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게시판

[[퍼옴]]Re:발해사에 관한 게시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원사료] 구당서 동이전 발해말갈(舊唐書 東夷傳 渤海靺鞨)

작성자백제사|작성시간08.09.20|조회수166 목록 댓글 15

발해말갈(渤海靺鞨)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1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旣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保阻以自固. <盡忠>旣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絶,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衆東保<桂婁>之故地/$《新書》卷二一九《北狄傳》作[ 婁].$/,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디 고려의 별종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식솔을 거느리고 영주로 옮겨 기거하였다.
만세통천(萬世通天696~697) 때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더불어 각기 망명하였던 무리들을 통솔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수비하였다. 진충이 죽자 측천이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의 잔당을 토벌하게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격파하여 머리를 베고 또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을 핍박하였다. 조영은 고려와 말갈의 무리들과 합쳐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천자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해고는 몸만 빠져 돌아왔다. 거란과 해에 복속되어 있던 무리들이 모두 돌궐에 투항하자 도로는 단절되었기에 측천이 능히 토벌하지 못하게 되자 대조영은 마침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계루의 옛 땅에 의지하여 동모산에 자리잡고 성곽을 쌓아 기거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2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衆及<高麗>餘燼, 稍稍歸之. <聖曆>中, 自立爲<振國王>, 遣使通于<突厥>.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南與<新羅>相接. <越憙靺鞨>東北至<黑水靺鞨>/$《冊府》卷九五九作[南與<新羅>相接, 西接<越憙靺鞨>, 東北至<黑水靺鞨>.]$/, 地方二千里, 編戶十餘萬, 勝兵數萬人. 風俗與<高麗>及<契丹>同, 頗有文字及書記. <中宗>卽位, 遣侍御史<張行 >往招慰之. <祚榮>遣子入侍, 將加冊立, 會<契丹>與<突厥>連歲寇邊, 使命不達. <睿宗><先天>二年, 遣郞將<崔 >往冊拜<祚榮>爲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爲<忽汗州>, 加授<忽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

대조영은 날래고 용감하여 군사를 잘 부렸는데 말갈의 무리와 고려의 유민들이 점차 그에게 돌아갔다.
성력(聖曆698~700)연간에 스스로 즉위하여 진국왕이 되고 사신을 보내 돌궐과 왕래하였다. 그 땅은 영주의 동쪽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접해있다. 월희말갈의 동북으로 흑수말갈에 이르고 땅은 사방 2천리에 편성된 가구수는 10여만으로 날랜 군사가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려 및 거란과 같으며 자못 문자와 서적의 기록이 있다.
중종이 즉위하자 시어사 장행급을 파견하여 그를 불러 위로하였다. 대조영이 아들을 들여보내 시중들게 하자 얼마후 관작을 더하고 조칙을 내려 직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마침 거란과 돌궐과 더불어 해마다 변경을 노략질하였기에 사신이나 명령이 도달하지 못하였다.
예종 선천(先天712~713) 2년에 낭장 최흔을 파견하여 가서 조영을 책봉하여 좌효위윈외대장군 밸해군왕에 임명하고 그가 통솔하고 잇던 곳을 그대로 홀한주로 삼고 홀한주 도독을 더하여 제수하였더니 이로부터 해마다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3
⊙<開元>七年, <祚榮>死, <玄宗>遣使弔祭, 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大武藝>襲父爲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

개원(開元713~741)7년에 대조영이 죽자 현종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문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의 맏장자인 계루군왕 대무예에게 조칙을 내려 직위에 오르게 하고 부친의 관작을 답습하여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4
⊙十四年, <黑水靺鞨>遣使來朝, 詔以其地爲<黑水州>, 仍置長史, 遣使鎭押. <武藝>謂其屬曰: [<黑水>途經我境, 始與<唐家>相通. 舊請<突厥>吐屯, 皆先告我同去. 今不計會, 卽請漢官, 必是與<唐家>通謀, 腹背攻我也.] 遣母弟<大門藝>及其舅<任雅>發兵以擊<黑水>. <門藝>曾充質子至京師, <開元>初還國, 至是謂<武藝>曰: [<黑水>請<唐家>官吏, 卽欲擊之, 是背<唐>也. <唐國>人衆兵强, 萬倍於我, 一朝結怨, 但自取滅亡. 昔<高麗>全盛之時, 强兵三十餘萬, 抗敵<唐家>, 不事賓伏, <唐>兵一臨, 掃地俱盡. 今日<渤海>之衆, 數倍少於<高麗>, 乃欲違背<唐家>, 事必不可.] <武藝>不從, <門藝>兵至境, 又上書固諫. <武藝>怒, 遣從兄<大壹夏>代<門藝>統兵, 徵<門藝>, 欲殺之. <門藝>遂棄其衆, 間道來奔, 詔授左驍衛將軍. <武藝>尋遣使朝貢, 仍上表極言<門藝>罪狀, 請殺之. 上密遣<門藝>往<安西>, 仍報<武藝>云: [<門藝>遠來歸投, 義不可殺. 今流向<嶺南>, 已遣去訖.] 乃留其使<馬文軌>·< 勿雅>, 別遣使報之. 俄有洩其事者, <武藝>又上書云: [大國示人以信, 豈有欺 之理! 今聞<門藝>不向<嶺南>, 伏請依前殺却.] 由是鴻 少卿<李道邃>·<源復>以不能督察官屬, 致有漏洩, 左遷<道邃>爲<曹州>刺史, <復>爲<澤州>刺史. 遣<門藝>暫向<嶺南>以報之.

