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05.11 중국에 최초로 선교한 마테오리치 (Matteo Ricci) 사망
중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 사망(1610-05-11)-네이버뉴스, 2002-05-1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136074
ㆍ중국서 동·서양 문화교류 가교역
유럽이 새 항로를 탐험하던 대항해 시대, 군대를 뒤따라 아시아에 입성한 사람들은 종교인이었다.
이들 중에는 현지의 ‘미개인’들을 폭력적으로 다뤄 악명이 높은 자들도 있었지만, 체류지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현지인들에게 존경받은 선교사도 있었다. 16세기 중국을 찾아와 동·서양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그랬다.

리치는 155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1571년 로마 예수회에 입회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 그는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은 물론 수학·천문학·지도제작법 등도 배웠다.
본격적인 아시아 선교는 1583년 중국 광둥 지역의 자오칭에서 시작했다. 이곳에서 머문 6년간 리치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포르투갈어·중국어 사전을 편찬했고, 1584년 미주와 유럽의 지명을 최초로 중국어로 표기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불가능한 검은 튤립’이라고 불리는 이 지도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1602년 인쇄된 지도가 지난 1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공개됐다. 리치는 이 지도에 “먼 옛날, 그 누구도 북·남 아메리카나 마젤라니카(초기 지도 제작자들이 호주·남극을 부르던 명칭)와 같은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00여년 전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이 대륙들을 발견했다”고 적어넣었다.
리치가 전해주는 서양의 학식과 문물은 중국 황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리치는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잘 알았고 유교에 관한 이해도 깊었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성품도 리치가 중국에 장기 체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598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 리치는 가톨릭을 소개하는 서적을 잇따라 집필했는데, 조선 천주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친 교리서 <천주실의>도 이 시절(1603년) 탄생했다. 이 책은 동·서 사상교류사에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로로 병약해진 리치는 1610년 5월11일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다. 중국인들은 박학다식하고 다정다감했던 유럽인 선교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황실은 정성을 다해 그의 시신을 안장토록 했다. 그의 묘소는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위원회 당교 구내에 있다.
/경향신문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0.6~1610.5.11]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 1571년 예수회에 가입, 클레시오 로마노에서 콜라비우스에게 수학 ·천문학 등을 배우고 인도를 경유하여 1582년 마카오에 도착, 중국 내지(內地)로의 입국을 결심하고 중국어를 공부한 후, 1583년 조경(肇慶:廣東省에 있었음)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傳敎)를 개시하였다. 이어 소주부(韶州府) ·남창부(南昌府) ·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北京]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명(明)나라의 만력(萬曆) 신종(神宗)에게 바친 자명종(自鳴鐘:탁상시계) ·대서양금(大西洋琴:피아노의 전신)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베이징에서의 정주를 허락받았다. 선무문(宣武門) 내에 주택을 구입하고, 이곳을 전교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는 독서인층(讀書人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믿고, 서양의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학 원본》과,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그 밖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있다. 이러한 학문은 중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어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의 유력한 관료도 개종(改宗)하여 그의 전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저서에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등이 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naver
리치[ Matteo Ricci ]
중국식 이름은 이마두(利瑪竇).
1552. 10. 6 로마 교황령 마체라타~1610. 5. 11 중국.
16세기 중국 명대(明代)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
그는 30년 가까이 중국에서 살았고, 중국과 서양의 상호 이해를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외국인에게는 대개 닫혀 있던,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었다.
젊은시절과 교육
리치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마체라타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리치는 약사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공무에 바쳤고, 한때는 마체라타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조반나 안졸렐리는 소박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맏아들로 태어난 마테오 리치는 집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예수회 성직자들이 1561년 마체라타에 세운 학교에 들어갔다. 고전 공부를 끝내고 16세 때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가 그곳에서 예수회의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껴, 1571년 8월 15일 그 교단에 가입을 신청했다.
