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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환족과 훈족의 역사가 서린 로마 콜로세움

작성자러브 선(鮮)|작성시간14.04.26|조회수565 목록 댓글 0

 

 

 

환족과 훈족의 역사가 서린 로마 콜로세움

자유와 평화라는 천부니즘의 새로운 부활을 통해 혁신사회를 구현

 

 

▲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Colosseum)의 모습

 

콜로세움(Colosseum)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피 튀기는 검투사들의 혈전, 인간 살육으로 이어지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미쳐가는 관중, 저 살육의 경기장 한쪽에서 이런 인간이성들이 얼마나 하찮은 권력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 갈 수 있는가를 바라보며 한탄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기막힌 장면들을 모두가 다 함께 모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인간 살육의 현장, 바로 그 곳은 고대 이탈리아 로마문명의 모든 영육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던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이다. 나는 오늘 이러한 콜로세움의 역사적인 한 단면을 살펴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바삐 서둘러 콜로세움을 찾는다. 나의 눈앞에 들어나는 웅장한 콜로세움이, 또한 나의 뜨거운 심장을 압도한다. 어찌 저런 웅장한 건물을 과거 2000년 전에 지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저 감탄사만 나온다.

 

우리들은 과거 2000년 전의 모든 선조들의 역사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예외 없이 모두가 다 미개한 역사로 부정하며 난도질만하고 있는데, 저들은 어찌 저런 웅장한 역사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이처럼 나는 선조들의 역사를 눈물로 감싸며, 나의 가슴 속에 한없이 밀려오는 애환의 한민족역사를 스스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시 과거 찬란했었던 위대한 로마의 역사를 상기한다. 맑은 하늘아래 들어나는 웅장한 콜로세움의 모습! 그러나 콜로세움은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햇살 속에서 음산함과 칙칙함을 함께 들어내 보인다. 그리고 그 음산함 속에서 조용하고 고요함이 나의 가슴속으로 또한 한없이 찾아든다. 아마도 이러한 조용한 고요함은 바로 살육의 경기장에서 자신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죽어가야만 했었던, 그 수많은 죽은 검투사들의 영혼들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죽어간 검투사들의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이 콜로세움(Colosseum)이 주는 정신적인 문화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원래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이때 여기서 앰피테아트룸(Amphitheatrum)원형경기장, 원형극장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플라비움(Flavium)은 로마 베스파시안 황제 가문의 성 플라비우스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베스파시안 황제의 원래 이름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였다고 한다. 또한 이처럼 본래는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Colosseum)의 유래선정에 대해서는 바로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었다던 네로 황제의 동상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네로 황제의 동상은 고대사회의 7대 불가사의로 불린 로도스의 거상(Colossus of Rhodes)을 본 따 높이가 무려 30m 정도에 달하도록 만들었다고 전 한다.

 

 

콜로세움(Colosseum)앞에 있는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

 

이처럼 콜로세움(Colosseum)은 바로 이러한 거대한 구리 청동상(Colossus Neronis), 그리고 거대하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콜로세움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이름은, 바로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 콜로서스 네로니스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콜로세움의 원래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콜로세움(Colosseum)은 로마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을 위해 로마제국의 독재자였던 네로가 당시 불법으로 점유하여 가지고 있었던 황금저택(Domus Aurea)과 거대한 인공호수, 바로 그 자리에 후대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공사착공을 시작하여, 드디어 80년대에 이르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한 경기장이다. 그리고 이들은 콜로세움(Colosseum)의 건설을 통해 위대한 로마의 승리가 온 세상에 새롭게 잉태되었음을, 즉 다시 말해 세계가 로마를 위해 존재한다는 강한 인식의 자신감을 모두 들어낸다.