14년에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니 조서를 내려 그 땅을 흑수주로 삼고 그대로 장사를 설치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진함의 경계를 지냐서야 비로서 당과 한 판 서로 왕래하게 된다. 예전엔 돌궐에게 토둔을 청할 때도 모두 앞서 나에게 아뢰고 같이 갔다. 지금은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곧바로 한나라에 관직을 청하니 필시 이는 당나라와 왕래하고 도모하여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하며 그의 아우 대문예 및 장인 임아등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흑수를 치게 하였다.
대문예가 일찍이 인질로서 경사에 왔다가 개원(開元713~741) 초에 환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무예에게 이르기를
[흑수가 당나라 집안의 벼슬아치를 청하였으니 곧 그를 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당나라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는 사람이 많고 군사가 강하기가 우리보다 1만 배가 되니 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 것은 단지 스스로 멸망으로 찾아드는 것입니다. 옛날 고려의 전성기 대는 강병이 30만이었으나 당나라 집안에 대적하며 붙좆아 섬기지를 않았더니 당나라 군사가 한차례 당도함에 땅을 쓸어 버린 듯 모두 죄다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발해의 군중은 고려보다 몇 배나 작으니 이로 당나라 집안에 거슬러 배반하고자 한다면 ㄱ 일은 반드시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무예가 따르지 않았으며 문예는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대 또 글을 올려 거듭 간하였다. 무에가 노하여 종형인 대일하를 보내어 대문예가 마침내 그의 무리를 버리고 사잇길로 내달아오니 조서를 내려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대문예가 얼마되지 않아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대문예의 죄상을 상세히 말하고는 청하여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상께서 은밀히 문예를 보내어 안서로 가게하고 무예에게 답하여 이르기를
[문예는 멀리로부터 와서 붙좇아 투항하였으니 도의로서 죽이지는 못하오 지금은 내쳐서 영남으로 향하게 하

였는데 이미 보내기에 거의 도착하였을 것이오]
하며 이에 그의 사신은 마문궤와 홀물아는 머무르게 하고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그렇게 답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을 누설한 자가 있어서 대무예가 또 글을 올려 이르기를
[대국은 믿음으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속일 수 있습니까 지금 듣건대 문예가 영남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 하니 엎드려 청하건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여버리십시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홍려소경 이도수와 원복등은 벼슬아치들을 능히 감독하고 살피지 못하여 사실의 누설이 있게 되었다 하여 도수는 좌천되어 조주자사가 되었으며 복은 택주자사가 되엇다. 사자를 보내 대문예를 잠시 영남으로 향하게 하고는 이로서 그에게 답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5
⊙二十年, <武藝>遣其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 詔遣<門藝>往<幽州>徵兵以討之, 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 屬山阻寒凍, 雪深丈餘, 兵士死者過半, 竟無功而還. <武藝>懷怨不已, 密遣使至<東都>, 假刺客刺<門藝>於<天津橋>南, <門藝>格之, 不死. 詔<河南府>捕獲其賊, 盡殺之.

