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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

작성자러브선|작성시간18.03.26|조회수309 목록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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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D%EC%9E%90%EA%B5%B0%EC%A0%84%EC%9F%81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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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영어: Crusade 크루세이드[*])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종교전쟁성지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지중해 동해안이교도이단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있던 튀르크족에게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동서 교회의 분열십자군 국가들(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면벌부봉건적

제1차 십자군 이후 6개의 주요 십자군 국가들과 그보다 세력이 미미한 여러 군소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지중해의 십자군 국가들은 결국 모두 멸망하면서 2세기에 걸친 성지 경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1291년 최후의 기독교 전초기지가 무너진 뒤 성지 방면으로는 더 이상 십자군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유럽과 서유럽 내부에서의 십자군은 여러 번 더 이루어졌다. 12세기 후반에는 벤트 십자군이 조직되어 발트 지역과 메클렌부르크, 루사티아독일기사단프로이센 지역에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독일기사단국을 세웠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왕이 자신의 영토를 지중해까지 확장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오스만 제국니코폴리스 전투와 1444년 바르나 전투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것과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복구호기사단대항해시대

십자군에 대한 근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십자군의 명분과 도덕적으로 모순되는 행동들을 지적한다. 교황이 십자군을 파문하는 경우도 있었음이 이를 증거한다. 십자군들은 이동하는 경로상에서 약탈민중 십자군 때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라인란트 학살), 제4차 십자군 때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 약탈지중해의 상업과 교역이 번창, 제노바베네치아 같은 해상공화국기사도

용어[편집]

우르바노 2세가 처음 십자군을 소집했을 당시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대에는 "여행(iter 이테르[*])" 또는 "순례(peregrinatio 페레그리나티오[*])"라는 말들이 사용되었다. 12세기에 "십자가를 지닌 자(crucesignatus 크루케시그나투스[*], 영어: signed with the cross)"라는 말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 종교전쟁을 가리키는 용어는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1]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십자군"을 의미하는 영어 crusade 크루세이드[*]의 어원을 프랑스어: croisade < 고대 프랑스어: croisée, 오크어: crozada, 스페인어: cruzada, 이탈리아어: crociata < 라틴어: crociata에서 찾는다. 이는 "십자가하다", "십자가되다", "십자가 표를 하다", "십자가를 취하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명사에 기인한 표현들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중세 영어는 고프랑스에에서 유래하여 13세기-15세기에는 croiserie, 15-17세기에는 croisée라고 했다. 1575년경 croisade 가 처음 출현하여 1760년경까지 주도적인 표기 자리를 지켰다.[2] 1095년부터 시작된 기독교 종교전쟁들을 가리키는 말로 역사학자들이 "십자군(crusade)"이라는 말을 선택했지만, 워낙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사건들을 하나의 단어로 칭하는 것은, 특히 초기 십자군에 대하여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1]

지중해 동해안의 성지에 대해 이루어진 십자군들은 전통적으로 총 9회차로 구분된다. 최초는 1095년-1099년의 제1차 십자군제9차 십자군찰스 밀스가 1820년 책 《십자군 성지탈환경략사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지도한 제5차, 제6차 십자군은 하나의 원정으로 묶을 수 있고,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지도한 제8차, 제9차 십자군[3]

"십자군"이라고 불릴 만한 종교전쟁의 범주는 학자마다 사용하는 맥락이 다르다. 자일스 컨스터블[4]