1540년에 교황의 승인을 얻은 예수회는 그리스도의 사도적인 진취정신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 예수회 수도사들은 과학적 탐구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선배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리치는 자신도 그러한 일에 종사할 것을 결심했다.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 클라비우스에게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직후, 극동지방의 선교사업을 자원했다. 1577년 5월 포르투갈로 가서, 배가 떠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코임브라대학에서 잠시 공부했다. 이듬해 3월 24일에 리스본을 떠나, 9월 13일에 인도 중서부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의 전초기지인 고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지만, 성직자로 서품을 받은 것은 1580년에 건강 때문에 요양하러 가 있던 말라바 해안의 코친에서였다. 고아로 돌아온 그는 1582년 4월에 중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엄청난 인구를 가진 중국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 특히 예수회 전도사들이 몹시 들어가고 싶어하는 지역이었다. 예수회 창설자인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함께 처음 중국으로 갔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 하비에르는 1552년에 상촨[上川]이라는 작은 섬에서 굳게 닫힌 본토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리치가 도착했을 때에도 중국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문을 닫고 있었지만, 예수회의 선교전략은 그동안 바뀌어 있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문화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강조되었다. 그때까지의 선교사들은 서양 관습을 강요하고 종교의식에서 라틴어를 사용하게 하려고 애썼다. 이런 종래의 방식 대신 현지 관습을 받아들인다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채택한 사람은 리치를 예수회에 가입시킨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였는데, 발리냐노는 이 무렵 극동 지역의 예수회 전도본부에 순찰사로 와 있었다(순찰사는 어떤 지역의 모든 종교 단체에서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감독하는 책임자임). 중국에서 전도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먼저 미켈레 루지에리가, 나중에 리치가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 소환되었으나 루지에리는 1588년 11월에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젊은 리치만 남아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 임무와 명예를 안게 되었다.
중국 선교
1582년 8월 리치는 중국 동해안에 있는 작은 반도 마카오에 도착해, 곧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와 루지에리는 당시 광둥 성[廣東省]의 성도였던 자오칭[肇慶]에 정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리치는 그의 저서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 History of the Introduction of Christianity in China〉에서 그들의 선교사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부들(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업이 어떠한 의혹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처음에는 우리의 교회법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방문한 뒤 남는 시간에 중국의 언어·문학·관습·예절을 배우면서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려고 애썼으며, 고결한 생활을 솔선수범하여 그들을 감동시킴으로써 전도하는 전략을 썼다. 말이 서투르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처럼 신중을 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지에리는 최초의 로마 가톨릭 교리서를 중국어로 출판했고, 리치는 '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는 주목할 만한 세계지도의 초판을 간행했다. 이 지도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세계의 여러 지역과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를 보여주었다.
1589년에 리치는 자오칭에서 소주(韶州:지금의 사오관[韶關])로 가서, 유학자인 구태소(瞿泰素)와 사귀게 되었다. 리치는 그에게 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고, 그대신 중국의 요인들(고위 관리나 무관)과 유학자들을 소개받았다. 구태소는 리치가 승복(그는 중국에 들어올 때 이 옷을 입었음)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승복보다는 중국 선비의 옷차림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제안했다. 리치는 광둥 성을 떠나자마자 당장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국에 차츰 익숙해지자, 리치는 수도인 베이징[北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무렵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참전해 일본과 충돌한 결과 모든 외국인이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1595년의 첫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베이징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는 돌아가는 길에 우선 난창[南昌]에 들렀다가 난징[南京]으로 갔다. 1595~98년 난창에 머무는 동안, 황실의 두 왕자와 친구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1명의 부탁을 받고, 〈교우론 交友論〉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그가 중국어로 쓴 첫번째 책이다. 1599년 난징에 정착한 그는 주로 천문학과 지리학에 열중했다.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에서 그는 이 사업의 효과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신부들은 중국인들에게 생소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나 명쾌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이 진리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정보는 중국의 모든 학자들에게 순식간에 퍼졌다. 이러한 점을 통해 중국인들이 예수회 전도사들과 우리나라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들 이외의 다른 나라를 묘사할 때는 으레 오랑캐라는 낱말을 사용하지만, 그때부터는 우리나라를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했다."
난징에서 얻은 평판에 용기를 얻은 리치는 다시 한번 베이징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1601년 1월 그는 예수회 동료인 디에고 판토하라는 스페인 젊은이와 함께 베이징에 들어갔다. 황제는 리치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수도에 머무는 것은 허락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고, 베이징 사람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거나 복음을 설교하면서 여생을 바쳤다. 그는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개종시키려고 애썼기 때문에, 자연히 이지조(李之藻)와 서광계(徐光啓) 같은 뛰어난 인물들과 많이 접촉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지내는 동안 〈신에 대한 확신론〉(1603)·〈25개의 복음〉(1605)·〈유클리드의 기하원본〉(1607)·〈10가지 역설〉(1608)·〈천주실의 天主實義〉 등의 여러 책을 중국어로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이수광(李?光)이 1614년에 지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관해 언급했다.
리치가 성공한 비결은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능력이었다. 중국인 친구 펑잉징에 대해 그가 한 말은 이 위대한 선교사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 신부들의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했고, 우리 신부들도 그의 일을 우리 자신의 일처럼 생각했다."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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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1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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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마테오 리치 묘. 중국 공산당 베이지시위원화 당교(黨校)구내에 있다. snowyowls at wikipedi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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