20년에 대무예가 그의 장수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자사 위중을 공격하였다. 조서를 내려 대문예를 파견하여 유주로 가서 군사를 징발하고 이로 그를 토벌하게 하였으며, 게다가 태복원외경 김사란에게 영을 내려 신라로 가서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남쪽 경게를 공격하게 하였다. 연이은 산의 험준함에 막히고 추위에 얼어죽으며 눈의 깊이가 열자 남짓으로 죽은 병사가 반을 넘자 결국에는 아무런 전공이 없이 돌아왔다. 대무예가 원한을 품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은밀히 사자를 동도로 보내어 자객을 빌어 대문예를 천진교의 남쪽에서 질렀는데 문예가 그들과 대적하여 죽지는 않았다. 조서를 내려 하남부에서 그 도적들을 잡아들이게 하고 모두 죽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6
⊙二十五年, <武藝>病卒, 其子<欽茂>嗣立. 詔遣內侍<段守簡>往冊<欽茂>爲<渤海郡王>, 仍嗣其父爲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 <欽茂>承詔赦其境內, 遣使隨<守簡>入朝貢獻. <大曆>二年至十年, 或頻遣使來朝, 或間歲而至, 或歲內二三至者. 十二年正月, 遣使獻<日本國>舞女一十一人及方物. 四月·十二月, 使復來. <建中>三年五月·<貞元>七年正月, 皆遣使來朝, 授其使<大常靖>爲衛尉卿同正, 令還蕃. 八月, 其王子<大貞翰>來朝, 請備宿衛. 十年正月, 以來朝王子<大淸允>爲右衛將軍同正, 其下三十餘人, 拜官有差.

25년에 대무예가 병으로 죽자 그 아들 흠무가 대를 이어 자리에 올랐다. 조서를 내려 내시 단수간을 파견하여 가서 흠무를 책봉하여 발해군왕으로 삼고, 그대로 부친을 이어 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흠무가 조칙을 받들고는 그 나라 안을 크게 사면하였으며 사심을 파견하여 수간을 따라 들어가 예방하고 공물을 바쳤다.
대력(大曆766-779)10년에 이르기까지 혹은 빈번히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였으며, 혹은 한해 걸러 이르기도 하고 혹은 한 해에 두세 번을 이르렀다.
12월에 정월에 사신을 보내 일본국의 무녀 열한 명과 토산물을 바쳤다. 4월과 12월에 사신이 다시 왔다.
건중(建中780-783) 3년 5월과 정원(貞元785-805)7년 정월에 모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기에 그들의 사신 대상정을 위위 경동정에 제수하고 번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에 그들의 왕자 대정한이 와서 예방하고는 청하여 숙위에 들고자 하였다. 10년 정월에 들어와서 예방한 왕자 대청윤을 우위장군동정으로 삼고 그 휘하 30여 명은 관직을 차등있게 임명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7
⊙十一年二月, 遣內常侍<殷志贍>冊<大嵩璘>爲<渤海郡王>. 十四年, 加銀靑光祿大夫·檢校司空, 進封<渤海國王>/$各本原作[進封渤海郡王], 據下文及《冊府》卷九六五改.$/. <嵩璘>父<欽茂>, <開元>中, 襲父位爲郡王左金吾大將軍, <天寶>中, 累加特進·太子詹事·賓客, <寶應>元年, 進封國王, <大曆>中, 累加拜司空·太尉; 及<嵩璘>襲位, 但授其郡王·將軍而已, <嵩璘>遣使敍理, 故再加冊命. 十一月, 以王姪<大能信>爲左驍衛中郞將·虞候·<婁>蕃長, 都督<茹富仇>爲右武衛將軍, 放還.

11년 2월에 내상시 은지섬을 파견하고 대승린을 책봉하여 발해군왕으로 삼았다.
14년에 은청광록대부-검교사공의 관작으로 더해 주고 발해국왕으로 올려 봉하였다.
승린의 부친 흠무는 개원(開元713-741) 연간에 그 부친의 작위를 답습하여 군왕좌금오대장군이 되었으며, 천보(天寶741-756) 연간에는 거듭 특진-태자첨사-빈객의 관작이 더하여 졌으며, 보응(寶應762-763)원년에는 국왕으로 올려 봉해졌고, 대력(大曆766-779)연간에 거듭 사공-태위로 더하여 관작이 수여되었는데, 승린에 이르러 작위를 답습하게 하면서 단지 군왕-장군만을 제수하였을 뿐이었더니 승린이 사신을 보내 이치를 밝히므로, 그 까닭에 다시 더하여 책명하였다. 11월에 왕의 조카 대능신으로 좌효위중랑장-우후-누번장을 삼고 도독 여부구로 우무위장군을 삼고는 놓아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8
⊙二十一年, 遣使來朝. <順宗>加<嵩璘>金紫光祿大夫·檢校司空. <元和>元年十月, 加檢校太尉. 十二月, 遣使朝貢. 四年, 以<嵩璘>男<元瑜>爲銀靑光祿大夫·檢校 書監·<忽汗州>都督, 依前<渤海國王>. 五年, 遣使朝貢者二. 七年, 亦遣使來朝. 八年正月, 授<元瑜>弟權知國務<言義>銀靑光祿大夫·檢校 書監·都督·<渤海國王>, 遣內侍<李重旻>使焉.