  • 전통파(Traditionalists): 지중해 동해안 성지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들을 돕거나 예루살렘성묘[5]
  • 다원파(Pluralists): 당시 재임 중인 교황의 승인에 따라 소집된 원정을 모두 십자군이라고 한다.[6] 이것은 교황이 소집한 모든 군사원정이 그 원인, 정당화, 원정 지역에 무관하게 모두 십자군으로서 동등한 유효성을 갖는다는 천주교회의 입장을 반영한다. 또한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북방 십자군, 기독교 이단을 토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알비 십자군후스 전쟁아라곤 십자군 역시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가 1202년에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7] 또 여러 교황들이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 아들들을 파문하고 내린 토벌령도 십자군이고,[8] 잉글랜드왕 헨리 3세에 대한 두 차례의 토벌령도 십자군이며,[9]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낸 국토재정복(레콩키스타[10]
  • 일반파(Generalists): 라틴 교회와 관련되어 신앙 수호를 목적으로 싸운 모든 종교전쟁을 십자군으로 본다.
  • 대중파(Popularists): 종교적 열정에 기반하여 대중 다수의 참여로 고조된 것들만 십자군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제1차 십자군과 군중 십자군[4]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사라센인[11] 원래 "사라센인"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 아라비아 속주의 사막에 사는 비아랍인[12] 그러다 아랍 부족들도 사라센인이라는 범주에 포함되게 의미가 변화하였고, 12세기가 되면 오늘날의 "무슬림"과 같은 의미의 민족적 종교적 지칭어로 중세 문헌에서 사용되었다.[13] 한편 무슬림들은 서유럽인들을 "프랑크인" 또는 "라틴인"이라고 부르며 비잔티움 제국[14][15] 알리 이븐 알아시르 같은 중세 무슬림 역사가들은 십자군을 "프랑크 전쟁(영어: Frankish Wars, 아랍어: حروب الفرنجة 후룹 알파랑가[*])"이라고 불렀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서양에서 사용하는 "십자군"이라는 말을 그대로 수입하여 "십자가 원정들(영어: campaigns of the cross, 아랍어: حملات صليبية 하말라트 살리비야[*])"라고 부른다.[16]

지중해 동해안 십자군[편집]

배경[편집]

622년-750년 사이의 무슬림 정복전쟁     622년-632년 무함마드 당대      632년-661년 정통 칼리파조      661년-750년 우마이야 칼리파조

예언자 무함마드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고, 632년 죽기 전까지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하나의 정체인도 아대륙 북서부와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남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피레네 산맥공성전[17][18][19]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을 지배한 뒤로도 아랍 세계와 유럽 기독교 세계는 어느 정도 관용하며 무역과 정치적 관계를 지속했다. 천주교도들의 성지순례가 허용되었고, 무슬림 영토에 사는 기독교도들에게는 딤미[20] 이렇게 다양한 문화와 신념들이 혼재하며 평화롭게 경쟁하던 관계는 튀르크족만지케르트 전투셀주크 제국아나톨리아[21] 천주교도 순례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이런 상황들이 전해졌고, 시리아 지역의 항구들과 예루살렘은 점차 각박해졌다.[22]

기독교도들은 우마이야 칼리파조에게 정복당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하는 레콩키스타알폰소 6세톨레도[23] 비슷한 시기인 1091년, 노르만인 모험가 로제 드 오트빌이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시칠리아 토후국[24]

이렇게 여러 전선에서 권력쟁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1054년에는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상호 파문, 기독교 세계가 두쪽나는 동서 교회의 분열[25] 그레고리우스 개혁 이후 교황령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권력을 증가시키려 시도해 왔고, 그 과정에서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중 어느 쪽에 사제 서임권에 대한 우선적 권리가 있느냐는 서임권 투쟁[26][27] 서임권 투쟁 중 대부분의 시기 동안 대립교황 클레멘트 3세가 옹립되어 군림했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초기 재임기 대부분을 로마정당한 전쟁보속[28]

11세기[편집]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29] 같은 해에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30]

제1차 십자군 당시 기사, 병사, 여자들을 이끄는 피에르 레르미트

클레르몽 공의회 직후 피에르 레르미트군중 십자군[31] 피에르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임박한 말세에 대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천국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32] 군중 십자군의 동기에는 빈민들의 구세주의[33] 군중 십자군은 성지로 가는 길에 독일에서 유럽사 최초의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사태를 일으키는데, 이를 라인란트 학살[34] 스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35] 군중 십자군은 동로마에 도착한 뒤 귀족들을 기다리라는 알렉시오스 1세의 충고를 무시하고 니케아로 쳐들어갔다가 튀르크족의 기습을 받고 대패, 불과 3천 명만 살아남았다(키베토트 전투[36]

