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대군은 위대한 대신라국 황제 경순 김부 황제와 대고려국 태조 왕건 황제의 혈통을 이어 받은
정통 고려황실의 후손으로 조선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그 시호를 격하하여 의성군으로 왜곡하였으나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황제의 딸도 황제(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등등)로 등극하였고
그 소생에게도 태자라는 칭호를 부여 했었으며 국왕위도 물려 받았으므로
의성군이 아니라 의성대군이 옳바른 호칭법이다.
의성대군은 기 알려 진 바와 같이 고려국(Korea) 태조 왕건 황제 폐하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와
통일신라 경순황제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로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내내 의성 대군으로 추존 받아
황실 후손으로서 그 장자 종묘는 평양 강서 의성 김씨 대종손이 유지하여 왔다.
의성 김씨의 배다른 형제로서는 3형제가 있는데,
경순황제께서 낙랑 공주와 혼인하여 자손들을 생산하기 이전
신라 황실 박씨사이에서 마의태자등, 차자(광산군), 영분공자를 두었고
역시 장녀는 고려황실의 왕비로서 경순황제와 겹사돈을 맺었다.
※ 2023.03.추가 : 여기서 영분공자란 명호는 그 근거가 사실상 빈약하고
경주 김씨측에서 조선조 시대에 비문등에 여러 방법으로 심하게 가탁을 하는등등의 숫법으로
경순황제 후손임을 가공하려고 억지로 영분공자에 그 대를 연결하지만,
사실상 고려시대나 오래된 비문등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공의 명호임을 알려 두고,
그래서 경주 김씨측에서 주장하는 영분공자=은열공이란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마의태자는 너무도 유명하여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나 간추려 말하면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여 신선이 되었고 후손이 없는 것으로 알려 졌으나,
해방후 이 마의태자 후손임을 참칭하는 성씨가 출몰했는데 그 역사적, 사료적 신빙성이 떨어 진다.
경순황제의 둘째 아들은 그 유명한 전라도 광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의성 김씨와는 배다른 형제로서 중형의 위치에 있으나 고려황실 태자는 아니고
신라황실의 후손으로서 역시 군호를 받아 광산군으로 추존됐다.
문제의 경주 김씨는
아래 신라 경순왕전비나 김씨본관록에서는 누락된 씨족으로서 경순황제의 후손이 아니다.
다만 경주 김씨 문중 스스로 시조로 내세운 자를 은열공이라 참칭하고
스스로 경순황제의 4자로 족보에 기록하여 마치 신라 김씨 정통 맏형을 참칭하지만
이것은 아래 역사적으로 공인된 사료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서
신라황실이나 고려황실과는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이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 김씨 문중에서는
심지어 경순황제릉이 소재한 경기도 연천 경순황제 인근에 부지를 매입하여
은열공이라는 가묘와 가짜 비석을 세워 스스로 경순황제와 낙랑공주 후손(4째 아들)이라고 참칭하지만
이것은 가짜, 허위로서 경순황제의 4째 아들은 의성 김씨이다.
한편 역사적 사료를 동원한 재야학계에서는
이 경주 김씨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일전을 치룬 선비족 일파의 후손으로서
고구려와의 대전에 패하여 도망을 치다가 후일 신라로 귀부하여
경주 부근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고증이 있다.
실제 이 경주 김씨는 스스로 족보에 경순황제의 후손을 참칭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고증이나 기록물이 됫받침 되지 않는 괴뢰로서 은열공은 군호가 아니며,
경주는 오늘날 붙혀진 지명으로서 원래 이름인 서라벌이나 월성 사로등등으로
기록된 고자료(삼국시대, 고려시대등), 즉 사로 김씨등과 같은 사료가 있어야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데
자신들이 내세우는 족보에서 조차도 경주 김씨라고 기록된것 외에 달리 공인자료, 사료가 없어
스스로 허위임을 드러낸 분명한 가짜로서 경순황제, 태조왕건황제의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다.
또 전술한 것과 같이 경주 김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역사적 고증자료가 없으므로
이를 가공, 참칭하기 위해 경기도 연천 경순황제를 인근에 일단의 부지를 조성하여
그곳에 은열군이라는 가짜묘를 만들어 성역화하고며 역사공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황실 황손으로서 신라 김씨 후손은 광산 김씨, 의성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가 있고,
그중 고려황실 후손으로서는 첫째 의성 김씨, 둘째 언양 김씨, 세째 삼척 김씨가 있으며,
이외 경순황제나 낙랑공주 후손을 참칭하는 성씨는 모두 가짜, 즉, 괴뢰이다.
의성 김씨는 경순황제로 부터는 4째 아들이지만,
태조 왕건황제로 부터는 첫째 외손이 되어 이를 크게 기뻐학시고
의성대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태자로 제수하셨으며 어머니는 위 설명과 같이
왕건황제의 첫째딸 낙랑공주(신란궁부인)이시며 태조왕건황제폐하의 첫째 외손으로서
경순황제로 부터 이어진 신라 법통을 잇는 의성대군으로서 종묘를 모시고 있다.
※2023.03. 추가
"신란공주" = "낙랑공주"라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 역시 옳지 못한 표기법이고 다만 낙랑공주가 신란궁이라는 궁궐에 세거하여 살았으므로
이를 높이 일러서 택호로서 "신란궁주" 내지 "신란궁부인"으로 명호한 사실은 있어
이를 두고 "신란공주"로 왜곡하여 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따라서 현재 고려황실의 법통이 외형상 끊어 진 상태에서
그나마 고려황실의 종묘를 모시며 정통을 이어 가고 있는 문중은 의성대군 김씨이며,
사촌관계로서 개성 왕씨가 있는데 아직 그 정확한 고증은 마무리 되지 않았다.
