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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의 고지도

[스크랩] 1610.05.11 중국에 최초로 선교한 마테오리치 사망

작성자러브 선(鮮)|작성시간14.03.31|조회수524 목록 댓글 0

1610.05.11 중국에 최초로 선교한 마테오리치 (Matteo Ricci) 사망

 

 

 

 

 

 

 

 

중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 사망(1610-05-11)-네이버뉴스, 2002-05-1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136074

 

 

 

 

 

ㆍ중국서 동·서양 문화교류 가교역

유럽이 새 항로를 탐험하던 대항해 시대, 군대를 뒤따라 아시아에 입성한 사람들은 종교인이었다.

이들 중에는 현지의 ‘미개인’들을 폭력적으로 다뤄 악명이 높은 자들도 있었지만, 체류지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현지인들에게 존경받은 선교사도 있었다. 16세기 중국을 찾아와 동·서양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그랬다.

 


리치는 155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1571년 로마 예수회에 입회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 그는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은 물론 수학·천문학·지도제작법 등도 배웠다.

본격적인 아시아 선교는 1583년 중국 광둥 지역의 자오칭에서 시작했다. 이곳에서 머문 6년간 리치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포르투갈어·중국어 사전을 편찬했고, 1584년 미주와 유럽의 지명을 최초로 중국어로 표기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불가능한 검은 튤립’이라고 불리는 이 지도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1602년 인쇄된 지도가 지난 1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공개됐다. 리치는 이 지도에 “먼 옛날, 그 누구도 북·남 아메리카나 마젤라니카(초기 지도 제작자들이 호주·남극을 부르던 명칭)와 같은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00여년 전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이 대륙들을 발견했다”고 적어넣었다.

리치가 전해주는 서양의 학식과 문물은 중국 황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리치는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잘 알았고 유교에 관한 이해도 깊었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성품도 리치가 중국에 장기 체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598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 리치는 가톨릭을 소개하는 서적을 잇따라 집필했는데, 조선 천주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친 교리서 <천주실의>도 이 시절(1603년) 탄생했다. 이 책은 동·서 사상교류사에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로로 병약해진 리치는 1610년 5월11일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다. 중국인들은 박학다식하고 다정다감했던 유럽인 선교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황실은 정성을 다해 그의 시신을 안장토록 했다. 그의 묘소는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위원회 당교 구내에 있다.

 

/경향신문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0.6~1610.5.11]

중국명은 이마두(). 1571년 예수회에 가입, 클레시오 로마노에서 콜라비우스에게 수학 ·천문학 등을 배우고 인도를 경유하여 1582년 마카오에 도착, 중국 내지()로의 입국을 결심하고 중국어를 공부한 후, 1583년 조경(:에 있었음)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를 개시하였다. 이어 소주부() ·남창부() ·난징[]을 거쳐 1601년 베이징[]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명()나라의 만력() 신종()에게 바친 자명종(:탁상시계) ·대서양금(西:피아노의 전신)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베이징에서의 정주를 허락받았다. 선무문() 내에 주택을 구입하고, 이곳을 전교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는 독서인층()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믿고, 서양의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학 원본》과,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輿)》이다. 그 밖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輿)》가 있다. 이러한 학문은 중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어 서광계(), 이지조() 등의 유력한 관료도 개종()하여 그의 전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저서에 《천주실의()》 《교우론()》 등이 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naver

 

 

 

 

 

 

리치[ Matteo Ricci ]

중국식 이름은 이마두(利瑪竇).

 

1552. 10. 6 로마 교황령 마체라타~1610. 5. 11 중국.

16세기 중국 명대(明代)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

 

그는 30년 가까이 중국에서 살았고, 중국과 서양의 상호 이해를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외국인에게는 대개 닫혀 있던,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었다.

 

젊은시절과 교육

리치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마체라타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리치는 약사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공무에 바쳤고, 한때는 마체라타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조반나 안졸렐리는 소박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맏아들로 태어난 마테오 리치는 집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예수회 성직자들이 1561년 마체라타에 세운 학교에 들어갔다. 고전 공부를 끝내고 16세 때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가 그곳에서 예수회의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껴, 1571년 8월 15일 그 교단에 가입을 신청했다.