 

그리고 그 강한 자신감으로 로마제국을 건설해간다. 바로 강력한 군사력과 정복된 자들에게 행하는 보복의 자치권 부여라는 정치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의 국가정책은 타민족의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콜로세움(Colosseum)은 바로 이러한 저항을 하는 반외적인 저항세력들을 잠재우기 위해 건설된다. 당시 로마 정치가들은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에서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불만을 잠재우며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되, 만일 여기서 일이 여의치 않으면 때로는 보복을 행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나는 다시 그 옛날의 콜로세움의 역사를 상기하며 물끄러미 콜로세움을 내려다본다. 이때 콜로세움에서 수많은 죽은 원혼들의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콜로세움(Colosseum)에서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노예 검투사들의 거친 숨소리, 맹수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의 비명소리 혹은 탄식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지금 현재 관객석에서 생생히 울려 퍼지는 거친 함성소리처럼 내 앞에 그대로 전개되어 오는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검투사의 칼에 찔려 온 몸으로 피를 뿜어내는 짐승들의 극심한 고통소리마저, 나의 서늘한 가슴으로 그대로 전율처럼 전해져온다. 연이어 나는 콜로세움위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그 사색을 통해 이 모든 탄식의 소리들이,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운 검투사들의 강한 자유에의 의지임을 알게 된다. 죽는 자와 죽음을 보며 미쳐 즐기는 자! 이 극렬한 역사의 현장에서 아마도 검투사들은 모든 인류가 그토록 꿈꿔 온, 그 자유를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들은 좀 더 콜로세움을 통해서 인류가 꿈꿔온 진정한 자유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콜로세움의 건축학적 구조 속에서, 이를 분석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콜로세움(Colosseum) 내부의 모습


 

콜로세움의 건축학적 구조에서 들어난 천부니즘

 

콜로세움(Colosseum)의 건설을 처음 추진한 사람은 네로 황제였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을 로마 중심부에 짓기로 한다. 그러나 그가 군사 반란에 쫓겨 자살하는 바람에 건립 계획은 도중에 중단된다. 네로가 죽은 이후 내전을 거쳐 최종승자가 된 베스파시아누스황제는 70~72년께 대형건물인 콜로세움을 짓기 시작한다. 콜로세움과 같은 원형경기장은 그 전에 율리우스-클라우디아 가문의 황제들에 의한 소규모의 건축사례들이 있었지만(Campagna), 이처럼 로마에 있어서 최초이며 전대미문의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콜로세움은 79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숨질 무렵에는 3층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공사를 완성한 사람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였다.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인 70년에 예루살렘과의 유대독립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10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4만 명의 포로를 동원하여, 드디어 콜로세움을 그의 아버지가 숨진 이듬해인 80년에 완공한다. 공사기간이 10년 정도가 걸렸으니, 당시 건축기술과 건물크기를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히 빨리 지은 셈이 될 것이다. 이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동생인 도미티안 황제가 검투사, 동물 등이 이동할 수 있는 지하 공간인 히포지움을 추가한다.

 

당시 티투스 황제는 콜로세움의 완성을 기념해 100일 동안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그 당시 총독을 지내기도 했던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100일 동안 진행된 콜로세움 개장 기념행사 때 희생된 동물만 무려 9천 마리를 넘었다고 한다. 그 후 240년 콜로세움에서 열린 축제 때 죽은 사람과 동물의 숫자를 적은 역사 기록들도 나타난다. 그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 2천 명사자 70마리야생말 40마리코끼리 30마리표범 30마리기린 19마리하이에나 10마리호랑이 10마리물소와 코뿔소 각 1마리 등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로마 정치가들에게 있어서 콜로세움(Colosseum)은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한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된다. 또한 이를 통해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하는 세력들에게는 그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좀 더 이러한 콜로세움의 건축구조를 통해, 그 속에 숨어있는 문화적인 정신문화를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건축구조물의 특성을 살펴보자.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살육의 투기장(鬪技場)인 콜로세움(Colosseum)을 살펴보면,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내부공간의 넓이는 3357m², 그리고 외벽(外壁)의 높이는 52m4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1층은 높이 10.5m의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높이 11.85m의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11.6m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4층은 관중들이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 있도록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대장치를 지탱하는 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 즉 갈레리아가 있다. 이 갈레리아(Galleria)는 이집트산 콩, 음료수 등을 파는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서로 함께 조우했을 것이다. 그리고 경기장 바닥은 모래로 덮이고, 곳곳에는 사냥장의 분위기를 살려 나무와 구릉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바닥 밑에는 노예들과 맹수들을 수용하여 가두던 각종 우리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처럼 콜로세움은 1층으로부터 도리스식()·2층의 이오니아식·3층의 코린트식의 원주(圓柱)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그리고 4층의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의 설계자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미치아누스의 건축가 라비리오라고 하기 도 하고, 가운덴치오라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단지 모두 다 추측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무튼 티투스 황제는 당시 이 장엄한 건축물을 통해 로마제국의 위용을 마음껏 자랑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콜로세움의 건축구조물을 통해 몇 가지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 콜로세움의 설계 평면 도면

