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4:30-40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낙심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도 믿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모습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24:25)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으며, 선지자들의 예언을 가지고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또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주께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어서 확증한 것이 귀머거리와 돌과 나무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시대의 신자들은 주님의 제자들보다 더욱 더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두 제자를 꾸짖으신 다음에 구약에서 예언된 참된 메시야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합니다(눅24:26)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세상을 점령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메시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먼저 말씀하시고(눅24:26) 모세와 선지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눅24:27).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이해는 구약(율법)과 격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율법과 선지자의 빛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체결한 언약은 중보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의 의식은 하늘의 모형으로서 하늘의 것과 일치되게 만들어졌습니다(히9:23). 율법의 많은 약속들은 피로써 날인되었습니다.(히9:22참조) 제사장은 한 사람으로서 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섰으며, 그것도 희생제물이 바쳐지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율법의 의식은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사장직분, 희생제물, 성소의 배치 등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때만이 율법의 의식이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에 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할 동안 마침내 엠마오에 도착하게 되었고, 두 제자의 강권으로 엠마오로 들어갔습니다(눅24:29) 눅24:30절입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축사하셨다”. 곧 축복하셨다는 의미는 예배를 끝마칠 때 하는 축도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축사하셨다”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손에 빵을 들고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딤전4:4-5을 보시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창시자이며,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려서, 이 세상(속인들)과 우리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갈 수 있는 말씀이지만 주님은 식사 앞에서도 우리의 생각을 일깨우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제자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눅24:16),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때 제자들의 눈을 여셨습니다.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 앞에서 빵을 들고 감사기도 드리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눅24:31) 제자들의 눈을 가리던 안개가 걷히고 장막이 벗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자마자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눅24:31) 주님은 갑작스럽게 제자들 앞에서 떠난 것입니다. 왜 주님은 두 제자가 자신을 알게 하시 자 마자 떠나셨습니까? 그것은 두 제자가 그리스도를 더 이상 뵈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와 같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는 지상의 것에 너무나 많이 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생각할 때 언제나 육(지상)에 속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두 제자 앞에서 즉시로 떠나지 않으셨다면 두 제자는 그리스도를 지상 생활로 끌어 드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갑자기 떠나신 것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골3:1-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증거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만큼 두 제자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뵐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눅24:32절을 읽겠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주실 때 성령은 두 제자 안에서 이미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가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이후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으면서 받았던 느낌을 각자 돌이켜 보면서, 서로 대화할 때 비로소 (설교를 들을 때 역사하셨던) 성령의 신비한(은밀한) 역사에 대한 생생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신자들이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의 활동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분명히 깨닫지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본능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케이스가 두 제자의 경우입니다. 두 제자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를 생각해보니 그들의 마음 속에서 영적인 깨달음이 생겼고 영적인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이 얼마나 둔했던 것인가를 자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왜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던가? 주님이 자신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을 때 자신들은 왜 그리스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던가? 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이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하도록 영의 직분을 세우십니다(고후3:8) 그러나 영의 직분으로 세운 자들의 사역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잡아서 믿음의 순종을 낳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마음이 뜨거웠다”(눅24:32)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능력을 분명하게 증거 하는 비상한 종류의 열기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의 불을 주셔서 그들의 죄악을 소멸케 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불을 붙이셔서 그들을 하늘로 인도하십니다. 하늘의 교훈이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제자 속에서 불타고 있는 하늘의 불은 두 제자를 가만히 있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초저녁에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한 시간까지 계산하면 어두워진 이후의 밤이었을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서 너 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잠을 자는 것도 그만 두고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고, 슬퍼하는 마음을 빨리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눅24:33) 그렇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열한 사도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었고”(눅24:33)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만난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눅24:34).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본 사실은 고전15:5에 증거되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말을 듣고 베드로는 무덤에 달려갔으나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눅24:12) 돌아와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기뻐하면서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눅24:34)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도마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대 부분은 믿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눅24:35절에서 두 제자가 본 것을 말하여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더 확실히 했습니다(눅24:35)
그렇게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에 대해서 서로 간에 말을 할 때에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눅24:36) 그리스도는 적절할 때 제자들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한 것,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것을 책망하려고 오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였습니다(눅24:37) 방금 전까지는 제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서로 기뻐하며 이야기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자신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만 기겁한 것입니다. 겁에 질린 나머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 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영은 영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육체를 입지 않은 영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24:38)라고 경고하십니다. 겁에 질려 있으면 대낮에도 헛것을 봅니다. 또한 두려워할 때는 마음속에 해로운 의심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마음속에서 의심이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살아나신 것으로 보지 못하고 영을 보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이런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의심은 우리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질식시켜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혼란에 빠질 때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문제의 진상이 무엇인지 똑 바로 쳐다보아야 합니다. 마친 가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제 정신을 차리고 똑똑히 그리스도를 살펴보라고 말씀하십니다.(눅24:39-40)
그것이 눅24:39절-40절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리스도는 자신이 영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손과 발을 보여 주십니다. 즉 “내 손과 발을 보라. 나에게 손과 발 즉 실제로 육체가 있는 것을 보라. 못 자국 난 손과 발이 보이지 않느냐? 이것은 너희가 보았던 바대로 십자가에 못 박혔던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진 사람과 영혼을 구별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영혼은 “살과 뼈가 없지만 자신은 있다”(눅24:39)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너희가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그렇게도 가깝게 대화를 나누었던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신령한 몸을 가지시고 있지만 여전히 육체입니다. 인성을 따라서는 하나님같이 전지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고, 편재하지도 않습니다. 특히눅24: 40절에서 “손과 발을 보이실 때” 그 손과 발은 사람이 만질 수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손과 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못 자국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명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이 만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육신은 영혼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있는 상처를 볼 때 그것이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음을,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로서 사망에 대한 승리자며, 하늘에 속한 복된 불멸을 우리를 위해서 부여받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증명해야 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충분히 확신하도록 자신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사역하던 때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탄생한 것도 아니며 실제로 인성으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육체가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이나 유령으로 오시고 고난을 가현적으로 당한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아야 할 자는 사람이기에 그리스도 역시 사람이 되셔서 고난과 죽음을 당한 것이고 사람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성이 신성과 연합되어 한 위격으로 계시다는 이 신비를 우리는 깨달읍시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그리스도는 실재하십니다. 그러나 신성과 분리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인성으로 계신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은 채 실재하시는 그리스도(신성)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복된 영생의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며 하나님에게 경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