 

1540년에 교황의 승인을 얻은 예수회는 그리스도의 사도적인 진취정신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 예수회 수도사들은 과학적 탐구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선배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리치는 자신도 그러한 일에 종사할 것을 결심했다.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 클라비우스에게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직후, 극동지방의 선교사업을 자원했다. 1577년 5월 포르투갈로 가서, 배가 떠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코임브라대학에서 잠시 공부했다. 이듬해 3월 24일에 리스본을 떠나, 9월 13일에 인도 중서부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의 전초기지인 고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지만, 성직자로 서품을 받은 것은 1580년에 건강 때문에 요양하러 가 있던 말라바 해안의 코친에서였다. 고아로 돌아온 그는 1582년 4월에 중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엄청난 인구를 가진 중국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 특히 예수회 전도사들이 몹시 들어가고 싶어하는 지역이었다. 예수회 창설자인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함께 처음 중국으로 갔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 하비에르는 1552년에 상촨[上川]이라는 작은 섬에서 굳게 닫힌 본토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리치가 도착했을 때에도 중국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문을 닫고 있었지만, 예수회의 선교전략은 그동안 바뀌어 있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문화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강조되었다. 그때까지의 선교사들은 서양 관습을 강요하고 종교의식에서 라틴어를 사용하게 하려고 애썼다. 이런 종래의 방식 대신 현지 관습을 받아들인다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채택한 사람은 리치를 예수회에 가입시킨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였는데, 발리냐노는 이 무렵 극동 지역의 예수회 전도본부에 순찰사로 와 있었다(순찰사는 어떤 지역의 모든 종교 단체에서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감독하는 책임자임). 중국에서 전도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먼저 미켈레 루지에리가, 나중에 리치가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 소환되었으나 루지에리는 1588년 11월에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젊은 리치만 남아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 임무와 명예를 안게 되었다.

 

중국 선교

1582년 8월 리치는 중국 동해안에 있는 작은 반도 마카오에 도착해, 곧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와 루지에리는 당시 광둥 성[廣東省]의 성도였던 자오칭[肇慶]에 정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리치는 그의 저서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 History of the Introduction of Christianity in China〉에서 그들의 선교사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부들(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업이 어떠한 의혹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처음에는 우리의 교회법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방문한 뒤 남는 시간에 중국의 언어·문학·관습·예절을 배우면서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려고 애썼으며, 고결한 생활을 솔선수범하여 그들을 감동시킴으로써 전도하는 전략을 썼다. 말이 서투르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처럼 신중을 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지에리는 최초의 로마 가톨릭 교리서를 중국어로 출판했고, 리치는 '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는 주목할 만한 세계지도의 초판을 간행했다. 이 지도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세계의 여러 지역과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를 보여주었다.

 

1589년에 리치는 자오칭에서 소주(韶州:지금의 사오관[韶關])로 가서, 유학자인 구태소(瞿泰素)와 사귀게 되었다. 리치는 그에게 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고, 그대신 중국의 요인들(고위 관리나 무관)과 유학자들을 소개받았다. 구태소는 리치가 승복(그는 중국에 들어올 때 이 옷을 입었음)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승복보다는 중국 선비의 옷차림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제안했다. 리치는 광둥 성을 떠나자마자 당장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국에 차츰 익숙해지자, 리치는 수도인 베이징[北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무렵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참전해 일본과 충돌한 결과 모든 외국인이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1595년의 첫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베이징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는 돌아가는 길에 우선 난창[南昌]에 들렀다가 난징[南京]으로 갔다. 1595~98년 난창에 머무는 동안, 황실의 두 왕자와 친구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1명의 부탁을 받고, 〈교우론 交友論〉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그가 중국어로 쓴 첫번째 책이다. 1599년 난징에 정착한 그는 주로 천문학과 지리학에 열중했다.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에서 그는 이 사업의 효과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신부들은 중국인들에게 생소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나 명쾌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이 진리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정보는 중국의 모든 학자들에게 순식간에 퍼졌다. 이러한 점을 통해 중국인들이 예수회 전도사들과 우리나라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들 이외의 다른 나라를 묘사할 때는 으레 오랑캐라는 낱말을 사용하지만, 그때부터는 우리나라를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했다."

