)라는 말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애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사실, 아니 그 보다 더 탁월한 분, 곧 메시야라는 사실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명확히 증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었습니다”(마7:29)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이 충분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요10:38)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를 죄로 책잡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말의 올무”(마22:15)에 걸리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신분은 그렇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러내고 전시하기 위해서 행하는 얼빠진 전시효과가 필요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능력이 따르며, 사람들 앞에서 모범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마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진실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사람들 앞에서 모범을 보이며 진실하게 행동하는 목회자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희귀합니까? 얼마나 많은 자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대신” 사람의 지혜로 말을 하려고 합니까?(고전2:3-5) 그러나 사람들은 성령을 의지하면서 진리를 말하는 대신에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고전2:13)로 하며, 얼빠진 전시효과를 사용해서 자신을 전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눅24:20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눅24:21절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고 말합니다. 글로바는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 기대가 깨져서 사라진 것같이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글로바가 메시야의 사역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참된 구속과 위로가 무엇인지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대했던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므로 수포로 돌아간 처럼 보였습니다. 여기에 그의 실망과 슬픔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글로바는 주님이 죽음을 당한지 삼일이 지났는데(눅24:21) 어떤 여자들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고 전하여서 우리를 놀라게 했고(눅24:22-23), 몇 사람이 무덤에서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았다고(눅24:24)고 말합니다. 삼일이 지났다(눅24:21)라는 말에서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마16:21)이라고 주님이 여러 번 가르치신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한 마디로 삼일 전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수치스럽게 죽으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한 대로 삼일 째 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글로바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증언을 들었을 때 놀랐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에 대한 소망이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무덤에 가 보았고 그리스도의 무덤도 비어있었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나신 것이 아닌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눅24:25-26절 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주님은 빈번하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증거하시거나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들의 마음은 낙담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여서 그들을 가르치신 것이 아무런 결과가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귀머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돌과 나무에게 말씀 하신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결과는 그들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마음에 더디 믿는 것은 선지자들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들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교훈 자체도 명확합니다.(사53장) 그런 선지자들의 교훈을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핑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망은 단지 두 제자가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주님이 무감각한 제자들을 꾸중하셔서 일깨우시는 것처럼 책망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눅24:25)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 때문에 글로바가 실족하지 않도록 메시야의 사역을 설명해 주시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눅24:26절에 있는 이 간략한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면서 충분히 설명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눅24:27절입니다. 그리스도가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고난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눅24:26) 고난을 받지 않으면 메시야가 될 수도 없고,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죽음은 우리의 죄책을 자신에게 전가하여,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를 속죄해서, 우리에게 내려져야 하는 죄책을 제거하고,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길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필연적이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구속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없이는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일이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마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가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부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속자로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왜 믿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 올 이 상상도 못할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습니까? 열에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합니다.
이제 눅24:2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눅24:26절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 역시 자신에 대한 증거를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격리되지 않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무익하게 하였다는 주장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롬10:4)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벗겨집니다(고후3:16)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체결한 언약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성막과 의식은 하늘의 모형이었습니다.(히9:23) 따라서 성막과 의식의 배열은 하늘의 모형과 일치되게 배치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사와 모든 성전 의식의 깊은 근원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서, 영적인 것들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임재하신 성소는 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대하7:1-3) 많은 약속이 포함된 율법은 피뿌림으로 날인되었습니다.(출24:8) 제사장은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섰지만, 희생제사를 바치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의식의 순서에 있어서, 그리고 제사직, 희생제물, 성소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왕권에 대한 뛰어난 예언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율법의 해석자였습니다. 선지자들은 계시를 따라서 중보자를 예언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이러한 예언과 율법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모세에게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은 언약에 대한 기억을 백성들 가운데서 새롭게 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를 더 분명히 드러내며, 화해의 수단을 더 명확히 제시하고, 구원의 확신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켰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구약이 자신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구약 성경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엠마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더 가시려고 하였습니다.(눅24:28) 그러자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에서 함께 유하자고 강권했습니다(눅24:29)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면서(눅24:15) 그리스도를 찾을 때, 즉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는 것”(행17:11)은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을 때 그리스도는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물론 2000년 전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명의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하셨지만 오늘날에는 은밀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도록 인도하셔서, 주의 말씀의 설교를 들을 때, 집에서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주님은 사람들에게 신비하게(은밀하게) 가르치십니다. 이런 신비한 역사가 세계 각처에서, 방방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구속에 대한 이런 위대한 역사를 조명을 받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신비한 영적인 일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경배를 돌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