당시 프랑스왕 필리프 1세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질보에몽 드 타란토와 그 조카 탕크레드 드 오트빌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그 동생 보두앵 드 볼로뉴로렌, 로타링기아, 독일로베르 2세 드 노르망디 공작, 에티엥 2세 드 블루아 백작, 로베르 2세 드 플랑드르 백작[37] 이렇게 모인 제1차 십자군[38]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제후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과 킬리지 아르슬란 1세룸 술탄국[39]

십자군이 튀르크족의 궁기병 전술과 제대로 처음 맞붙어본 것은 도릴라이움 전투[40] 또한 말리크 샤 1세가 죽고 튀르크족은 알레포다마스쿠스[41] 십자군은 3개월에 걸친 고된 행군 끝에 안티오키아[42] 십자군은 8개월에 걸쳐 안티오키아를 공성[43]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제 십자군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 술탄은 모술 영주 카르부가피에르 바르텔레미가 성 안에서 성창[44] 이후 십자군은 획득한 영토를 분배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며 안티오키아에 몇 개월을 눌러앉았다. 그러던 와중 이집트의 파티마조가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탈취했으며, 이집트인들이 지배를 공고히하기 전이 공격의 기회로 부상함에 따라 마침내 공격이 재개되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계속 남아서, 점령지를 동로마 황제에게 반환하겠다던 맹세를 어기고 안티오키아를 자기 것으로 취했다. 이후 나머지 십자군은 레몽의 지휘하에 지중해 동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쾌진격했다.[45]

예루살렘에 대한 첫 공격은 십자군측의 자원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노바인들이 자파[46] 이후 고드프루아는 파티마조 칼리파의 고관 알아프달 샤한샤가 이끄는 지원군을 아스칼론 전투[47]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십자군은 자신들의 성지순례가 완료되었다고 여기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성지에 남은 것은 고드프루아와 기사 300명, 졸병 2,000명 뿐이었다. 고드프루아 외에 남은 제후는 자기 나라를 세울 야망을 가지고 있던 탕크레드 뿐이었다.[48]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민중들 사이에 큰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경건한 천주교도들은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과[49] 안티오키아에서의 동방교회인 학살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50] 한편 이슬람 세계는 제1차 십자군에 대해 남긴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다. 1130년 이전에는 문헌적 증거가 지극히 희박하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화적 오해에 더 큰 원인이 돌려지고 있다. 알아프달을 비롯한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정복과 영구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동기로 충만한 전사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그저 동로마 황제의 사주를 받은 용병대의 선두집단쯤으로 여겼다.[51] 또한 이슬람 세계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와 이집트의 시아파메소포타미아[52]

12세기[편집]

이후 12세기 초의 교황들은 새로이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동지중해 지역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을 계속 파병했다. 1320년대의 주요 사건들로는 풀크 5세 당주 백작의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십자군, 그리고 성전기사단[53] 같은 시기, 교황의 적에게 반하는 것을 통해 면벌을 받는 구상이 흥하였고 이는 정치적 목적의 십자군들의 시작으로 이어졌다.[54] 한편, 모술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28년 알레포를, 1144년 에데사를 함락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서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55][56][57] 프랑스왕 루이 7세[58] 제1차 십자군 때 그러했듯 이번에도 십자군들은 애먼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라인란트, 쾰른,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베르나르 드 클레르보[59][60]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 제후들이 계속 승세를 점했다. 포르투갈왕 아폰수 1세리스본을, 러몸 버렁거 4세 데 바르셀로나 백작토르토사를 함락[61][62] 북유럽에서는 색슨인들과 데인인들이 아직 고대신을 믿는 슬라브족 민족인 벤트인을 토벌하는 벤트 십자군[63] 다만 이 시기 제2차 십자군 이외의 십자군을 공인하는 교황칙서가 내려진 적은 없다.[64] 마침내 1162년 벤트인들은 소멸한 민족이 되었다.[65]