 

 

첫째, 전체적인 건축구조 형식을 4층 타원형으로 하여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하고 4층은 관중들이 뜨거운 태양빛을 피하도록 벨라리움 천막 형식으로 장식했다는 점이다.


둘째, 독립공간에는 갈레리아(Galleria)를 만들었으며,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은 반사상(放射狀)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셋째, 건축물 설계자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콜로세움의 건축구조물의 특성을 통해, 당시 로마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그 속마음을 좀 더 자세히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은 왜 콜로세움을 4층의 타원형으로 하여 각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 그리고 4층은 벨라리움의 천막형식으로 만들었을까? 또한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의 관람석은 왜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했으며, 더욱이 건축물 설계자는 왜 분명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들은 이제 이 점을 분명히 분석해보아야만 한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콜로세움은 로마문명이 나은 위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문명이란 인류의 삶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인류는 25만년이라는 긴 삶의 역사를 살아왔다. 하지만 유럽문명이 만들어진 것은 6천년에 지나지 않는다. 즉 문명(文明)은 인간의 삶보다도 그 수명이 짧으며, 절대로 인간의 수명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아시아동방의 문명은 유럽문명보다도 더 4천년이나 앞선 1만년 이상의 문명사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앞선 동방의 문명이 고대로부터 기원전 1세기경에 이르기까지 이란·그리스·인도·유럽 문명 등에 지대한 영향력 미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의 주체는, 바로 다름 아닌 환인과 환웅으로 이어지는 환족(Hwans)의 문명임과 동시에 고대 동유럽에 있어서 게르만의 이주를 만들어내어, 로마문명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강력한 영향을 미친 훈족(Huns)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콜로세움의 건축기법에 들어간 정신문화는, 이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건축기법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의 건축양식인 도리아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벨라리움 등의 건축양식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콜로세움의 건축양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대 한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천부니즘(Cheonbunism)의 건축기법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천부니즘은 한민족의 위대한 정신문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모든 우주만물을 이루는 하늘··사람을 다함께 사랑하자는 것이다. 또한 이 천부니즘의 건축기법에서는 하늘을 나타내는 원(. ), 땅을 나타내는 방(. ), 사람을 나타내는 각(. )의 이치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즉 원방각(圓方角)의 수리기하학적인 이론을 말함이다. 이제 이를 콜로세움의 건축양식에 맞추어 그대로 적용해보자.

 

 

  

▲ 콜로세움의 건축양식(도리아식. 이오니아양식.코린트양식의 기둥주) 

 

 