 

난징에서 얻은 평판에 용기를 얻은 리치는 다시 한번 베이징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1601년 1월 그는 예수회 동료인 디에고 판토하라는 스페인 젊은이와 함께 베이징에 들어갔다. 황제는 리치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수도에 머무는 것은 허락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고, 베이징 사람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거나 복음을 설교하면서 여생을 바쳤다. 그는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개종시키려고 애썼기 때문에, 자연히 이지조(李之藻)와 서광계(徐光啓) 같은 뛰어난 인물들과 많이 접촉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지내는 동안 〈신에 대한 확신론〉(1603)·〈25개의 복음〉(1605)·〈유클리드의 기하원본〉(1607)·〈10가지 역설〉(1608)·〈천주실의 天主實義〉 등의 여러 책을 중국어로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이수광(李?光)이 1614년에 지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관해 언급했다.

 

리치가 성공한 비결은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능력이었다. 중국인 친구 펑잉징에 대해 그가 한 말은 이 위대한 선교사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 신부들의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했고, 우리 신부들도 그의 일을 우리 자신의 일처럼 생각했다."

 

/네이트 백과사전

 

 

‘이마두(마테오 리치)는 천문성상(天文星象)과 산수역법(算數曆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다. 그 근본을 연구하고 증거를 밝혀 억지스러운 말이 없으니 천고에 기이한 재주다. 그는 자기의 학문을 중국에 전했다. 그가 죽은 후 그 나라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와서 동서남북 네 천주당에 살고 있는데, 서천주당이 가장 유명하다.’ (1765년 베이징을 다녀 온 조선의 홍대용의 기록 중에서)

 

 

중국 선교를 위한 준비와 정착, 마테오 리치에서 이마두(利瑪竇)로

1552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중국 선교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광둥성 앞 바다 상촨도(上川島)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 6일 이탈리아 중부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마테오 리치가 태어났다. 리치는 고향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고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1571년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가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이듬해부터 1577년까지 예수회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리치는 철학과 신학은 물론, 그레고리력 제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 신부에게 수학, 천문학, 역법, 시계, 지구의, 천체관측기구 제작법도 배웠다.

 

리치는 1577년 로마를 떠나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 머물다가 이듬해 3월 루제리 등 13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리스본을 출발하여 9월 인도 서부 고아에 도착했다. 1582년 마카오에 도착했고 1583년 9월 10일부터 루제리와 함께 광둥 중부 자오칭(肇慶)에 머물기 시작하여 중국 본토 선교의 첫 발을 내딛었다. 자오칭에 머문 6년간 리치는 중국어, 한문, 중국 문화와 풍속을 익히는 데 전념했다.


 

그러는 사이 루제리와 함께 포르투갈어-중국어 사전을 편찬하고, 루제리가 번역한 십계명 중국어판 [조전천주십계](祖傳天主十戒)를 인쇄했으며, 광둥과 광시를 총괄하는 총독 왕반(王泮)의 요청에 응해 세계지도인 ‘여지산해전도’(與地山海全圖)를 제작했다. (‘산해여지전도’는 1600년) 그러나 1589년 자오칭에서 추방당해 북쪽의 샤오저우(韶州)로 근거지를 옮겼다. 리치는 리치의 첫 발음과 마테오를 음역하여 리마더우, 즉 이마두(利瑪竇)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했다.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1602).
가로 533센티미터, 세로 170 센티미터의 이 세계지도는 선조 36년(1603)에 조선에도 들어왔다.