당시 이집트는 수니파 칼리파인 아바스조에서 독립하여 969년부터 시아파 칼리파인 파티마조[66] 이에 예루살렘왕 보두앵 3세는 이집트를 침공하려 했으나 이집트 측에서 160,000 황금디나르비지어(칼리파 밑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재상) 자리에서 쫓겨난 샤와르가 장기의 아들인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딘시르쿠아모리 1세살라흐 앗딘[67] 누르 앗딘은 1174년 사망했다. 누르 앗딘은 십자군 시대에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모두 손에 넣어 시리아를 통일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당대 무슬림들은 장기로부터 누르 앗딘을 이어 살라흐 앗딘으로까지 이어지는 무슬림 세력의 부활이라는 관념을 지지했지만, 그 과정은 말처럼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살라흐 앗딘은 칼리파의 모든 후계자들을 감금했다. 대개 이럴 경우 이전 왕조의 대를 끊기 위해 모조리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선에서 살려 주었다. 상전 누르 앗딘이 죽고 권력을 장악한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에서 자치 정권을 수립해 할거하느냐, 동지중해 세계 제일의 무슬림이 되느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했다.[68]

누르 앗딘이 죽으면서 그의 영토들은 분할되었다. 살라흐 앗딘은 바그다드의 아바스조 칼리파와 누르 앗딘의 아들 아스살리흐 이슬라미 알말리크[69] 살라흐 앗딘은 전성기에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알레포는 장악하지 못했다.[70] 예루살렘 왕국 측의 공격 계획에 대처하기 위한 수비군을 조직했지만, 살라흐 앗딘의 라틴 십자군과의 첫 교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나친 자신감과 전술적 착오로 인해 살라흐 앗딘은 몽기사르 전투[71] 그러나 이 한 차례의 차질에도 불구하고 살라흐 앗딘은 십수 년에 걸친 정치, 강압, 저수준 군사행동을 통해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했다.[72] 1186년 생명이 위중할 정도의 병을 겪고 난 뒤, 살라흐 앗딘은 이슬람 측의 대전사[73] 당시 예루살렘왕 는 예루살렘 왕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을 동원하여 야전에서 영격에 나섰지만, 살라흐 앗딘은 기의 부대를 수자원 보급이 불가능한 사막 속으로 끌어들인 뒤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섬멸했다(하틴 전투5일간의 공성전[74] 아바스 베네딕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3세[75]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소집하는 아우디타 트레멘디 칙서를 발표, 제3차 십자군아크레를 포위했다가 살라흐 앗딘에게 역포위를 당하면서 2년간의 공방전[76][77] 양군 모두 바다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오랫동안 스테일메이트 상태가 지속되었고, 십자군 측은 인육[78]

제3차 십자군이 지중해 동해안까지 가는 길은 다사다난했다.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살레프 강[79] 한편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 사자심왕은 바다를 통해 이동했는데, 리처드와 다른 배로 가던 리처드의 누이 조안과 약혼자 베렝겔라가 난파하여 키프로스이사키오스 콤네노스[80] 하여 전쟁터인 아크레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프랑스왕 필리프 2세[76] 프랑스군과 앙주군아르수프 근교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항구도시 자파[81] 3년의 휴전이 협상되어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가 보장되었다.[82] 리처드는 잉글랜드 국내 문제와 신병으로 인해 동지중해를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살라흐 앗딘도 1193년 3월에 죽었다.[76]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의 맹세를 대신 이루기 위해 1197년 십자군마인츠 대주교 콘라트 1세 폰 비텔스바흐가 지휘하는 독일 십자군은 시돈베이루트[83]

13세기[편집]

1204년 동로마의 제도 콘스탄티노폴리스함락시키는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제4차 십자군[84]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와 매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85] 베네치아에 도달한 기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을 해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인 자다르파문[86] 이 파문은 나중에 철회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면서 원정의 본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그 뒤 일단 물러갔다가 두 번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이번에는 도시를 약탈[87]