이 콜로세움(Colosseum)의 건축기법은 4층의 타원형으로 하여 각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 그리고 4층은 벨라리움의 천막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1층의 도리아식(Dorian style)에 사용되는 기둥의 건축기법은 짧고 굵으며, 간결·웅장함을 나타내는 남성상이 들어나도록 방(. )형의 건축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2층의 이오니아식(Ionic order)에 사용되는 기둥의 건축기법에는 여성적인 경쾌함과 우아함이 잘 나타나도록, 기둥머리 부분에 전아한 소용돌이모양의 장식을 하며, 가는 기둥에 주초(柱礎)를 첨가한 원(. )형의 건축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3층의 코린트식(Corinthian order)에 사용되는 기둥의 건축기법에는 이오니아양식보다 더 화려한 아름다운 아칸서스 나뭇잎 무늬의 기둥형상을 하고 있다. 바로 이 코린트식 건축기법은 아름다운 인간(. )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중이 않아있는 계단의 4층은 방사상의 벨라리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바로 인간의 의지가 밖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콜로세움은 천부니즘(Cheonbunism)의 이론에 의한 천지인(天地人)을 상징으로 하는, 원방각의 수리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바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다시 해석하면 1층에 땅()을 만들고, 2층에 하늘()을 만들고, 3층에 인간()의 제국을 만들고, 그리고 4층에 그 인간의 제국이 무한히 번창해가는 것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이 천지의 모든 역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배는 곧 신()의 지배가 아닌, 바로 로마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의 강력한 지배문화는 바로 수많은 관중들이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빛을 피할 수 있게끔 만든 관중석을 벨라리움의 천막형식으로 덮어 만들었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로마 궁전이나 교회문화에 나오는 폐쇄적인 권력의 탐욕성이 그대로 콜로세움에서도 같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콜로세움의 건축기법에는 천부니즘(Cheonbunism)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들의 역사를, 바로 로마가 콜로세움 안에 폐쇄적으로 잡아 가두어 놓고, 그리고 그 안에서 그를 통제함으로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지배문화를 온 세계에 형성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검투사들의 죽음으로 나타나고 광기에 미쳐버린 로마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또한 콜로세움의 전문적인 설계자가 없었다는 것은, 바로 당시의 사회적인 혼란상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콜로세움의 건설에 있어서 네로·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도미티안 황제들로 이어지는 권력쟁취라는 추한 탐욕의 문화에서 그대로 다 들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전문설계자가 아닌 황제자신들의 권력의지를 담아 직접 탐욕으로 미쳐버린 콜로세움을 건설한 것이다. 이는 콜로세움의 설계도를 직접 위에서 평면으로 펼쳐놓고 보면 그대로 모두 다 들어난다. 콜로세움을 놓고 위에서 아래로 평면도를 펼쳐보면 마치 우물 정()자 모양으로 계단을 이루며, 방사상으로 모든 것을 폐쇄적으로 가두고 있음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로마는 바로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우물()안에 모든 저항세력들을 가두어 두고, 그리고 이들의 모든 국권(國權)과 인권(人權)을 탄압한 것이다. 콜로세움! 이는 바로 거대한 로마문명의 웅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방에서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던 천부니즘(Cheonbunism)의 모든 역사관을 무너뜨리고, 그리고 그 모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현장이기도 하다.

 

▲ 훈족 아틸라왕과 게르만족의 콜로세움(Colosseum) 공략

 

훈족이 콜로세움의 흥망사에 미친 영향

 

콜로세움(Colosseum)의 건설을 처음 추진한 네로 황제이후 베스파시아누스황제는 70~72년께 대형건물인 콜로세움을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79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숨진 이듬해인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공사가 완공된다. 하지만 콜로세움이 이처럼 세워지고 수많은 검투사들이 죽어가던 바로 그 시절, 로마가 처한 국내외적인 국제정세는 매우 혼탁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동방으로부터 유럽으로 진출해온 훈족(Huns)들에 밀린 게르만의 고트족들이 로마제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고트족의 공식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첫 침략은 238년 히스트리아 지역 이였다. 이때 크니와(Kniwa)라고 알려진 고트족의 족장은 아브릿투스 전투에서 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를 사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에 이들은 그리스 전 지역으로 고트족의 부족들인 테르빙기족(Thervingi)과 그레우퉁기족(Greuthungi), 그리고 기타 다른 게르만족들과 함께 침공해 밀려들어온다.

 

이런 혼란스러운 게르만의 고트족들이 로마를 침략하는 상황에서도 로마는 여전히 콜로세움에서 무자비한 광란의 그리스도교들을 박해하는 사건까지 자행한다. 이처럼 콜로세움에서 자행되었던 그리스도 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난 다음에서야 겨우 중단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로마는 힘을 일어가고 있었다.