 

 

황제의 후대 속에 선교와 저술 활동을 펼쳐

1610년 중국인 예수회 수사 유문휘(游文輝 1557~1633)가
그린 마테오리치 초상화로,현재 로마 예수회 본부에 있다.
유문휘는 마카오에서 이탈리아 예수회원 조반니 니콜라오
에게 서양화를 배웠고 난징에서 마테오 리치를 도왔다.


리치는 1595년, 마카오 도착 13년 만에 중국 내륙 북쪽으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1598년 9월 8일 처음으로 베이징에 들어갔지만 거주 허가를 얻지 못했고, 1601년 1월 다시 베이징에 입성했다. 만력제가 자명종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 계기였다. 드디어 1601년 5월 거주 허가를 받고 거처와 식량과 생활비를 제공받게 되었다.

 

자명종을 비롯한 진상품이 만력제의 마음에 꼭 들었고 만력제와 고관들이 리치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인정하여 ‘서양에서 온 선비’로 여겼으며, 과학기술 전문가로서의 활용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리치는 황제의 후대 속에 베이징에서 점차 세례교인을 늘려나갔다. 1580년대 중반 20여 명 정도였던 중국의 가톨릭 신자는 1605년경 1천여 명에 이르렀다(리치 사후인 1636년경에 4만 명, 1644년에는 15만 명에 가까워졌다).

 

리치는 1595년 우정에 관한 에세이이자 격언집인 [교우론]을 펴냈고, 서양의 기억술을 소개하는 [서국기법](1596)도 펴냈다. 베이징에서 [천주실의](1603), 고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잠언집 편역서 [이십오언](1605), 유클리드 번역서 [기하원본](1607), 인생, 죽음, 양심 등 다양한 주제에 가톨릭 교리와 엮어가며 쓴 [기인(畸人)십편](1608) 등을 펴냈고,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1602)를 제작했다. [교우론]과 [기인십편]은 제법 큰 인기를 모았다. 그밖에도 한자의 알파벳 표기법을 시도한 [서자기적], 이지조가 필록한 서양 산술 도서 번역서 [동문산지]와 천문학 도서 [혼개통헌도설], 서광계가 필록한 측량술 도서 [측량법의] 등이 있다.

 

 

마테오 리치가 교유(交遊)한 중국인들

리치가 처음으로 깊이 사귄 중국인은 1589년에 만난 구태소(瞿太素)였다. 구태소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지적 호기심이 강한 명문가 자제였다. 그는 연금술을 배우려고 리치를 찾아왔지만 리치에게서 서양식 계산법, 기하학, 측량술, 시계와 천문기구 제작법 등을 배웠다. 그는 리치의 학식과 인품에 매료되어 늘 리치를 칭송했고, 이것은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리치의 평판이 높아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리치는 예부시랑 섭향고(葉向高)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리치와 그의 후배 선교사들을 적극 도왔다. 리치는 기성 유교 질서에 반항한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와도 만났다. 이탁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명석하고 온화하다. 많은 사람들과 토론을 해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늘 초연한 태도를 지키며 토론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단연 인상적인 인물이다.”

 

리치와 가장 친밀했던 인물은 세례교인이기도 한 관리 서광계(徐光啓)와 이지조(李之藻)였다. 이지조는 선교사들의 구술을 필사하고 많은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다. 그는 특히 가톨릭 선교사들의 한문 저작을 모은 [천학초함]을 편찬했다. 서광계는 리치에게 천문, 역법, 지리, 수학, 수리(水利) 등을 배우고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 기하학 번역서 [기하원본]을 펴냈다. ‘기하학’이라는 말의 연원이 이 문헌이다. 그는 고향 상하이에 천주교당을 설립했다. 리치는 황족인 건안왕(建安王)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리치를 ‘사부’(師傅)로 칭하며 후대했고, 리치는 그에게 [교우론]을 헌정했다. 리치는 그밖에도 많은 중국인 관료,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그들은 ‘서양에서 온 유사(儒士)’로 리치를 대했다.