13세기는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 결과 1212년의 어린이 십자군[88]

알카밀(우측)을 만나는 프리드리히 2세(좌측). 조반니 빌라니의 《신연대기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제5차 십자군헝가리왕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였고,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장 드 브리엔다미에타[89][90] 다미에타는 무슬림들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91]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이사벨 2세시칠리아하렘제6차 십자군[92] 예루살렘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에서 아크레로 이어지는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들에게 넘기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들이 계속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술탄 알카밀교황 그레고리오 9세[93]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세속 제후들이 종종 원정을 벌였다. 1239년의 남작 십자군나바라왕 티발트 1세콘월 백작 리처드[94] 이 때가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였다. 하지만 그 중흥은 어디까지나 알카밀이 죽고 아이유브조가 분열되어 약화된 것에 기인했기에 사상누각과 같았다.[95]

1244년, 한 무리의 화레즘 용병대가 이집트로 와서 다마스쿠스 토후 아스살리흐 이스마일예루살렘을 공격라포르비 전투[96] 이에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7차 십자군[97] 성공하지 못했다. 루이는 만소우라[98] 10년 기한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고 루이는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났다. 루이는 1254년까지 시리아에 머물면서 십자군 국가들의 공고화를 도모했다.[99] 이후 1265년에서 1271년에 걸쳐, 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100]

13세기 말의 동지중해의 정치 판도는 여러 세력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복잡했다. 바이바르스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기독교도들과 몽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고, 두 번째는 킵차크 칸국일 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부터 노예만프레디와 외교를 맺고 만프레디가 교황청 및 샤를 1세 당주 백작삽바스 전쟁의 결과 경쟁 해상공화국니카이아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101]

프랑스에서는 샤를 당주가 비슷하게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샤를은 시칠리아제8차 십자군튀니스에드워드를 비롯한 소규모 수행단만 계속 남아 싸웠는데, 이것을 제9차 십자군[102] 1281년 교황 선거 결과 프랑스인인 교황 마르티노 4세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배후 조종에 의해 시칠리아 만종 사건아라곤왕 페로 3세아라곤 십자군[103]

십자군 원정의 쇠퇴와 십자군 국가들의 파탄의 원인은 상당히 다면적이다. 무슬림 세계의 통일과 열정적 지하드를 통해 이를 설명하려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토머스 애스브리지[104] 1289년 트리폴리가,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우트르메르[105] 멸망한 십자군 국가의 기독교도들은 키프로스[106][107]

유럽 대륙 십자군[편집]

북방 십자군[편집]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12세기 교황들(첼레스티노 3세, 인노첸티오 3세, 호노리우스 3세기독교화북방 십자군[108] 1147년의 벤트 십자군에는 색슨인, 데인인, 폴인들이 참여하여, 메클렌부르크루사티아 일대의 폴라비아 슬라브족베르톨트 폰 하노버브레멘 주교 하르트비히 폰 우틀레데검우기사단과 함께 발트 지역[108] 1226년에는 콘라트 1세 마조비에츠키독일기사단헤움노[108][109] 검우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패배하자 그레고리오 9세는 1237년 검우기사단의 잔여 병력을 독일기사단에 합류시켜 리보니아 기사단[110] 12세기 중반이 되면 독일기사단은 프루센[111] 뿐만 아니라 프스코프 공화국이나 노브고로드 공화국네바 강 전투에서 노브고로드군이 스웨덴인이 주력인 가톨릭 군대를 패퇴시켰고, 2년 뒤에는 빙상 전투[112]

알비 십자군[편집]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알비파(왼쪽 사람들)를 파문하고, 십자군이 알비파를 학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은 알비파라고도 하는 카타리파[113] 카타리파는 프랑스툴루즈 백국루이 9세의 남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과 결혼했고, 잔과 알퐁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못한 채 잔이 죽자 툴루즈 백국은 카페 왕조[114]

보스니아 십자군[편집]

보스니아 십자군독립 보스니아 교회보고밀파보스니아모히 전투[115]