 

대략 370년경에서부터 5세기 걸쳐 훈족과 게르만의 동고트족은 연합을 맺어 로마에 강한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Attila)526년 대다수 게르만족들과 함께 로마로 쳐 들어와 콜로세움을 훼손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처럼 훈족들이 콜로세움을 훼손시킨 데에는 표면적으로 그들의 조상들이 로마에 당한 한을 풀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목적은 돌과 돌을 이어주던 구리를 가져다가 군사무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훼손목적은 이 콜로세움이 그들의 천부니즘(Cheonbunism)이라는 정신문화를 무참히 훼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훈족들이 콜로세움 건물 전체를 다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콜로세움을 파괴한 것은 로마귀족들과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로마 시민들에게 들어내 보이기 위해 교회나 궁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이에 필요한 건축 자제 콜로세움을 파괴하여 얻고자 한 것이다. 오늘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르베리니 궁전도 이때 콜로세움에서 뜯어온 돌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빗대어 후세 사람들이 남긴 말이 너무나도 유명해 여기에 옮긴다.

 

 

야만인들도 하지 않았던 것을 바르베리니 가문이 다 하였다.
(Quod non fecerunt Barbari fecere Barberini.)

 

이런 상황에서도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원형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중세기에는 군사적인 요새로 사용한다. 그리고 6세기 무렵에는 콜로세움 안에 교회가 세워지고, 13세기경에는 프랑기파니 가문이 콜로세움을 접수한다. 그리고 이 가문은 콜로세움을 보강해 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콜로세움은 로마인들의 생활 속에 여전히 그대로 존재했었다. 또한 1349년 대지진으로 콜로세움 남쪽 외벽이 무너지자, 이를 이용하여 교회와 궁전의 건축자재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14세기에는 한 종교 단체가 콜로세움 북쪽 3층 지역에 무단으로 들어가 거주하기 시작해 19세기 초까지 살았다고 한다.

 

마침내 16세기에 교황 식스투스 5세는 콜로세움을 모직공장으로 바꿀 계획을 세운다. 즉 로마의 영혼을 더럽힌다고 생각했던 매춘부들을 공장에 직원으로 취직시켜 먹고 살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로마를 정화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 계획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또한 17세기 들어 알티에리 대주교는 콜로세움을 투우장으로 만들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시민들이 난리를 떠는 바람에, 이 계획 역시 무산되고 만다.

 

그러나 콜로세움을 성지로 바꾼 사람은 18세기 교황 베네딕토 14세였다. 그는 고대 로마 시대 때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콜로세움에서 순교했으므로, 이곳을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콜로세움에서 채석하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그리고 마침내그리스도의 수난에 콜로세움을 봉헌한다. 이후 매년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의 죽음을 기리는 성 금요일이 되면 교황 등 수천 명이, 이 콜로세움에 모여 촛불 행사를 벌인다.

 

베네딕토 14세의 선언 이후, 여러 교황들은 콜로세움 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농부들을 쫓아낸다. 바로 농부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경작 면적을 늘리기 위해 콜로세움을 계속 파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들은 계속하여 콜로세움에 대한 보강 작업을 벌인다. 1807년과 1827년 콜로세움 정면을 보강하는 공사가 펼쳐졌고, 1831· 1846· 1930년대에는 콜로세움 내부 개선 공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렇게 보강작업을 하는 가운데에도 콜로세움을 계속 망가뜨리는 세 번째 적은 바로 기나 긴 세월과 환경오염이다. 콜로세움은 지은 지 2천 년이 넘은 건물이어서 자연 손상이 매우 심각하다. 여기에다가 로마 시내의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각종 매연으로 콜로세움의 석재가 많이 훼손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콜로세움의 흥망사를 살펴보면서,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건축된 건축물을 바로 그 탐욕 때문에 모두 무너진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탐욕의 권력문화에 정종유착의 개입현상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콜로세움이 무너진 것은 대지진도 아니며, 기나긴 세월과 환경오염도 아니다. 콜로세움이 무너진 것은 바로 로마권력이 나은 탐욕의 문화로부터 모두 다 무너진 것이다. 또한 로마의 무너짐 속에는 검투사들의 한 많은 자유에의 외침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다시 콜로세움이라는 인간 살육의 경기장에서 죽어 간 검투사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의 격투장면