17세기 독일 예수회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편찬한
일종의 중국백과사전인 [중국도설](China Ilustrata.
1667)에 실린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오른쪽).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마테오 리치에 매료된 이유


마테오 리치가 중국 지식인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먼 외국에서 온 인물이 중국어와 한문과 중국 문화를 깊이 알고 무엇보다도 유교를 안다는 것 때문이다. 유교 경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그를 ‘유학자’에 가깝게 받아들였고, 중국 지식인들에게 그런 리치는 중국 문화와 유교에 대한 자부심을 충족시켜주는 ‘기특한’ 존재이기도 했다. 둘째, 리치가 놀라운 기억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통해 위치 공간과 이미지를 설정하여 많은 것을 단번에 기억하는 그의 기억술은 중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셋째, 리치가 전한 서양의 과학기술 때문이다. 천문학, 역법, 수학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리치가 구사하는 논증과 논리의 섬세함과 엄밀함에 많은 중국인들이 감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리치의 성품과 태도였다. “대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존경하여 그와 교제하였다.” ([명사](明史) 326권 중에서) “그는 행동거지에 늘 다정함과 온화함이 넘치며 누구에게도 늘 친절하다.” (예수회 동료의 말) 선교를 위한 인내심,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력과 개방성, 다방면에 걸친 학식에서 우러나오는 교양,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성품 등이 그를 중국인들 사이에서 마테오 리치가 아닌 이마두로 만들어 주었다.

 

 

마테오 리치의 선교 전략,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킨다”


마테오 리치는 처음에 불교 승려 복장을 했으나 불교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사회 지배층인 유교 지식인, 관료 계층에 접근하기 위해 유사(儒士)의 복장을 갖췄다. 중국에서 선교하려면 유교와 중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융화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 논리를 펼쳤지만, 유교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리와의 유사성 및 일치점을 찾고자 했다. 리치는 ‘가톨릭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내비치는 것도 삼갔다.

 

그는 1594년 사서(四書) 라틴어 번역을 마치고 나서야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 간행) 집필에 본격 착수했다. [천주실의]는 루제리가 1584년 자오칭에서 펴낸 [천주실록] 개정판에 가깝다. 리치가 루제리의 [천주실록] 집필 작업을 도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리치는 [천주실록]의 불교 위주 내용을 [천주실의]에서 유교 위주로 바꾸었다. 조선의 천주교회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는 가톨릭 교리 및 중세철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비교 고찰함으로써 동서 사상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자리 잡았다.

 

리치는 하느님, 즉 천주를 유교 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리치의 이런 방식은 풍응경(馮應京)이 쓴 [천주실의] 서문에 나오는 대로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키는’(以中化中) 방식, 즉 유교와 가톨릭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여 중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리치는 공자 숭배와 조상 숭배도 용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징의 마테오 리치 묘. 중국 공산당 베이지시위원화 당교(黨校)구내에 있다. snowyowls at wikipedia.com

 

 

그러나 리치의 사후, 리치의 방식을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이른바 전례(典禮)문제가 일어났다. 예수회보다 뒤늦게 중국 선교에 나선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예수회를 비난했고, 오랜 논쟁과 갈등 끝에 청나라 건륭제 시대인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반포한 교서에 따라 예수회의 방식이 최종 금지되었다. 그러나 1939년부터 교황청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공자 숭배와 조상 숭배 전례에 교인이 참여하는 것을 용인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때 세계 각지의 전통 의례를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베이징에 묻힌 마테오 리치, ‘성인!, 진정한 성인!’


과로 탓에 극도로 병약해진 마테오 리치는 1610년 5월 11일 저녁 7시경 베이징의 거처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 예배당에 안치됐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곁에 있던 중국인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聖人, 眞是聖人)이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선교사들이 상소를 올리자 만력제는 부성문(阜城門) 밖 샨란에 묘지를 조성하도록 했고, 이듬해 11월 리치의 유해는 샨란 묘지에 안장됐다. 오늘날 베이징 지하철 처공좡(車公庄)역에서 서쪽으로 처공좡대가를 따라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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