레콩키스타[편집]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이베리아 기사단이 이합집산하여 칼라트라바 기사단산티아고 기사단무어인, 무와히드조그라나다 토후국[116]

14, 15, 16세기[편집]

대 오스만 십자군[편집]

소규모 십자군 시도들이 있던 14세기를 거쳐, 14-15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발칸 반도 정복아비뇽[117] 1365년, 키프로스왕 피에르 1세 드 뤼지냥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는데, 이를 알렉산드리아 십자군[118] 1390년에는 루이 2세 드 부르봉 공작이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을 적으로 삼은 바르바리 십자군[119]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오스만 튀르크는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동로마의 영향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시슈만니코폴리스교황 보니파시오 8세서방 교회의 분열[120] 이 십자군은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부르고뉴 공자 장다뉴브 강니코폴리스 전투[121]

오스만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했고, 술탄 무라드 2세가 1444년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120]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메흐메트 2세는 여세를 몰아 1456년 헝가리로 쳐들어왔고, 후녀디 야노시베오그라드에서 농성[122] 에네아스 실비우스(훗날의 교황 비오 2세)와 조반니 다 카페스트라토교황 인노첸시오 8세사보이아, 피에몬테, 도피네 일대에서 발도파[123]

이 시기가 되면 지중해 주변에서 오스만에게 유의미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체는 베네치아가 유일했지만, 베네치아의 소위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상업적 이윤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오스만-베네치아 전쟁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124]

후스 십자군[편집]

후스 전쟁이라고도 하는 후스 십자군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진행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화형급진 후스파를 제거하기 위해 온건 후스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교리를 용인해주는 바젤 협정[125]

십자군 국가[편집]

십자군의 유산[편집]

십자군 서술의 사학사[편집]

각주[편집]