 

 

콜로세움 검투사들의 대결사와 그리고 자유에의 외침

 

우리들은 콜로세움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검투사들일 것이다.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 또는 검투사와 무서운 야수들이 서로 목숨을 걸고 대결을 벌이는 그 잔혹한 장면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상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 검투사들의 대결이 벌어지는 행사를 무네라(munera)라고 부른다. 이 무네라(munera)라는 말은 원래 의무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는 사회 고위층이나 부자들이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펼치는 각종 공공행사나 사업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 무네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검투사들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나중에는 검투사들의 무네라(munera)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검투사는 글라디아토르(Gladiator)’라고 부른다. 즉 이는 검객(swordman)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는 바로 검()을 뜻하는 ‘Gladius’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런데 글래디우스(Gladius)는 주로 고대 로마 보병들이 사용하던 짧은 검을 뜻하며, 그리고 긴 검은 스파타(Spatha)’라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검투사(Gladiator), 무네라(munera)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정설이 없다. 단지 여러 가지 가설들만 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경 다마스쿠스 출신인 그리스의 역사학자 니콜라우스는 이탈리아 북부 투스카니가 검투사와 무네라의 발생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00년 정도 뒤 로마 역사학자 리비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이나 지역 사람들이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이긴 뒤 이를 축하하는 행사에서 무네라(munera)를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겨난 것으로 알려진 검투사 학교가 캄파니아 지역에 있었다는 게 이를 입증하는 증거 중 하나라는 것이다. 캄파이나 지역 도시인 파에스툼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를 보면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를 든 검투사 2명이 그려져 있다.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어쨌거나 검투사(Gladiator)와 무네라(munera), 로마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수입품이라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로마의 역사학자 리비는 로마에서 벌어진 첫 무네라(munera)의 기록을 기원전 264년경으로 본다.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초창기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데시무스라는 남자가 사망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3개조의 검투사들로 하여금 가축시장에서 무네라를 벌이게 했다고 한다.

 

 

▲ 콜로세움 격투장면에 흥분하는 관중

 

 

또한 기원전 216년 마르쿠스 아멜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들들이 역시 별세한 아버지를 기리며 포로 로마노에서 사흘 동안 검투사 22명을 동원해 무네라(munera)를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에는 포에니 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이끈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전쟁에서 숨진 아버지, 삼촌과 다른 희생자들을 기리면서 무네라(munera)를 거행했다고 한다. 그 당시 로마인들은 물론 비로마인들도 앞 다퉈 검투사로 자원하고 나서 싸우겠다는 기록들이 전한다. 아울러 기원전 183년에는 푸블리우스 리시니우신의 장례식 때 아들들이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눠 주면서 검투사 120명을 동원해 무네라(munera)를 거행했다고 한다.

 

이어서 기원전 105년에는 집정관이 카푸아에서 수입해온 검투사들을 동원해 국가 차원의 무네라(munera)를 처음 실시했다고 한다. 이 무네라(munera)의 원래 목적은 군사훈련의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인기가 높아지면서 고위층과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행하던 무네라(munera)는 마침내 국가적인 행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네라(munera)는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인기가 높아져간다. 특히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사비를 들여 무네라(munera)를 열기도 한다. 일부 정치인들은 부친 장례식의 서거 기간에 맞춰 무네라를 늦추기도 한다. 바로 장례식 때 검투사 행사를 펼쳐야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검투사들도 강제로 동원되기에 이른다. 이들을 무네라(munera)에 끌어낸 사람은 바로 네로 황제이다. 그는 로마를 방문한 아르메니아 왕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이런 추악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여성 검투사들은 다른 행사에도 동원된다. 주로 돈 많은 하층계급 사람들이 사적으로 주최하는 소규모 무네라(munera)에 여성 검투사가 출연시킨 것이다. 그리고 여성 검투사가 난장이들과 대결을 벌였다는 기록들도 있다.