21년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순종이 숭린의 관작에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을 더하여 주었다.
원화(元和806-820)원년 10월에 검교태위의 관작을 더하여 주었다. 12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4년에 숭린의 아들 원유로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을 삼고 앞서와 같이 발해국왕으로 하였다.
5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것이 두 번이었다.
7년에 역시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8년 정월에 원유의 아우 권지국무 언의로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도독, 발해국왕을 삼고 내시 이중민을 파견하여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09
⊙十三年, 遣使來朝, 且告哀. 五月, 以知國務<大仁秀>爲銀靑光祿大夫·檢校 書監·都督·<渤海國王>. 十五年閏正月, 遣使來朝, 加<大仁秀>金紫光祿大夫·檢校司空. 十二月, 復遣使來朝貢. <長慶>二年正月, 又遣使來. 四年二月, <大叡>等五人來朝, 請備宿衛. <寶曆>中, 比歲修貢. <大和>元年·四年, 皆遣使來朝.

13년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고 또한 상중임을 아뢰었다. 5월에 지국무 대인수로 은청관롱대부-검교비서감-도독-발해국왕을 삼았다.
15년 윤정월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니 대인수에게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의 관작을 더하여 주었다. 12월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장경(長慶821-824)2년 정월에 또 사신을 보내왔다.
4년 2월에 대예등 5명이 와서 예방하고 청하여 숙위에 들고자 하였다.
보력(寶曆825-827)연간에 해마다 조공의 직분을 닦았다.
대화(大和827-835)원년과 4년에 모두 사신을 보내와서 알현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渤海靺鞨-10/10
⊙五年, <大仁秀>卒, 以權知國務<大 震>爲銀靑光祿大夫·檢校 書監·都督·<渤海國王>. 六年, 遣王子<大明俊>等來朝. 七年正月, 遣同中書右平章事<高寶英>來謝冊命, 仍遣學生三人, 隨<寶英>請赴<上都>學問. 先遣學生三人, 事業稍成, 請歸本國, 許之. 二月, 王子<大先晟>等六人來朝. <開成>後, 亦修職貢不絶.

5년에 대인수가 죽자 권지국무 대이진으로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도독-발해국왕을 삼았다.
6년에 왕자 대명준등을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7년 정월에 동중서우평장사 고보영을 보내와서 책봉을 사례하고 아울러 학생 세 사람을 보내 고보영을 따라와서 청하여 상도에 나아가 학문을 닦고자 하였다. 먼저 보낸 학생 세 사람은 학업이 점차 이루어짐에 청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2월에 왕자 대선성등 여섯 사람이 와서 예방하였다.
개성(開成836-840)연간 후에도 역시 조공의 직분을 닦음이 끊이지 않았다.

[출처] [원사료] 구당서 동이전 발해말갈(舊唐書 東夷傳 渤海靺鞨) (YGSM 고구려 길드) |작성자 여소제

http://cafe.naver.com/ygsm7/7648

말갈을 붙인건 얕잡아보기위해서죠;; 서울님아들이 우리 부산사람들 보고 부산말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는 말갈족이 같이 있어서 그렇다고도 하네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백제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9.20 쩝. 원서를 읽지도 않고 어떻게 역사를 논하겠습니까? 역사를 논하는건 무엇으로 논하는거죠? 기본적으로 정사가 받쳐줘야 역사의 틀이 만들어지지요. 그러면 유득공의 발해고도 삼국사기도 읽어서는 안됍니다. 또 잘못된 역사관련글이라고 하셨지만 과연 정사를 잘못된 게시글로 말할수 있꼤습니까?
  • 답댓글 작성자동북공정차단하자!! | 작성시간 08.09.20 흐음...그렇군요. 제가 잘못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백수공망이 | 작성시간 08.09.20 백제사님의 말이 맞습니다. 역사를 논하는것에 있어서는 그에 관련된 원서가 필요한 법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백제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9.20 ;; 사과를 하실 필요까지야;;
  • 작성자조용성 | 작성시간 08.09.20 발해사 관련 서적들의 상당수가 재야학자들이 쓴 책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