※2023.03. 추가 :
또 중국 화교 한민족 이성계가 황실에 침범을 하여 황족들을 모두 살상할 당시
이를 피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있던 "개성 왕씨들"은
고려황실의 양대 축인 의성 김씨로 성을 바꾸어 그 옥체를 보존케 하였는데,
이를테면 외갓집 성씨를 따른 것으로서 당시 풍습으로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따라서 의성 김씨에는 고려 황실의 적통으로서 개성 왕씨가 다수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또, 개성왕씨가 다른 한편으로서 전씨외 여러가지 성씨로 바꾸어 생존을 도모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아직 그 역사적 고증이 부족한 부분이 많다.
뿐만아니라 역도 짱깨 이성계가 황실을 찬탈할 당시
단지 개성 왕씨라는 성씨를 가졌다는 이유로 약 200~300만명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고
당시 인구가 1천만명이엇던 것에 비추어 전 인구의 30%를 도륙하였다는 것으로서
실로 엄청난 숫자였고 이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킬링필드였음을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반드시 이를 기억하고 훗날을 도모하여 이를 반드시 응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의성 김씨가 곧 개성 왕씨이고 황실의 적통이 의성 김씨 그 안에 실존하는 역사적 이치로서
부모를 죽인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것 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고려황실이 복위되어 국법으로 황실 설치를 하게 된다면
태조왕건황제폐하의 직계를 철저한 역사적, 실증적(DNA 검증) 조사를 거쳐
그 장자 내지 그에 버금 가는 후손을 황손으로 추존하는 것이 옳다고 보고
만일 이와 같은 DNA 검증이 실패할 경우 고려황실의 또 다른 황실 후손인 의성 김씨,
즉, 의성대군 종묘를 모시는 평양 강서 출신 집안의 장손을 간택함이 옳다고 본다.
아래 문헌 출처 : 위키백과 낙랑공주편 참조
낙랑공주 (고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낙랑공주
樂浪公主별호 출생일 사망일 부친 모친 배우자 자녀
낙랑공주(樂浪公主. 생몰년 미상) 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는 고려 태조의 딸이며 경순왕의 후비이다.
목차
개요
낙랑공주는 태조(太祖)와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 유씨(劉氏)의 딸로, 신라의 경순왕과 혼인하였다.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도 일컬어진다.
생애
935년 11월 22일, 태조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입조(入朝)하자 정전(正殿)에 나와 백관을 모아놓고 예를 갖추어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혼인을 거행하였다.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가족 관계
자녀 등장
고려·조선조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지면서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져,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각 씨족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 족보를 발간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이 시호나 군호를 붙여놓기도 하고 상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 올리는 등 족보의 위·변조가 극에 달한다.
《김은열 묘지명》
1784년(정조 8)에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기사한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8자들을 두었는데 『일(鎰)·굉(鍠)·명(鳴)·은열(殷說)·중석(重錫)·건(鍵)·선(鐥)·종(鐘)』이라 한다.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이후 1785년 김사목(金思穆)은 경주 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추기한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3][4] 그리하여 8자들을 『일(鎰)·황(湟)·명종(鳴鍾)·은열(殷說)·중석(重錫)·건(鍵)·선(鐥)·종(鐘)』이라 한다.
《묘지명》 진위 여부
《김은열 묘지명》의 형태는 배위(配位)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묘지명》에 나오는 아들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명》은 나라의 역사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된다.
또한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도 2자 '김굉'(金鍠) 또는 '김황'(金湟)과 4자 '김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왕씨(王氏)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신라경순왕전비》
1814년(순조 14) 강릉인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비석에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은 전비 박씨와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차자(次子)·영분공자(永芬公子)이고, 딸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 후비 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2자 황(湟)·3자 명종(鳴鍾)은 배척하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여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 5자들 두었으며, 2녀는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5]
작금에 들어서는 《김은열 묘지명》의 제3자 '김명종'(金鳴鍾)의 시호가 '영분공'(永芬公)이라 하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에서는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정작 ‘경주 김씨 영분공파’ 족보에는 영분공(永芬公)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다.[6][7][8]
문헌 왜곡
-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들은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생애 및 배위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 후손이라는 김사목은 《김은열 묘지명》을 족보에 옮기면서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였다.
- 《신라경순왕전비문》에서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누락하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
- 《김씨 분관록》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8자들은 모두 배척하고,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과 후비 왕씨 소생 중 '석(錫), 선(鐥), 추(錘)' 3명에 대해서만 군호를 붙여 의성군 석(錫), 언양군 선(鐥), 삼척군 추(錘)라 하며 시조로 기록하였다.
- 이후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신라경순왕전비문》을 재차 왜곡하여 전비 박씨 소생의 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를 '황'(湟)이라 하며, 셋째 왕자가 명종(鳴鍾)이며 영분공(永芬公)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는 2자 황(湟)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김은열 묘지명》등은 정사(正史)에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으로 조선 후기 족보 편찬 과정에 위조(僞造)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造作)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82%99%EB%9E%91%EA%B3%B5%EC%A3%BC_(%EA%B3%A0%EB%A0%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