 

무네라(munera)에는 황제들도 검투사 시합에 참여한다. 칼리굴라· 티투스· 하드리아누스· 베루스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황제들은 죽는 것은 물론 다칠 일도 전혀 없을 정도의 철저한 대비를 미리 해놓고 무네라(munera)에 참여한다. 특히 코모두스 황제는 자신을 부활한 헤라클레스로 꾸민 뒤 행사에 참가해 하루에 사자 100마리를 죽였다고 한다. 물론 그는 경기장에 직접 내려가지 않고 사자와 일정한 거리를 둔 연단에서 이런 짓거리를 자행한 것이다.

 

이런 무네라(munera)행사들이 기획되면 주최 측에서는 대회 내용을 담은 광고문을 시내 곳곳에 붙인다. 이 광고문에는 행사 날짜, 장소, 행사 이유, 참가 검투사 수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네라(munera)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음식, 음료수, 과자는 물론 가끔 경품도 제공했다고 한다. 점전 시간이 지나면서 검투사의 이름과 격투 스타일은 물론 검투 기록을 담은 책자가 발간되기도 했다고 한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는 BC 65년에 검투사 320개 조가 출전하는 엄청난 규모의 무네라(munera)를 기획한다. 그는 더 많은 검투사들을 동원하려 했지만 원로원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고 한다. 바로 이 행사 때문에 카이사르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원로원은 한 번의 무네라(munera)에 출전할 수 있는 검투사의 수를 302개 조로 한정시켰다고 한다.

 

무네라(munera)의 인기가 커지고 이 행사를 열어야 귀족이나 정치인의 지지도가 높아지는 현상이 점차 반복되면서 무네라의 개최로 파산하는 사람까지 드디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무네라(munera) 의 개최 비용에 제한을 두는 사치금지법을 만들어낸다. 집정관은 무네라를 한 번 열 때 검투사 120명 이상을 투입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비용도 25천 디나르(현재 가치 약 50만 달러)로 제한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가 여는 무네라(munera)의 비용도 18만 디나르(360만 달러)로 규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네라를 열어야 황제의 인기도 지속되기 때문에, 후속 황제들은 무네라 규모를 계속 키웠나갔다고 한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무네라(munera)123일 동안 열면서 검투사를 무려 1만 명이나 투입했다고 한다. 이처럼 점점 더 잔혹해지고, 그리고 그 잔혹함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어나가는 살육의 장면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급기야 콜로세움의 검투사 전투는 407년에 가서야 중단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로마시민들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큰 활역을 주는 오락거리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반발을 무릅쓰고도 결국 검투사 중단 조치를 취한 사람은 호노리우스 황제였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텔레마쿠스라는 수도사의 행동에 감동받아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 텔레마쿠스는 금욕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그가 콜로세움에 갔다가 검투사들끼리 끔찍한 살육전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스타디움 관중석에서 나와 지하로 내려가 칼을 들고 싸울 준비를 하는 검투사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텔레마쿠스는 검투사들에 밀려 콜로세움으로 나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도 검투사들에게 전투를 중지하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미 피 맛을 볼때로 본 로마 관중들은 그의 행동에 분노할 뿐이었다. 그들은 텔레마쿠스에게 돌을 던졌고, 결국 그는 돌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이후 기독교도였던 호노리우스 황제는 이 소식을 전해 듣자 검투사 대결을 즉각 중지시켰다고 한다.

 

텔레마쿠스는 이렇게 기독교 순교자가 된 것이다. 그는 로마 역사상 콜로세움에서 순교한 사실을 기록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1~3세기 사이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콜로세움에서 사자 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증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로마의 다른 원형경기장에서 기독교도들이 처형됐다는 역자적인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콜로세움에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들만이 있을 뿐이다. 과연 무네라(munera)에서 목숨을 잃은 검투사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죽어간 동물들은 얼마나 될까? 역사학자 키스 홉킨스는 매년 8천 명 이상이 이렇게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네라(munera)! 이것이 과연 과거 로마라는 한 제국이 인류에게 남긴 문명의 유산이란 말인가? 우리들은 콜로세움의 무네라(munera)라는 그 잔혹(殘酷)사를 통해 인간이 탐욕을 가지면, 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함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즐기며 살 수 있다는 쾌감! 그것은 바로 죄악이다. 콜로세움에서 죽어간 많은 검투사들의 죽음, 그것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유의 갈망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온 탐욕이라는 권력 앞에서 진정한 죽음의 자유인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이 자유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아야만 한다.