  1. Asbridge 2012, 40쪽
  2. "Crusade
  3. Davies 1997, 358쪽
  4. Constable 2001, 12–15쪽
  5. Constable 2001, 12쪽
  6. Riley-Smith 2009, 27쪽
  7. Lock 2006, 255–56쪽
  8. Lock 2006, 172–80쪽
  9. Lock 2006, 167쪽
  10. Davies 1997, 362–64쪽
  11. Tolan 2002, xv쪽
  12. Retso 2003, 505–06쪽
  13. Retso 2003, 96쪽
  14. "Frank
  15. "Latin
  16. Determann 2008, 13쪽
  17. Wickham 2009, 280쪽
  18. Lock 2006, 4쪽
  19. Hindley 2004, 14쪽
  20. Findley 2005, 73쪽
  21. Asbridge 2012, 27쪽
  22. Asbridge 2012, 28쪽
  23. Bull 1999, 18–19쪽
  24. Mayer 1988, 17–18쪽
  25. Mayer 1988, 2–3쪽
  26. Rubenstein 2011, 18쪽
  27. Cantor 1958, 8–9쪽
  28. Riley-Smith 2005, 8–10쪽
  29. Asbridge 2012, 34쪽
  30. Pierson 2009, 103쪽
  31. Hindley 2004, 20–21쪽
  32. Slack 2013, 228–30쪽
  33. Cohn 1970, 61, 64쪽
  34. Slack 2013, 108–09쪽
  35. Chazan 1996, 60쪽
  36. Hindley 2004, 23쪽
  37. Asbridge 2012, 43–47쪽
  38. Hindley 2004, 30–31쪽
  39. Asbridge 2012, 52–56쪽
  40. Asbridge 2012, 57–59쪽
  41. Asbridge 2012, 21–22쪽
  42. Asbridge 2012, 59–61쪽
  43. Asbridge 2012, 72–73쪽
  44. Asbridge 2012, 72–82쪽
  45. Asbridge 2012, 146–53쪽
  46. Asbridge 2012, 96–103쪽
  47. Asbridge 2012, 104–06쪽
  48. Asbridge 2012, 106쪽
  49. Riley-Smith 2005, 23–24쪽
  50. Tyerman 2006, 192–94쪽
  51. Asbridge 2012, 111–13쪽
  52. Asbridge 2012, 114쪽
  53. Lock 2006, 144–45쪽
  54. Lock 2006, 146–47쪽
  55. Riley-Smith 2005, 104–05쪽
  56. Lock 2006, 144쪽
  57. Hindley 2004, 71–74쪽
  58. Hindley 2004, 77–85쪽
  59. Tyerman 2006, 281–88쪽
  60. Hindley 2004, 77쪽
  61. Hindley 2004, 75–77쪽
  62. Villegas-Aristizabal 2009, 63–129쪽
  63. Lock 2006, 148쪽
  64. Lock 2006, 213쪽
  65. Lock 2006, 55–56쪽
  66. Asbridge 2012, 266–68쪽
  67. Asbridge 2012, 272–75쪽
  68. Asbridge 2012, 282–86쪽
  69. Asbridge 2012, 287–88쪽
  70. Asbridge 2012, 292쪽
  71. Asbridge 2012, 307–08쪽
  72. Asbridge 2012, 322쪽
  73. Asbridge 2012, 333–36쪽
  74. Asbridge 2012, 343–57쪽
  75. Asbridge 2012, 367쪽
  76. Asbridge 2012, 686쪽
  77. Asbridge 2012, 398–405쪽
  78. Asbridge 2012, 424쪽
  79. Tyerman 2007, 35–36쪽
  80. Asbridge 2012, 429–30쪽
  81. Asbridge 2012, 509쪽
  82. Asbridge 2012, 512–13쪽
  83. Lock 2006, 155쪽
  84. Tyerman 2006, 502–08쪽
  85. Davies 1997, 359–60쪽
  86. Lock 2006, 158–59쪽
  87. Asbridge 2012, 530쪽
  88. Asbridge 2012, 533–35쪽
  89. Lock 2006, 168–69쪽
  90. Riley-Smith 2005, 179–80쪽
  91. Hindley 2004, 561–62쪽
  92. Asbridge 2012, 566–71쪽
  93. Asbridge 2012, 569쪽
  94. Asbridge 2012, 573쪽
  95. Asbridge 2012, 574쪽
  96. Asbridge 2012, 574–76쪽
  97. Tyerman 2006, 770–75쪽
  98. Hindley 2004, 194–95쪽
  99. Lock 2006, 178쪽
  100. Tyerman 2006, 816–17쪽
  101. Asbridge 2012, 628–30쪽
  102. Asbridge 2012, 643–44쪽
  103. Runciman 1958, 88쪽
  104. Asbridge 2012, 660–64쪽
  105. Lock 2006, 122쪽
  106. Asbridge 2012, 656쪽
  107. Tyerman 2006, 820–22쪽
  108. Davies 1997, 362쪽
  109. Lock 2006, 96쪽
  110. Lock 2006, 103쪽
  111. Lock 2006, 221–22쪽
  112. Lock 2006, 104, 221쪽
  113. Riley-Smith 1999, 4쪽
  114. Lock 2006, 163–65쪽
  115. Lambert 1977, 143쪽
  116. Lock 2006, 211쪽
  117. Lock 2006, 187–88쪽
  118. Lock 2006, 195–96쪽
  119. Lock 2006, 199쪽
  120. Davies 1997, 448쪽
  121. Lock 2006, 200쪽
  122. Lock 2006, 202–03쪽
  123. Lock 2006, 204쪽
  124. Davies 1997, 544–45쪽
  125. Lock 2006, 20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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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러브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3.26 종교는 거의 같은 부류에 속하지요..불교 ㅡ회회교(이슬람교)ㅡ서교(기독교) 모두 같은 교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파아란 한은경 | 작성시간 18.03.26 러브선 돈 만드는 기계라고 정의하던데요. 삼십년 평생 종교 연구했던 맥스웰박사란 분이
  • 답댓글 작성자러브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3.26 파아란 한은경 아 고래요..종교가 돈 만드는 기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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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들국화 | 작성시간 18.03.27 카페에와서 좋은정보많이얻어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러브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3.27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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