 

 

콜로세움이 우리에게 남긴 역사적인 자유의지

 

나는 콜로세움을 이제 빠져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금 콜로세움을 상기한다. 탐욕의 권력 앞에서 한갓 놀이게 감으로 전락하여 그저 삶의 의미도 모르고 죽어간 수많은 검투사들의 죽음!, 이것은 바로 자유에의 강한 의지일 뿐이다. 로마의 문명은 기원전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로마는 이 콜로세움과 함께 운명을 맞이한다. 콜로세움은 바로 광기에 미쳐버린 네로황제에 의해 시작된다. 네로황제는 자신을 형상화된 30m의 청동상 콜로서스 네로니스를 세운다. 후대에 이를 바라본 영국의 승려 베대는, 이를 보고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콜로서스가 서 있는 한 로마도 서 있을 것이다.

콜로서스가 무너질 때 로마도 무너질 것이다.

로마가 무너지면 세계도 바로 무너질 것이다.

 

Quandiu stabit coliseus, stabit et Roma

quando cadit coliseus, cadet et Roma

quando cadet Roma, cadet et mundus.

 

위 글에 나타난 콜로서스는 바로 네로의 동상을 지칭함이다. 네로황제가 콜로서스를 세우고 광기가 미쳐 죽어간 후 로마의 베스파시안 황제는 즉위 직후 네로 동상에 태양 모양의 왕관을 씌우고, 그리고 여기에 로마 태양신의 이름을 따서 콜로서스 솔리스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지만, 결국 콜로서스는 바로 무너져버리고 만다. 이후 콜로서스가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데에는 무려 1000년이라는 긴 역사가 흐른 10세기에 이르러서야 바뀐다. 하지만 베대가 애견한 콜로서스가 무너지면, 로마도 무너지고, 그리고 세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그 모든 애견이 빚나간다. 바로 역사를 통해 로마는 무너졌지만, 세계의 역사는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로마는 무너졌으며, 세계의 역사는 왜 강건한 것일까? 바로 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그 모든 자세의 시작해서 결정 나는 것이다.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은 광기에 미쳐버린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수대의 황제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들은 기원전 환족(Hwans)과 훈족(Huns)들로부터 이란·인도·그리스·로마와 유럽문명으로 전해져 간 동방의 천부니즘(Cheonbunism)의 역사관을 부정하며, 이를 토대로 탐욕의 콜로세움을 세운 것이다.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콜로세움의 모든 건축문화에서 들어나듯이, 콜로세움은 전형적인 하늘··인간을 사랑하자는 커다란 인류애의 정신을, 패쇄적인 권력욕으로 전부 무너뜨리는 심각한 건축학적인 구조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구조문화는 곧 무네라(munera)라는 인간 살육의 검투사 살인극으로 자행된다.

 

이 무네라(munera)의 살인극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혼령들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부르짖고 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달라고! 하지만 지금까지도 지구촌과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자유와 평화의 정신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바로 2000년 전부터 시작한 로마 콜로세움의 인권탄압의 현상이 여전히 그대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국가귀족문화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체 노예처럼 몇 품의 돈을 벌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국가귀족사회는 콜로세움의 무네라(munera)라는 살인극 속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광적인 연극을 단지 즐기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를 우리 모두가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 정신이란 그 어떤 종교적인 신앙과 권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자유란 바로 순수한 인간애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수한 인간애는 바로 대우주의 모든 대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콜로세움은 죽음의 문화를 통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콜로세움을 통해 근세의 위대한 르네상스문화를 다시금 부활시키고, 그리고 그 시작을 바로 대한민국에서 승화시켜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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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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